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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서도 지났고, 이제 9월이다. 여름이 물러나고, 가을이 문을 열었다.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을 하면 왠지 '낭만'과 연결짓는 분위기다. 오버코트에 얼굴을 파묻은 신사가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풍경이나, 가을비를 맞으며 헤어지는 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막상 경험을 떠올려 보려니 가을과 연관된 낭만이 떠오르지 않는다. 며칠을 두고 생각해도 없다. 원래 가을과 낭만은 TV와 영화에서만 조작된 허구인지, 내가 정말 덧없이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 잊고 있었던 가을에 대한 '추억'이 생각났다. 가을은 바로 '운동회'가 펼쳐지던 계절이 아닌가. 봄 소풍, 가을 운동회가 초등학교 시절 가장 큰 이벤트가 아니던가.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맥이 빠진다. 애석하게도 운동회에 얽힌 추억은 그다지 영광스러운 기억은 아니었던 것이다. 1학년 때는 남녀 공통으로 다람쥐 옷을 입고 춤을 추었는데,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아래위가 하나로 된 쫙 달라붙는 통옷에다가 머리에는 커다란 헝겊구슬까지 달려 있었는데, 남녀구분이 없던 나이니 남자라고 복장에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철이 없던 그 시절에 '복장'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보다는, 남들 앞에서 춤을 춘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3학년이 돼서 특활시간에 현대무용부 부원을 뽑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어서 동급생들의 웃음을 자아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왜 남학생이 현대무용부에 가입하면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선생님도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운동회의 꽃인 달리기에서는 항상 뒷자리가 내 차지였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리는 달팽이와 경주를 하고 있었다. 대표선수로 발탁되는 친구들을 보면 어찌나 부럽던지. 그래서인지, 집안의 부모님들도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달리기를 하려고 나가는 나를 붙잡고, '그냥 김밥이나 먹지'라고 놀리신 적도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6년을 통틀어 딱 한 번의 영광스런 기억이 있었으니 100m 달리기에서 3등을 한 것이다. 입상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었던 부모님께서는 그날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셨는지, 학교를 돌아다니던 사진사에게 돈을 주고 슬라이드 사진까지 찍으셨다. 그 사진은 우리 집에 남아 있는 유일한 운동회 사진이다.
그날 따라 몸 상태가 좋았던 나는 50m 지점까지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달렸던 것 같다. 오늘 뭔가 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운명의 쪽지를 든 순간, 쪽지에 적힌 내용은 '아저씨 손을 잡고 달리시오'였다. 고개를 들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죄다 아주머니들뿐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아저씨가 눈에 안 띄었다. 평일 실업자가 아니면 어느 아버지가 운동회에 오실 수 있겠는가. 쪽지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까마득한 기분으로 관중석을 누비고 다니는데, 한 아저씨가 눈에 띄는 것이었다. 천군만마.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성질 급한 아저씨는 '뭐야 뭐야, 쪽지에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라고 나오시더니, '뭐야 나하고 뛰면 되는 거네'라고 하시더니, 내 손을 잡고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달랑달랑 매달린 채로 달리고 있었다. 결과는 3등. 정신없이 달렸던 나는 골인지점에 앉으라는 말에 그냥 앉았다. 그런데, 참 부끄럽게도 아저씨와 내가 앉은 줄은 다음 주자들을 앉힌 곳이었다. 내가 속했던 줄의 사람들은 이미 도착했는데, 이미 심하게 늦어버린 나는 다음 줄에 섞여 엉겁결에 3등이 돼버린 것이었다. 입상 외였지만, 지나치게 늦었기 때문에 오히려 입상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됐지만, 차마 나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개라는 상품도 좋았지만, 최초로 입상했다는 기쁨을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마 어쩌면 경황없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위로해 본다. | ||||||||||||
2004/09/10 오후 4:07 ⓒ 2004 Ohmynew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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