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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만해도 강경은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 시장, 낙동강을 끼고 있는 대구 시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로 불릴 만큼 상업이 번성한 곳이었다. 강경에 장이 서면 금강 하류에서 싱싱한 해물을 가득 실은 돛단배와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배들이 떼지어 몰려들었으며 사방에서 모여든 봇짐 장수와 어민들과 농민들로 포구 바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문경새재와 강경을 축으로 부보상들이 살아가는 치열한 삶을 펼쳐 보이는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는 강경 포구를 이렇게 묘사한다.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에 끼여 있어 바닷사람과 내륙의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교역이 활발하였다. 봄과 여름 동안은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느라고 비린내가 포구에 넘치고, 5월의 황새기젓과 7월의 새우젓이 풀릴 때는 오륙십 척의 배가 몰려들어 화장들이 내뿜는 연기로 포구의 하늘은 암회색의 바다였다.한 달에 여섯번씩이나 열리는 장에는 전라도의 곡식과 경강(京江)으로 가는 조곡과 화물이 포구에 쌓였다. 예전의 활기를 잃은 황산나루
강경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강바닥에 점차 흙·모래가 쌓이면서 강의 깊이가 얕아지자 각종 배들의 출입이 뜸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무엇보다 이 시끌벅적하던 포구를 파리 날리는 포구로 바꾸어버린 결정적인 사건은 1914년 서울-목포간 호남선 철도의 개통이었다. 수운에 의지하던 이 지역의 교통 체계와 상권을 철도가 크게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철도가 생겼다고 해서 강경포구가 아주 제역할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금강을 타고 올라온 수산물과 논강평야의 농산물을 탐낸 일제가 강경포구를 경제 수탈의 전초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명맥을 이어가던 강경 포구가 본격적인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해방 뒤였다. 그리고 1980년대 금강 하구둑이 건설되자 황해에서 금강으로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면서 강경포구는 자신의 정체를 잃은 채 급속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 것이다. 황산나루와 박용래 시인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친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옆 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泓來)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원뢰(遠雷) 박용래 시 '담장' 박용래 시인에게 금강은 아무래도 건너지 못할 강이었을 것이다. 누나가 시집갔을 적에도 그랬고 누나가 죽은 후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승에 가로놓인 강이거나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가로놓인 피안의 강이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황산나루의 옛 이름은 놀뫼나루다. 금강의 물길 너머 드넓은 들판으로 저녁해가 떨어질 때 노을은 강경을 온통 노랗게 물들인다. 놀뫼란 이름이 그래서 생겨났다. 봄이 되면 황복과 웅어가 거슬러 올라오던 황산나루였다. 그러나 지금은 황복도 웅어도 배도 올라오지 않는다. 나루에 정박한 민물 매운탕집 몇 집만이 나그네를 반길 뿐이다.
"밀물에/슬리고//썰물에/뜨는//하염없는 갯벌/살더라, 살더라/사알짝 흙에 덮여/목이 메인 백강 하류(白江下流)/노을 밴 황산(黃山)메기/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살더라. 박용래 시 '황산메기' 단 한 번이라도 이곳 황산나루에서 부여 세도 쪽으로 번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노을 밴 황산메기"라는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지 알 것이다. 그 황산메기는 두 눈을 가진 건강한 메기가 아니라 애꾸눈이 메기다. 애꾸눈이 메기는 시인 자신이었던가, 산업화의 그늘에서 점차 활기를 잃어가던 시인의 고향이었던가. 그의 시는 빛바랜 흑백필름처럼 읽는 이에게 어슴프레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내게도 여름밤에 횃불을 켜들고 산개울 바위 틈을 더듬어가며 메기를 잡던 어린 시절이 있다. 메기에 대한 내 아름다운 추억을 망친 건 <메기의 추억>이란 미국 가곡이었던가. 지역경제를 좌우하는 젓갈
강경은 은진 서쪽에 있으며 들판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 우뚝 솟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좌우에 두 줄기 큰 냇물이 흐른다. 뒤로 큰 강이 흘러 조수와 통하였는데 물맛이 그리 짜지는 않다. 마을에 우물이 없어 온 마을에 집집마다 큰 독을 땅에 묻어 두고 강물을 길어 독에 부어둔다. 며칠 지나면 탁한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고 윗물은 맑고 시원하여 비록 여러 날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않는다. 오래 둘수록 더욱 차가워지며 십 년 동안 장질을 앓던 자일지라도 일 년만 이 물을 마시면 병의 뿌리를 뽑는다 한다. 어떤 사람은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짠물이 토질을 고치는데 가장 좋은데 이 강물이 첫째이다"라고 말한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 <팔도총론> 충청도편 강경이 젓갈로 유명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5년 전에 이곳에다 젓갈집을 열었다는 대전상회 주인 강옥자씨(56세)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만해도 젓갈집은 11집에 불과했다고 말한다.그러나 지금은 이런 젓갈집이 140여 곳이 넘는다고 한다.
'황석어(黃石魚)'란 참조기를 가리키는 한자어이다. '조기'를 한자어로 '석수어(石首魚)'라 하는데 이 말을 줄여'석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기 가운데 누런빛을 많이 띠는 참조기를 한자어로 '황석어'라 부르는 것이다. 새우젓은 종류가 여러가지다. 음력 5월에 채취한 새우로 가공 숙성한 새우오젓, 음력 8월에 잡은 새우로 가공 숙성시킨 추젓, 그리고 음력 6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것이 새우 육젓이다. 색깔이 희고 살이 통통하며 맛이 고소해서 주로 김치 담그는데 쓰인다. 새우젓 중에 하품에 속하는 것이 뎃데기젓과 자젓 그리고 곤쟁이젓 등이다. 뎃데기젓은 껍질이 두껍고 단단하며 누런색에 가까운 보리새우(뎃데기)로 담근다. 흔히 잡젓이라고 부르는 자젓은 크기가 작은 새우를 선별하지 않고 담근 것이며 곤쟁이젓은 보통 2~3월에 잡히는 보랏빛을 띠는 어린 새우를 사용해서 담근 젓갈이다. 젓갈을 담는데 쓰이는 재료들은 옛날처럼 군산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여수나 신안 등 먼 곳에서 받아다가 여기서 소금에 절여 가공만 하는 것이다. 곰삭치 않은 시간에 떠나다
강 건너편 부여 세도의 하늘가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놀에는 바라보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비장미가 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황산나루의 노을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만할 것 같다. 작년 이맘때 황산나루에서 바라보았던 노을을 떠올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오후 4시, 서둘러 강경을 떠난다. 세상에 곰삭아야만 제대로 맛이 나는 것은 젓갈 뿐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도 곰삭은 시간과 그렇치 않은 시간으로 나눌 수 있을런지 모른다. 이를테면 오후 4시란 여행자에겐 감흥이 채 곰삭지 않은 시간이다. 저 멀리 강경천변 호남선 철도 옆에 비껴선 미내다리가 보인다. 저 아름다운 돌다리는 쓰임새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아직 멀쩡한 몸을 두고 쓰임새만 잃어버린 사물들이란 얼마나 쓸쓸한가. 강경엔 쓸쓸한 풍경들이 참 많기도 하다. 어쩌면 강경의 젓갈은 저런 쓸쓸한 풍경들을 자신의 짠맛 속에서 삭여버리라는 뜻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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