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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강기갑: 광화문 촛불 환하게 밝힌 전사

세상사는얘기/삶부추기는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8. 7. 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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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갑: 광화문 촛불 환하게 밝힌 전사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험난한 길, 그러나 국민과 함께 가는 농민
 
최을영
 
강달프, 신뢰의 상징
 
영화 <반지의 제왕>의 마법사 간달프는 신뢰의 상징이다. 백발에 흰 수염, 처음에는 회색, 그리고 나중에는 흰색 외투를 입고 다니던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관객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보다 지혜로운 그는 반지원정대를 이끄는 든든한 지도자였고, 위기의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믿음직스러운 인물이었다.
 
선하고 지혜로우며 믿음직스러운 마법사인 간달프는 물론 허구의 인물이다. 그리고 허구에서나 있을 법한 참으로 인간적이고 이상적인 인물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간달프. 그래서 누군가에게 간달프란 별칭을 붙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강기갑. 연일 계속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나서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강달프라는 꽤 근사한 별명을 선사했다. 강달프란 별명은 현직 국회의원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촛불집회 자리에서 환영받은 그에 대한 신뢰를 상징한다. 미국산 쇠고기협상에 누구보다 먼저 발끈했고, 협상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연일 짚어내던 그를 사람들은 강달프라고 불렀다. 외모가 닮아서이기도 했겠으나, 앞서 열거한 간달프의 이미지가 강기갑과 많이 닮은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다른 정치인들이 쇠고기협상이 타결된 이후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때 그는 단식으로 쇠고기협상의 부당함을 알려 나갔고, 농림부의 내부 문건을 공개해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달라진 협상 기준을 물고 늘어졌으며, 청문회에서는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비롯해 이명박 정부의 비상식을 질타했다. 그리고는 거리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럼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촛불시위로 스타가 된 강기갑 의원 아닐까. 그를 농식품부 장관으로 앉히고 이 문제를 풀도록 하면 어떨까. 국민들이 그는 믿을 것 같다. 소 키우던 강기갑이 오죽 잘 알아서 하겠는가. 촛불이 횃불이 되기 전에 상식선에서 쇠고기 문제를 풀어보자."1)  
   
밝혀지는 사실, 사실들
 
우석훈의 제안은 비록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국민의 안전한 식탁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국민들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고, 강기갑의 평소 소신이 국민의 안전한 식탁을 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기갑이 이번 쇠고기협상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이런 소신 때문이다.
 
강기갑은 정부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통해 이번 쇠고기협상 과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며 협상 타결 이후 정부에서 내놓은 여러 답변을 무색하게 했다. 2008년 5월 5일 강기갑은 2007년 한·미 쇠고기협상을 앞두고 전문가와 검역 당국자들이 검토한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 의하면 2007년과 2008년의 협상 방침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정부는 2007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협의를 위해 2, 3차 전문가 회의와 가축방역협회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는 국제수역사무국(OIE)도 30개월 이상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에 대해서는 안전성을 완전히 보장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30개월 미만'의 연령 제한을 고수했다. 또 광우병에 걸리기 쉬운 한국인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해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수입하는 데 있어서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 7가지는 모두 수입을 금지한다는 원칙을 정했다.2) 이는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고, 광우병 우려도 없으며, 한국인이 광우병에 취약한 유전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과장이라는 정부 측 발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강기갑은 "이번 쇠고기협상은 지난해(2007년) 10월 11일 미국과의 마지막 공식 협상을 하기 전에 우리 정부가 전문가들과 마련한 협상 방침에 비해 대폭 후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
 
강기갑의 문제제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강기갑은 2008년 5월 7일 새로운 자료를 내놓았다. 쇠고기협상 시작 직전인 2008년 4월 10일 농림수산식품부가 작성한 대외비문서(관리번호 38호) '미국산 쇠고기 관련 협상 추진계획(안)'이라는 자료를 내놓으며 강기갑은 "이번 협상에서 정부는 지난해(2007년) 9월 우리 측 전문가들과 검역 당국이 30개월 미만 고수, 7개의 광우병특정위험물질 모두 제거, 내장 전체 수입금지, 사골·골반뼈 제거 등 국민건강과 안전을 고려해 마련한 협상지침에서 모두 후퇴한 채 협상에 임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4)

▲강기갑, 홍희덕 의원     ©김철관

강기갑이 내놓은 자료는 정부가 왜 기존 입장에서 180도 달라진 쇠고기협상을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명박 정부가 주장해온 '노무현 정부 설거지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쇠고기협상이 정부 발표와는 달리 정치적 목적, 즉 한·미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강기갑은 "정부는 월령 제한 문제와 SRM 제거범위가 가장 중요하다면서도 협상 전에 무장해제했다"며 "이토록 중대한 문제를 장관이나 협상대표가 단독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청와대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5)
 
2008년 5월 29일 정부가 쇠고기 고시를 강행한 뒤 내놓은 쇠고기 검역 대책에 대해서도 강기갑은 날선 비판을 했다. 강기갑은 "농림부는 지난 2006년 9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면서, 통상 1% 실시해오던 현물검사를 5%로 확대하겠다고 했다"면서 "정부가 어제(29일) 미국산 쇠고기 현물검사 비율을 3%로 '확대'하겠다고 한 것은 대국민 기만 대책"이라고 일갈했다.6) 30개월 미만의 살코기를 수입하면서 5% 현물검사를 했는데, 30개월 이상의 쇠고기, 더구나 뼈까지 포함된 고기를 수입하면서 3%로 현물검사 비율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국민 기만책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강기갑은 쇠고기협상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과 정부의 최근 발표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며 정부의 발표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기갑의 '사실에 근거한 비판'은 쇠고기협상의 이면을 밝혀내는 한편 정부의 쇠고기협상 근거가 취약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강기갑은 정부의 거짓말과 말 뒤집기를 여실히 보여줬던 것이다.
 
아울러 강기갑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이런 예를 들어가며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부가 수술하면서 거즈와 가위를 집어넣고 봉합했다. 국민들이 '나 죽는다'고 난리가 났는데, 옥도정기 발라주면서 걱정 말라고 한다. 수술을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재수술을 해야지, 무조건 가리고 덮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나?"7)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옥도정기론 어림없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지금 상태는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을 쓰는 격이라고나 할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도 문제겠으나,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을 쓰는 것은 더 큰 문제일 것이다. 
  
강달프의 '내공'
 
2008년 4월 18일 미국과의 쇠고기협상이 타결된 이후에 불거진 국민들의 반발과 촛불집회 등으로 강기갑이 주목을 받았지만 그는 이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끊임없이 정부를 견제해왔다. 그가 가진 '내공'은 며칠 사이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2006년 2월 강기갑은 3월로 예정된 미 쇠고기 수입 재개와 관련해 농림부로부터 제출받은 '미 농무부 감사관실 2월 1일자 보고서'를 근거로 미국의 쇠고기 검역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2004년 6월부터 2005년 4월까지 감사 대상 식육처리시설 12곳 중 2곳에서 29마리의 '주저앉은 소(다우너)'를 식육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농무부 검사관이 단지 육안으로만 검사를 했다. 또한 미국의 각종 검사기관이 검역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며 1년간 4차례나 보고서를 낸 것도 밝혀졌다. 이때 강기갑은 "이미 광우병 전력이 있는 미국 스스로 검역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으므로 우리 정부는 미국이 보완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일본처럼 수입중단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8) 참고로 당시는 30개월 미만 살코기만 수입 대상이었다.
 
강기갑이 미국 검역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밝힌 다음달(2006년 3월) 미국에서 광우병 감염소가 발견됐다. 3월은 원래 한국 정부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려고 했던 시기였다. 당시 한·미 간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 따르면 미국에서 광우병 감염소가 발생하면 그 나이의 입증 책임을 미국이 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만약 광우병 감염소가 미국이 동물성사료금지 정책을 실시하기 이전인 1998년 3월 이후에 태어났다면 금수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광우병 감염소의 두개골을 매장하고 치아 사진만 한국에 보내 광우병 감염소의 나이가 8살 이상, 즉 1998년 3월 이전에 태어난 소라고 결론 내렸고, 한국 정부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그해 6월 잠정적으로 수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강기갑은 "이번 감염 소는 출생기록이 없어 농림부의 나이 추정은 불확실하다"며 "치열조사 방법은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간접적인 참고자료가 될 뿐이라는 것이 대다수 수의학자들의 견해"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은 소의 출생기록조차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관리가 부실한 상태"라며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했다.9)
 
이후 강기갑은 여야 국회의원 35명과 함께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2006년 9월에는 광우병 전문가그룹이 가축방역협의회에 제출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검토 보고서'(2005년 11월 제출)에서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지적했음에도 정부가 수입재개를 결정했다고 비판하며 수입 재개 방침 철회를 요구했다.10)
 
같은 달 강기갑은 30개월령 미만 소의 광우병 발생률이 0.05%라고 명시된 농림부 보고서를 근거로 30개월 미만의 살코기를 수입 재개하기로 한 것은 안전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당시 정부의 발표를 뒤집었다. 강기갑은 "지난해(2005년) 정부 스스로 작성한 문서에서 '30개월 미만 소에서 광우병 발생률이 0.05%'라고 적시해놓고도, 그동안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해온 것은 국민을 기만한 것"이라며 "일본 정부처럼 20개월 이하 소로 제한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협상 실패이며, 한미FTA 개시선언을 위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외면한 결과"라고 비판했다.11) 또한 강기갑은 2006년 11월 척 램버트 미 농무부 차관보가 서한을 통해 주미 한국 대사관에 수입조건을 완화해달라는 압력을 가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강기갑의 비판은 2007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히 2007년에는 '30개월 미만 뼈 있는 쇠고기' 수입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한국과의 FTA 협상기간 내내 갈비 등도 수출할 수 있도록 문서로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합리적 수준 개방'을 약속했다. 한미FTA 협상과 별개인 쇠고기 위생검역 협상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미국은 이에 뒤로 물러섰다. 이 때문에 쇠고기협상과 관련한 이면합의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농림부는 이면합의는 없었으며 쇠고기 위생검역 협상에서 중요한 문제는 미국의 위생상황이라고 밝혔다.
 
'뼈 있는 쇠고기' 수입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2007년 4월에 30개월 미만 살코기 수입은 재개됐다. 이때 강기갑은 2007년 4월 23일 농림부·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국제수역사무국(OIE) 총회 참석결과 보고' 자료를 통해 정부의 이중성을 또 다시 질타했다. 정부는 2005년 5월 열린 OIE 73차 총회에 대표단을 보내 "소의 살코기와 혈액 제품에 광우병 원인체가 오염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안전제품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2005년 12월 정부는 '30개월 미만 살코기'의 수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OIE 총회에서 내놓은 한국 대표단의 주장은 살코기에도 광우병 위험이 있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을 '괴담'이라며 부인해왔던 것과 배치되는 입장이었다.12) 
 
이후 강기갑은 2007년 5월 20일 열린 OIE 총회에서 한국이 미국을 광우병위험통제국으로 지정하는 데 반대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한국 대표단이 미국의 광우병 검역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의견서를 국제수역사무국에 제출하고 일본 등 대표단과 공조 의견까지 나눠 반대 토론을 벌일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회의에서는 원안에 동의해버렸다. 이곳에 온 농민단체들은 '배신을 당했다'며 격분하고 있다"고 말했다.13)
 
그러나 2007년까지만 해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위한 재협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에서 뼛조각, 더 나아가서 SRM까지 발견되면서 검역 중단, 수입 재개, 검역 중단 등이 연이어 벌어졌을 뿐이다. 이런 기류가 바뀐 것은 모두 알다시피 2008년 4월 11일 한·미 쇠고기협상 때부터다. 그리고 4월 18일 협상이 타결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협상 타결 직후 강기갑은 "이명박 대통령의 첫 방미 외교는 국민 건강권과 검역 주권을 갖다 바친 조공 외교, 맹종 외교"라며 "국회에서 협상 철회 촉구 결의안을 제출하고 범국민 운동을 벌여 철회를 꼭 이끌어내겠다"고 밝혔다.14) 이후 강기갑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회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농민운동가에서 국회의원으로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한 강기갑의 '내공'은 오랜 시일에 걸쳐, 수많은 상황을 겪으며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내공'이 생겨날 수 있었던 바탕은 그가 농민이었다는 데 있다.
 
강기갑은 1953년 경남 사천시 사천읍 장전2리에서 태어났다. 농부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난 강기갑은 아버지를 보면서 '진짜 농군'이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운 살림에도 아버지가 열심히 일한 덕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71년 사천농고를 졸업한 그는 농과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농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인근의 야산을 구입해 밭을 일구면서 시작한 농사는 그가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계속됐다. 그 사이 축산업에 뛰어들어 17대 국회의원이 당선될 당시에는 100여 두의 젖소를 키우기도 했다.
 
그는 19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면서 농민운동에 투신했고, 박정희 독재정권에 환멸을 느끼던 때인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됐다는 뉴스를 듣고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던지며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독재정권이 계속되자 1982년 인천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 5년 동안 신학공부에 몰두했다. 1987년 신학공부를 그만두고 다시 농부가 된 그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장을 맡아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15) 

같은 시기인 1989년 6월 24일에는 서울 종로에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를 만들어 농촌 총각과 도시 여성 노동자들을 맺어주는 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이 땅에서 더 이상 장가를 못가 자살하는 농촌총각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16) 첫 쌍이 태어날 때까지 수염을 자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그는 농촌총각과 도시처녀 간 결혼을 위해 발로 뛰어다녔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회 등 단체들을 돌며 가입신청서를 내밀고, 회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1990년 6월 첫 쌍이 탄생했다. 그러나 강기갑은 수염을 자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수염에 농촌총각 결혼추진과 농민운동을 대변하는 '공공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17) 농촌총각결혼대책위는 강기갑의 결혼도 성사시켰다. 강기갑은 결혼대책위 간사로 일하던 지금의 부인과 1991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대책위 활동을 할 수 없다는 내부 규칙에 따라 다시 사천으로 내려온 강기갑은 농사일을 계속하며 1996년 사천농민회 회장, 1998년 전농 경남도연맹 부의장, 1999년 전농 부의장,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전농 경남도연맹 의장을 맡았고, 2004년 전농 부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이 사이 그는 2003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에 나섰고, 멕시코 칸쿤에서 벌어졌던 세계무역기구(WTO) 반대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6번으로 제17대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17대 국회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은 개혁을 바라는 국민 염원의 결과였다. 그러나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한 민주노동당의 국회에서의 활동은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로 인해 강기갑은 제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단식을 거듭해야 했다.
 
2004년 7월 이라크 파병 반대를 외치며 처음 단식을 했고, 같은 해 말에는 쌀 개방협상의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며 10일간 단식을 했다. 그리고 2005년 쌀 관세화 유예협상 비준 동의안 처리 반대를 위해 강기갑은 29일에 걸쳐 단식을 했다. 정치인으로서는 최장기 단식이었지만 비준안은 끝내 통과되었고, 이를 막던 강기갑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는 2005년 11월 24일 단식농성을 풀며, "농민 여러분, 살아서 농업을 지켜 나갑시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18)
 
그는 농업이 생명산업, 환경산업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경제논리로 농업을 풀어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농업은 경제적 이익 이전에 생명산업, 환경산업이다. 중국산 김치 파문처럼 외국 농산물로 국민 건강이 위협에 빠질 때 비용까지 생각해야 한다."19)
 
17대 의정활동 기간 동안 그는 이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앞서 언급한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그의 활동내역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외에도 강기갑은 조제분유의 중금속 검사 기준이 없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해양수산부 국정감사 자리에서는 각종 유해물질이 함유된 수입 수산물이 시판되고 있는 문제를 꼬집기도 했다. 
  
사천의 기적
 
17대 국회에서 강기갑의 의정활동은 여러모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008년 4월의 18대 총선에서 과연 당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과 경남 사천에서 맞붙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18대 총선에서 강기갑은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을 178표 차이로 물리치고 당선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강기갑이 당선 확정 직후에 "나도 놀라고, 사천 시민도 놀라고, 국민들도 놀랐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20) 3선을 노리던 실력자이자, 한나라당의 핵심 인사인 이방호 사무총장은 강기갑이 넘볼 대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사천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쟁취한 승리는 18대 총선의 최대 이변으로 평가받았다.
 
강기갑은 당선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앞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농업, 어업 관련된 일과 국민 식탁을 보살피는 쪽 일을 하고 싶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한반도 대운하 추진을 시급하게 저지해야 한다. 한미FTA는 미국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비정규직 양산하고 공공요금 인상에 서민 부담만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소수 재벌의 성장과 돈벌이가 중소기업이나 서민에게 도움이 되겠나."21)  또 이런 말도 했다. "18대 국회에서도 혼신을 다해 험난한 길을 가겠습니다"라고.22)
 
강기갑의 당선 소감은 4월 18일 쇠고기협상이 타결되면서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국민 식탁을 보살피는 일을 위해 험난한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험난한 길에는 동행자가 꽤 많다. 
   
강달프의 마법은?
 
쇠고기협상을 둘러싼 국민들의 저항은 현재 진행형이다. 촛불은 밤마다 켜지고 있고, 사람들은 줄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는 촛불집회 현장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사람들은 그 동영상을 보며 현장의 분위기를 읽는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 교복을 입고 피켓을 들고 나온 10대들, 넥타이를 매고 나온 직장인들,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역들, 20대 대학생들. 그들은 쇠고기 재협상을 외치며, 고시철회를 외치며 오늘도 거리로 나오고 있다. 마법 같은 일이다.
 
<반지의 제왕 2- 두개의 탑>에서 간달프는, 악의 마법사 사루만의 마법에 걸려 있던 로한의 왕 세오덴을 각성시켜 사우론과의 싸움에 나서게 한다. 마법에 걸려 충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오직 간신의 목소리만 듣던 세오덴은 간달프에 의해 이전의 현명하고 용맹스런 왕으로 돌아온다.
 
물론 간달프와 달리 강달프는 '마법사'가 아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강달프도 거기에 합류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그 마법에 의해 이명박이 변할 수 있을 것인가?
 
아쉽게도 간달프의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찾은 세오덴은 한때나마 현명했지만, 이명박이 원래 현명했던 사람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강달프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함성은 쇠귀에 경 읽기로 그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미국산 쇠귀에 경을 읽는 격이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비유일까. 그러나 2008년 6월 10일 세종로에 등장했던 저 낯 뜨거운 '명박산성'이 이를 증명하는 건 아닐까.
 
공은 여전히 이명박 정부에 있다. 강달프와 시민들의 마법은 통할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7월호에 실렸습니다.)
 
[각주]
1) 우석훈, 「흐름 잘못 짚은 이명박 정부」, 『경향신문』, 2008년 5월 24일, 5면.
2) 김수헌, 「'광우병' 말 뒤집은 정부」, 『한겨레』, 2008년 5월 6일, 3면.
3) 구혜영·이두걸, 「강기갑 의원 "前 정부 협상방침서 대폭 후퇴"」, 『서울신문』, 2008년 5월 6일, 3면.
4) 정연근·윤여운, 「'30개월 미만' 협상 전 포기」, 『내일신문』, 2008년 5월 7일, 1면.
5) 양정대, 「"협상 전부터 SRM 제거 등 지침 포기"」, 『한국일보』, 2008년 5월 8일, 1면.
6) 이지은, 「2006년 30개월 미만 살코기 수입 재개 때 5% 현물검사 전면 개방하면서 3%로 축소」, 『한겨레』, 2008년 5월 31일, 5면.
7) 이지은, 「미국산 쇠고기 '성난 민심'/ ''축산농' 강기갑 '쇠고기 투쟁' 중심에」, 『한겨레』, 2008년 5월 6일, 4면.
8) 성홍식, 「미국 광우병 검역시스템 허술」, 『내일신문』, 2006년 2월 16일, 1면.
9) 성홍식, 「미 쇠고기 수입재개 확정… 농민 반발」, 『내일신문』, 2006년 4월 27일, 15면.
10) 성홍식, 「"미 쇠고기 광우병 안전지대 아니다"」, 『내일신문』, 2006년 9월 5일, 14면.
11) 성홍식, 「농림부, 광우병 가능성 알고도 수입재개」, 『내일신문』, 2006년 9월 18일, 14면.
12) 김진철, 「"살코기도 광우병 위험" 정부 인정」, 『한겨레』, 2007년 4월 24일, 1면.
13) 김진철·류재훈, 「OIE 회의 '미 광우병 위험 통제국' 판정 뒷면 보니」, 『한겨레』, 2007년 5월 24일, 3면.
14) 김종목, 「"MB외교는 주권 바친 조공외교"」, 『경향신문』, 2008년 4월 23일, 10면.
15) 김문, 「소치는 '똥장군' 강기갑 국회의원 당선자」, 『서울신문』, 2004년 5월 3일, 17면.
16) 김승현, 「"농촌새댁" 희망자 늘고 있다」, 『세계일보』, 1990년 1월 12일, 15면.
17) 김문, 「소치는 '똥장군' 강기갑 국회의원 당선자」, 『서울신문』, 2004년 5월 3일, 17면.
18) 황준범, 「"농민 여러분, 살아서 농업을 지킵시다…흑"」, 『한겨레』, 2005년 11월 25일, 6면.
19) 전병역, 「쌀 개방 반대 14일째 단식 강기갑 의원」, 『경향신문』, 2005년 11월 10일, 4면.
20) 김종목, 「농부 강기갑, 與 총장 與 텃밭서 꺾었다」, 『경향신문』, 2008년 4월 10일, 3면.
21) 김종목, 「이방호 꺾은 강기갑」, 『경향신문』, 2008년 4월 11일, 9면.
22) 최상원, 「'농민의 이름으로' 강자 이긴 '두루마기 전사'」, 『한겨레』, 2008년 4월 10일, 18면. 
 
 
 
2008/07/01 [17:26]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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