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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추가 지난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어머니방의 열린 문틈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 뭐 하세요?" "그려. 아무것도 아이다." "공부하세요?" "아이다 그냥 뭐 좀 끄쩍거려 안 봤드나." "뭔데요? 눈도 안보이시는데 제가 적어 드려요?" "넵두그라. 그나마도 안카믄 이자뿔까 싶어서 안 카나." 어머니는 뭔가 적으시던 수첩을 슬그머니 서랍 속에 집어넣고는 그게 뭔지 영 말씀을 안 해 주십니다. 하긴 어머니라고 적어 놓을 일 이 없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주 어머니는 빳빳하게 풀을 먹여 곱게 다린 흰모시치마저고리를 입으시고 음력 7월 보름 백중맞이를 하시러 절에 가셨습니다. "내가 이자 몇 번이나 백중맞이를 해보겠드나. 스님은 '노(老)보살님 먼 길 오시지 마라'카지만 내는 그기 아닌기라. 일 년에 한 번 하늘 문이 열리는 날이니 이승에 떠도는 원많고 한많은 영들, 불쌍한 영혼들, 좋은 곳으로 가시도록 빌어드려야제." 서울로 출근하는 아들을 따라 나서시는 어머니는 소풍가는 어린애마냥 들떠 보였습니다. 핑계 김에 아들과 단둘이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어머니가 나가신 후 청소를 하려고 어머니 방을 열어보니 서랍장 위에 낡은 공책 하나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호기심에 뭘까 하고 열어보니 그건 바로 어머니의 가계부였습니다. 지난번 뭔가를 적고 계셨던 것도 바로 이 가계부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가계부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아들 이름뿐입니다. 며느리이름을 모르시지야 않겠지만 며느리 손에 전해지긴 했어도 아들이 벌어온 돈이니 아들 이름으로 받아두신 것으로 여기시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가계부에 속에 눈에 띄는 글자가 있습니다. "모시옷 한 벌. 고맙다." 무슨 모시옷? 누가 어머니께 모시옷을 해드렸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어버이날 아들 녀석이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할머니에게 선물한 모시 실내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손자가 사다준 모시옷을 입고 다니시며 여기저기 자랑하시더니 가계부에까지 '고맙다'고 써놓으신 것입니다. '고맙다' 한마디에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느껴져 가슴이 찡합니다. 살그머니 노트를 덮고 제자리에 두기 위해 늘 여닫으시는 서랍장을 열어보니 빨간줄이 쳐진 오래 된 금전출납부에서 아이들이 쓰다버린 노트를 묶어서 만든 것까지 대여섯 권의 낡은 노트들이 용돈을 담아드렸던 봉투들과 함께 정리가 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가계부를 써오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학교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으시다는 여든다섯 어머니는 어쩌면 자식들의 사랑을 오래오래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 남몰래 한글을 배우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얼마나 힘들게 적으셨을까 생각하니 초등학교 때처럼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 다섯 개와 별 다섯 개 '참, 잘했습니다'라는 칭찬도장이라도 찍어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컴퓨터 속에 보기 좋게 정리되어 계산 하나 틀린 것 없는 나의 가계부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의 가계부는 얼마나 푸근한 것인지요. 청소도 잊은 채, 한참동안 어머니 방에 앉아 오래 전 기록들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노트 몇 권에 가득 찰 만한 사랑을 기록해 놓으신 어머니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신 분이고, 그 누구보다도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적자와 한숨, 눈물로 가득한 나의 가계부엔 정말 감사해야 할 그 무엇도 없었던 것이었을까 반성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턴 저도 가계부 한구석에 감사의 메모를 하기로 했습니다. 2004년 9월 생활비, 남편. '감사합니다.' | ||||||||||||
2004/09/06 오후 1:44 ⓒ 2004 Ohmynew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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