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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의 밥은 학생에게서 나온다

박종국교육이야기/함께하는교육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8. 3. 14.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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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데일리안'에서 퍼왔습니다.>

교수의 밥은 학생에게서 나온다
양적 연구, 교수 평가를 우려하며
2008-03-13 09:11:47 휴대폰전송기사돌려보기인쇄하기

석가모니는 하루를 제자들과 함께 먼 길을 걸어 마을에서 밥을 구걸하는 것에서 기원정사의 일과를 시작했다. 왜 석가모니는 하루의 시작을 밥 구걸로 시작했을까?

깨달은 자 혹은 지식을 많이 아는 자들은 오만해지고 쉽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 많고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할수록 보통 사람들, 생산을 하는 사람을 천대하고, 무시하게 된다. 그들은 지식과 깨달음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을 가진 자들은 밥을 생산하지 않는다. 밥 앞에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 구걸을 통해 인간의 현존재적 상황, 노동하지 않는 자의 겸손함을 우선 강조하는 것이 밥 구걸이다.

밥 구걸을 통해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을 생산하는 이들이 존귀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깨달음을 얻는 이유는 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칫 오만해지고 군림하는 태도로는 진정한 깨달음에 오를 수도 없다.

도올 김용옥은 평소 학생과 토의식 수업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학생이 교수를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교수의 학식을 학생이 따라 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려면 교수가 학식이 매우 높아야 할 것이다.

도올 정도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현실이 그러한 지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학식 유무나 평가 여부를 떠나서 학생과 교수의 기본적인 관계에 권위적 수직적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학기 초 강의와 교수평가를 두고 논란이 많은데 이러한 점이 도외시 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석사모니의 밥 구걸을 예로 든 것도 이 때문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교수의 존재는 학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데 스승이 있을 수 없다.

교수는 학생의 존재를 고마워해야 하고, 학생은 교수의 존재를 고마워해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론은 사실 인문학관련 교수 자리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학생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이 없기 때문에 교수자리가 위험해지고, 심지어 교수가 학생들을 모집하러 다닐 때 더 이상 그는 교수가 아니라 영업사원에 불과하다. 학생이 없으면 대학은 연구원과 다를바 없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학생은 선생에게 고마워하라고 강요당할 뿐, 교수는 학생에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 오히려 학생들을 부려먹고, 심지어 착취까지 한다. 학생을 단지 지식과 정보가 자신보다 없는 미숙한 존재로 폄하하는 교수들도 여전하다.

아이는 그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요체다. 씨앗과 같다. 앞으로 어떠한 존재가 될지 알 수 없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교수가 처음부터 교수가 아니었듯 학생은 영원히 학생으로 남지 않는다.

이러한 가운데 학생들의 교수에 대한 평가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정말 학식이 높은 학자를 평가할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학생이 평가하고 그 내용을 공개해서 일정한 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한다.

예컨대, 대중추수적인 강의가 될 수도 있다. 김용옥의 말대로 높은 학문의 경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풍부한 내용을 덧붙일 수 없으니 주입, 암기식 교육이 일차적으로 우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학생들에게 겸손해야 한다. 또한 암기의 교육 단계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창발적 교육의 단계가 분명 존재한다.

아직도 한국의 교수들은 채 준비되지 않는 커리큘럼을 통해 강의를 준비한다. 배우고 나면 무엇을 배웠는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을 가르친다. 또한 외국에서 설익게 들여온 이론을 주입한다. 젊은 교수들일수록 외국의 최신 이론을 가지고 펼쳐놓는다. 물 건너가 익혀 온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다시 유행이 지나면, 다시 젊은 교수가 충원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한국에서는 젊은 교수가 가장 학자로 대접을 받는다. 또한 자신도 모르는 내용을 가르치고,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도외시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언어와 담론이 아닌 타자화 된 담론을 통해 본질을 전달하지 못하는 수업은 여전하다. 수많은 학문의 나열은 있는데 정작 자신의 통찰력은 없다.

아니 이러한 경지가 쉽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함부로 비판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학생도 그렇거니와 교수도 학생에게 겸허한 태도가 필요하다. 더구나 학생 때문에 존재기반을 갖는 교수직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는 교수는 너무나 많다. 이는 평가제도 이전에 교수사회가 일신해야 할 점이다.

현재의 업적 평가에 따른 교수평가나 재임용 제도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최근에 교수업적 평가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빈번하고 있다. 실제로 몇몇 대학이 업적 부진을 이유로 재임용에서 교수들을 탈락시켰다. 표적 탈락이라는 위험성도 있지만, 철밥통이 깨지는 긍정적인 신호탄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앞으로 오만한 교수가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 교수의 품성과는 관계없이 실적만 잘 채우는 이가 우대받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들 위에 연구 업적으로만 그의 사고와 행동이 합리화 될 것이다.

더구나 양적인 연구결과만을 우선하는 풍토에서 정말 학식 있는 스승을 만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우려된다. 왜냐하면 평생에 한권 나올까 말까한 자신의 이론보다는 당장에 산출 가능한 결과물만 잘 만들어낸 교수들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학식의 기준은 주객이 전도되고 오만한 악화만 남을 가능성도 커 보인다. 과연 실적만 좋은 이가 스승일까. 정말 깊은 학문과 의미 있는 결과는 인간적인 신뢰 속에서 싹트고 그 기반은 겸허한 스승과 제자관계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잘나서만 교수가 된 것이 아니다.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적 기반이 있으니, 교수의 밥은 학생에게서 나온다. 중이 중 같을 때 사람들은 밥을 시주한다. 교수다울 때 밥이 나온다. 교수 자리 구걸을 몇 십 년 한 교수일수록 그렇게 오만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밥 구걸이 자신의 실존적 위치를 가늠하는 것과 같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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