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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신평화시장 지게 아저씨의 동반자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7. 2. 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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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화시장 지게 아저씨의 동반자
10년차 지게의 눈에 비친 낮은 세상
동대문 신평화시장에서 그를 만나다
텍스트만보기   이병기(wls8118) 기자   
제1회 대학생 기자상 결선 참가자들은 지정기사와 자유기사 각 1편 이상을 출품해야 합니다. 지정기사 공통 주제는 '빛나는 조연'입니다. 이 글은 지게 아저씨의 동반자인 지게의 시각으로 바라본 2007년 시장 풍경입니다. 1월 30일 밤 신평화시장에 가서 지게 아저씨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편집자 주>
이병기 기자는 세종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있는 우리들.
ⓒ 이병기
아흠~ 잘 잤다. 지금은 저녁 8시. 내가 일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주변의 네온사인들은 이미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고개를 올려 쳐다보니 우리 집의 '신평화시장' 네온사인 형도 보입니다. 언제나 나보다 일찍 나와서 반갑게 맞아줍니다.

   오늘의 브리핑
집 나간 '시대정신'
김영환, 돌아오라
[보수 대해부]
"임대주택으로 2마리 토끼 못 잡는다"
'판사 명단 공개' 논쟁은 무지의 소치
'인혁당 질문' 가로막는 박근혜 캠프
김근태, 기자간담회서 탈당파 비판
'IMF 괴물', 자살 3번 결심케한 요물
중국의 모든 길은 올림픽으로 통한다
"핀란드 들어오려면 한국어시험 봐라"
"한국 드라마 모르면 북서 '왕따'"
박태환 선수 훈련파트너 소개합니다
나는 올해로 10살입니다.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는 신평화시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주 5일제는 못합니다. 시장이 쉬는 날에만 같이 쉴 수 있습니다. 아저씨가 쉬지를 않거든요.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가 내 근무시간입니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10년이나 지난 지금은 명실상부한 베테랑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일렬횡대로 줄을 맞춰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보기 좋으라고 줄을 맞춰 있는 건 아닙니다. 엄연히 근무시간인데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매일 늦던 21호가 오늘은 일등으로 서 있습니다. 집이 가장 멀다던 장씨 아저씨가 간만에 일찍 나오셨나 봅니다. 우리는 왼쪽부터 차례대로 일하게 됩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오는 오토바이나 봉고차, 가끔은 승용차에서 내리는 옷들이 우리 일감입니다. 그들이 오면, 순서에 맞춰 아저씨들이 우리 위에 옷들을 올리고 목적지로 데려다줍니다.

오토바이 형, 옷은 꼭 계단 가까이에 내려주세요

2층은 1700원, 3층은 2000원, 4층은 2400원입니다. 넓은 건물 구석에 있건 계단 바로 앞에 있건, 층수별로 돈을 받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계단에서 가까운 곳에 옷들을 데려다 주길 바라지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일은 운이 좋으면 아저씨들이 힘도 덜 들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고생에 비해 받는 수당은 매우 적을 때도 있습니다.

▲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아저씨.
ⓒ 이병기
종종 우리가 서 있는 자리 근처에 있는 전화벨이 울리면 순서가 된 아저씨들은 은근히 미소 짓습니다. 그러고는 힘차게 우리를 메고 건물 위로 올라갑니다.

일종의 특별수당인데, 시장에서 옷을 많이 사는 손님들이 목적지까지 옷을 운반해주면 대금을 지불합니다. 건물 1층까지는 3000원, 길 건너에 있는 곳까지 가면 5000원도 받습니다.

길가에서는 아저씨들이 말하는 '구루마'로 이동하기 때문에 내가 일하는 것보다 힘도 덜 듭니다. 우리 주인인 김씨 아저씨는 '전화 한 통 받아야 되는데'라고 푸념을 합니다. 오늘은 운이 별로 없나 봅니다.

주인아저씨는 올해로 58세입니다. 나를 만들어준 지는 10년 정도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가 됐습니다.

아저씨는 내게 가끔씩 고맙다고 말합니다. 아저씨에겐 아들이 세 명 있는데, 나와 함께 일한 10년 동안 모두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아저씨는 나와 함께 일하는 걸 매우 좋아합니다.

"직장에 다니면 간섭하는 사람도 많잖아, 근데 너랑 일하면 자유롭고 신경 쓰지 않아서 좋구나"하고 말합니다. 나랑 같이 일하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 가 봅니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해태제과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장이 맞지 않아 다른 일을 찾던 차에 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경쟁률이 엄청났습니다. 그때는 벌이도 괜찮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던 유망 직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원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하고자 해도 다른 아저씨 중에 한 분이 나갈 때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합니다.

일거리 없고 힘들어도 항상 웃는 아저씨들이 참 좋습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요즘에는 일부러 찾아와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아 가벼운 짐이 오면 다행이지만, 가끔씩 무거운 짐들이 높은 층까지 가자고 하면 내가 봐도 막막합니다. 아저씨들이 내색은 안하지만, 굳게 다문 입을 보면 얼마나 힘들어할지 상상이 갑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들 사이로 친구와 마주칠 때면 한 명은 다시 물러나야 합니다. 비좁은 통로가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바빠서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옷을 구경하던 손님들을 혹시라도 건드리게 되면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 좁은 통로에서 친구와 마주치면 난감합니다.
ⓒ 이병기
요즘에는 일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철이 바뀔 때는 무려 100짐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에 15짐에서 많아야 20짐 정도 합니다.

근데도 우리 아저씨들은 뭐가 좋은지 항상 웃고 있습니다. 가끔은 애들처럼 툭툭 건드리며 장난치기도 합니다. 따뜻한 자판기 커피 한잔에 동장군도 비켜 지나갑니다.

날씨가 추울 때면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하기도 합니다. 우리랑 일하는 데 면허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음주운전은 일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아저씨들은 적당히 드시고 옵니다.

이렇게 힘들지만 즐겁게 사는 아저씨들이 나는 무척 좋습니다.

나는 지게입니다.

 

 

박태환 선수의 훈련파트너를 소개합니다
내일을 향해 헤엄치는 강용환 선수와 나눈 문자메시지 대화
텍스트만보기   홍성애(sayulove) 기자   
제1회 대학생 기자상 결선 참가자들은 지정기사와 자유기사 각 1편 이상을 출품해야 합니다. 지정기사 공통주제는 '빛나는 조연'입니다. <편집자 주>
홍성애 기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당시 강용환 선수(오른쪽).
ⓒ 이겨라
제77회 전국동아수영대회 3관왕(2005), 제86회 전국체전 4관왕(2005), 제87회 전국체전 2관왕(2006)을 기록하며 한국 수영계를 빛낸 수영선수가 있다. 바로 강용환(22)선수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을 기억하는가? 그곳에서 수영 경기가 있던 날, 한국인의 응원과 관심이 넘쳐났다. 어린 나이에 금메달 행진을 이어가는 박태환(18) 선수 때문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다부진 몸매로 더욱 언론과 팬들의 관심을 받은 박태환은 27일 인터넷 팬 카페 회원들과 팬 미팅도 했다. 그리고 언론은 박태환의 최근 소식을 앞 다투어 보도한다.

이러한 박태환의 훈련파트너가 바로 강용환 선수다. 박태환의 그늘에 가려 언론에 별로 노출되지 않았지만, 강용환은 이미 춘천중학교에 재학할 때 청소년대표 태극마크를 단 유망주다.

그러나 강 선수는 지난 17일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한수영연맹에 개인 훈련을 요청하는 우편물을 보냈으나 하루 늦게 도착한 것. 대한수영연맹은 그 사이 강 선수와 연락이 닿지 않은 점 등을 감안, 이를 대표선수 소집 무단 불응으로 간주해 강 선수를 징계했다.

박태환의 훈련 파트너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는 강용환 선수와 29일 이야기를 나눴다. 괌으로 전지훈련을 떠나는 날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아래 홍)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오늘(29일) 괌에 가신다면서요?
강용환(아래 강) : 네, 안녕하세요. 저녁 8시 비행기로 괌에 전지훈련을 갑니다.

▲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당시 강용환 선수의 모습.
ⓒ 이겨라

: 제가 인터뷰 요청을 해서 혹시 당황하지 않으셨나요? 평소에도 이런 인터뷰 요청 많이 받으시죠?
: 아니요, 인터뷰 요청은 처음이에요. 하지만 당황하거나 놀라지는 않았어요.

: 아, 인터뷰가 처음이시라고요??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게 돼 영광이에요.
: 하하, 네.

: 어떤 계기로 수영을 시작하셨나요?
: 그냥 어릴 때부터 물도 좋아하고 수영도 좋아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선생님이 추천해주시거나 한 적은 없어요. 그냥 제가 좋아서 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 수영을 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상상했나요?
: 어릴 적엔 그냥 별 생각 없이 단순히 즐거워서 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 작년에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좀 힘들었어요. 아버지께서 제가 수영하는 모습을 많이 좋아하셨거든요. 이때 말고는 힘든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힘들었지만 그때부터 더 열심히 해서 작년에 좋은 성적을 낸 거 같아요.

: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와 거의 2년 동안 같이 훈련했고 태릉선수촌에서는 한방을 썼는데, 박 선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걸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세요?
: 뭐 그다지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잘 하니까 당연히 관심을 많이 보이는 거 아닐까요? 솔직히 말해서 조금 샘이 나긴 하지만 자랑스럽죠. 후배가 잘하고 있으니까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죠.

: 박태환 선수의 훈련 파트너로서 훈련을 같이 하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태릉에 있을 때도 같이 했는데, 훈련을 같이 하면 저한테도 태환이한테도 도움이 돼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단 기록이 좋아지고, 서로 부족한 점도 봐주면서 고치죠. 스피드, 턴, 지구력, 기록 모두 같이 훈련하면서 좋아진 것 같아요.

: 조금 껄끄러운 질문을 할게요. 국가대표 선수 자격 박탈 통보를 받았을 때 기분은 어땠어요?
: 별로 껄끄럽지 않은데요? 하하. 그런 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안 썼어요. 물론 국가대표는 제가 어릴 적부터 꾼 꿈이긴 하지만, 다시 열심히 해서 또 발탁되면 되니까요. 경과야 어찌됐든, 제가 보낸 우편물이 늦게 도착했으니까요.

: 수영선수로서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 일단은 올림픽이에요. 수영을 제 길로 생각한 이상 올림픽엔 꼭 출전해 봐야죠. 그 후 모습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군대도 가야 하죠. 일단은 할 수 있을 때까지 수영을 열심히 하는 게 제 꿈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박태환 선수와 달리, 강용환 선수는 박 선수의 훈련파트너로서 언론에 노출되고 있다. 강 선수를 박 선수의 조력자로만 보는 시선이다.

강 선수는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는 별 상관없다고 했다.

"뭐 어때요. 주연이 있으면 조연도 있고 그런 거잖아요."

하지만 박태환 선수의 조력자이기 전에 강 선수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하는 선수다.

강용환 선수는 박 선수와 함께 괌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두 선수 모두 한국 국민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뜨거운 감동을 선사하길 기대한다.

 

 

 

선수들의 절망을 치료하는 '아름다운 조연'
[인터뷰] 국가대표 물리치료사 김미현씨
텍스트만보기   안가희(kh8542) 기자   
제1회 대학생 기자상 결선 참가자들은 지정기사와 자유기사 각 1편 이상을 출품해야 합니다. 지정기사 공통주제는 '빛나는 조연'입니다. <편집자 주>
안가희 기자는 서울여자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 김미현씨.
ⓒ 안가희
1986년 서울아시아게임부터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까지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뛴 선수 뒤엔 항상 김미현(44) 물리치료사가 있었다.

김씨가 처음 국가대표 물리치료사의 길에 들어선 건 1986년, 어느덧 21년이다. 김씨는 1년에 큰 대회 하나씩 치르다 보니 어느새 21년이 돼 있다고 말한다.

"원래 병원에서 트레이닝 받던 중 우연히 공채 시험을 봤어요. 남녀 각각 한 명씩 뽑았는데, 운 좋게 붙은 거죠. 1년에 한 번씩 중요한 대회가 있다 보니, 그거 준비하고 치르고 나면 어느새 1년이 지나버리네요."

고려보건대학 82학번인 김씨는 1986년 아시아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며 의료스포츠가 막 발달하기 시작할 무렵 이 길에 들어섰다.

"처음 들어왔을 때 제 선배님들이 네 분 계셨어요. 그러다 모두 6명이 3년 사이에 치러진 그 큰 경기들을 치러냈죠. 제가 신입인데다 인력도 얼마 없던 때여서 정말 정신없었죠. 그래도 힘들었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스포츠를 좋아해서 보는 것도 좋았고, 일단 재밌었거든요."

올림픽엔 400여명, 아시안게임엔 600~800명가량의 선수들이 출전한다. 큰 부상 이후의 물리치료부터 자잘한 허리통증까지 모두 김씨를 비롯한 물리치료사의 몫이다. 이 모든 치료를 맡기엔, 10명의 물리치료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이 스포츠로는 강대국이거든요. 의료 부분도, 아직 그만큼은 아니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는 상태예요. 선수촌장님도 선수 출신이라 옛 경험을 살려 의료팀을 지원해주시기도 하고요."

   오늘의 브리핑
집 나간 '시대정신'
김영환, 돌아오라
[보수 대해부]
"임대주택으로 2마리 토끼 못 잡는다"
'판사 명단 공개' 논쟁은 무지의 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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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기자간담회서 탈당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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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모든 길은 올림픽으로 통한다
"핀란드 들어오려면 한국어시험 봐라"
"한국 드라마 모르면 북서 '왕따'"
박태환 선수 훈련파트너 소개합니다
김씨는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매일 12시간 근무한다. 토요일에도 선수들이 나와 운동하기 때문에 오후 1시까지 이들과 함께한다. 일요일을 제외한 공휴일에도 선수들을 혼자 나둘 수는 없다.

"선수들이 몇 년 동안 열심히 훈련하는데 저도 당연히 나와야죠. 물론 힘들고 쉬고 싶을 때가 왜 없겠어요. 이제 중학교 올라가는 딸아이에게도 항상 미안하고요. 하지만 물리치료에선 무엇보다 빨리 대처하는 게 중요하고 절 찾는 선수들도 있으니, 저만 쉴 수는 없죠. 이해해주는 남편과 어른스러운 딸이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김씨의 초봉은 24만원이었다. 21년이 지난 지금도,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대학동기들의 연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고 한다.

"솔직히 스카우트 제의가 안 들어오는 건 아니에요. 여러 군데에서 제의해왔지만, 자존심 때문에 옮기지는 않았어요. 최고의 선수들을 치료한다는 자존심을 단지 돈 때문에 버리고 떠날 수는 없잖아요."

마음으로 함께 아파해야 부상도 낫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씨를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은 여러 선수들과 부대끼며 맺은 인연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끝난 후 메달을 딴 선수들이 찾아왔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같이 고생했던 이야기도 하면서 저도 축하해줬어요. 선수들이 제게 꽃과 메달을 걸어주며 감사하다고 안아줄 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군요. 돈보다 훨씬 소중하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을 얻는 것이 바로 이런 행복 아닐까요?"

▲ 양궁의 윤미진(왼쪽)·박성현 선수와 함께.
ⓒ 김미현씨 제공
하나의 치료법이 정답이라고 알고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치료법에 대한 부작용을 알게 되고 또 다른 치료법을 발견하게 되는 게 물리치료의 세계라고 김씨는 전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책을 보고 새로운 정보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치료사는 안주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고 한다. 힘들수록 더 뛰면서 땀 흘리는 선수처럼, 일심동체로 그 선수의 건강과 응급치료법을 찾기 위해 책 한 장 더 읽고 더 선진적인 치료 사례를 발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잖아요? 흐르는 물 같은 치료사가 되고 싶어요."

김씨는 최고의 선수를 지원해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기술적인 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선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관심과 애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물리치료실에 찾아오는 선수들을 보면, 겉으로는 몸을 다쳤지만 그보다는 마음을 더 많이 다친 선수들이에요. 경기를 몇 달 앞두고 다치는 선수들도 종종 있어요. 몇 년 동안 준비한 대회인데 부상으로 뛸 수 없거나 본래 컨디션을 찾을 수 없다면, 그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어요? 제 몸이 아니니 100%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같이 아파해주고 부상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내 몸처럼 함께 움직이는 정성이 매우 중요해요."

물리치료실에서 속을 터놓고 나누는 이야기는 항상 일방적으로 지시받는 선수들에게 아주 중요한 '마음의 휴식처' 기능을 한다고 한다. 김씨는 이러한 휴식을 통해 선수들이 다시 일어나 뛸 때, 자신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행복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김씨에게 항상 행복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제가 만든 프로그램대로 선수가 맞춰 재활운동을 하는데 잘 회복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마음이 급한 선수도 힘들고, 저는 그 선수의 불안감과 부담감까지 지고 더 무겁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해요. 제가 미안하고 더 절망하는 순간을 맞는 셈이죠. 그런데 선수가 저를 신뢰하고 서로 하나가 돼 노력하는 순간에 이게 극복되더군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줄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더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삶의 지혜 같아요."

▲ 역도의 장미란(오른쪽) 선수와 함께.
ⓒ 김미현씨 제공
'프로그램 그리는' 선수들의 동반자

그런 의미에서 선수와 물리치료사는 아름다운 동반자다. 상대방에게 전해준 말 한마디가 각자에게 큰 힘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그 과정에서 선수가 용기를 얻고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가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고 이를 실현할 때가 김씨에겐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과 행복을 맞는 순간이다.

"몇 년 전 스페인에서 열린 대회에 나가는 대학생선수가 첫 출전이어서인지 지나치게 긴장하는 거예요. 옆에 있던 그림 속의 강아지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았죠. 그래서 '몇 년 동안 마치 저 강아지처럼 눈 부릅뜨고 훈련하지 않았느냐, 이 악물고 해보자'고 했어요. 그저 기운을 북돋워준 건데 그 선수가 제 손을 굳게 잡으면서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금메달을 따왔어요.

그 메달을 제 목에 걸어주는 순간 '우리는 하나'란 사실을 실감했죠. 그 선수는 제 말을 새기면서 경기에 임했다더군요. 감동의 순간이었죠. 물론 선수 자신들의 고된 훈련이 좋은 성과를 이룬 것이지만, 서로 믿고 의지하는 정신력에서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역사가로 살고 싶었다는 김씨. 지금은 화가도, 역사가도 아닌 물리치료사의 길을 걷고 있지만 물리치료사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의무실에서.
ⓒ 김미현씨 제공
그렇지만 선수들의 종목과 경기 상황에 맞게 프로그램을 '그려내고' 경기 때마다 세계를 돌며 물리치료를 연구하는 김씨는, 어쩌면 어릴 때 꿈꾸던 길을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1년 전 전문대를 졸업한 후,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미래에 친구들에 비해 풍요롭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는 김씨. 그렇지만 이젠 그런 과거를 꾸짖고 180도 변한 인생에 스스로 박수를 보내며 웃는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선 4년제 나온 동창생들과 격차가 크겠지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저처럼 풍요로운 삶이 있을까 싶어요. 그리고 최고의 선수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을까 싶어요. 일하는 행복, 해외에서 경쟁하는 선수를 통해 애국하는 삶. 제 인생이야말로 태릉선수촌의 주연은 아니지만 영원히 빛날 아름다운 조연 아닐까요?"

김씨의 아름다운 미소가 유난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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