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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의 수많은 유물이 도굴된 창녕 송현동 고분군

한국작가회의/오마이뉴스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8. 8. 2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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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의 수많은 유물이 도굴된 창녕 송현동 고분군
<창녕의 문화재를 찾아서 2> 창녕 교동 ? 송현리 고분
박종국 (jongkuk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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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교동 고분군(사적 80호)

일제, 도굴은 제대로 했으나 발굴보고서는 남기지 않아

 

  사백년 동안, 왕들의 상여는 능선 위로 올라갔다. 능선 아래쪽으로 산은 깨끗이 벌목되었다. 무덤들이 들어선 능선은 마을 어디에서나 뚜렷이 보였다. 왕들의 무덤은 우뚝하게 두드러져서 하늘에 닿았다. 무덤들이 오래된 능선을 가득 채운 후에도 왕들은 거듭 죽어서, 무덤은 새로운 능선으로 뻗어나갔다. 그 능선에서 내려다보면 먼 변방 쪽으로 산봉우리들이 출렁거리며 달려갔고 대궐과 관아는 능선의 남쪽 사면에 안겨 있었다. 여러 고을을 휘돌아나가는 강물이 굽이마다 들판을 품었고 들판의 가장자리로 민촌은 흩어져 있었는데, 소 울음소리며 개 짖는 소리가 능선에까지 들려왔다. 왕들은 죽어서 하늘 가까운 산 위에 묻혔지만, 왕들의 내세는 여전히 능선 아래의 들판인 듯싶었다.

 

  봄마다 새 풀 돋는 무덤들은 연두색으로 빛났고, 겨울에는 눈 덮인 봉분에 칼바람이 부딪혀 새파란 하늘로 눈보라가 날렸다. 하늘이 팽팽한 겨울 저녁에 노을에 비낀 흰 봉분들은 보랏빛으로 젖어들며 밤을 맞았다. 그믐밤에도 무덤들은 어둠이 엷어진 능선 위에서 희끄무레한 윤곽을 드러냈고, 그 위로 푸른 별, 붉은 별, 노란별과 먼별, 가까운 별, 밝은 별, 흐린 별이 반짝였다. 별들은 계절마다 흘러서 자리를 바꾸었고, 무덤과 별 사이에는 어둠이 가득 찼다. 가야(伽倻)의 별이었다. <현絃의 노래>(김훈, 생각나무, 2004) 중에서 발췌  

 

  죽은 우륵을 묻고 난 니문은 국원을 떠나 구름처럼 떠다니며 산다. 어느 가을, 그의 나이 일흔 두 살, 니문은 가야 대궐 뒤 무덤의 능선에 오른다. 불타버린 대궐 터에는 검게 그을린 석재들이 나뒹굴었고, 봉분들은 팽팽한 하늘 아래서 우뚝하다. 니문은 아라가 묻힌 태자의 봉분 아래 주저앉는다. 니문은 등짐을 내려 금을 꺼낸다. 옛 가야 고을의, 네 줄짜리 금이다. 니문은 사마귀를 들여다보며 금을 뜯는다. 그때 민촌에서 저녁을 짓는 연기가 오른다. 산맥과 봉분과 민촌의 지붕 위에 가을빛이 가득히 내린다. 가야 사회가 묻을 닫은 것이다. <현의 노래>는 그렇게 끝난다.

 

  가야의 애상을 읽은  탓이다. 지척에 살면서도 거의 찾아가 보지 않았던 창녕고분군(昌寧古墳群)을 찾았다. 집에서 채 십여, 내친김에 서둘러갔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 봉분은  벌초대접 받느라 바빴다. 여름내 장맛비에 산발 같은 머리채의 덩치 큰 봉분들, 여남은 장정들이 태엽을 감듯 휘휘 돌고나니 짤막짤막한 머리통으로 깔끔했다. 봉분들도 한가위 채비를 하는가보다. 함지박 여럿을 엎어놓은 듯 올망졸망한 봉분들이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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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교동 고분군(사적 80호) 교동고분군은 현존하는 고분 중 36기는 지금까지 복원 정비한 것인데, 그 중 1기는 입구 쪽을 개봉했으며, 명덕못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 전체가 고분군이며 장방형의 고분은 평면횡구식 석실이다. 측면은 크고 작은 자연석기고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1918년경 발굴조사 되어 대부분의 유물을 일본이 가져가고 지금은 금동관, 순금이식, 귀금속으로 된 장신구와 철제 무구, 토기 등이 중요 출토품이다.
ⓒ 박종국
창녕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 머리채에 앉았다. 창녕은 `제2의 慶州‘ 로 불릴 정도로 가야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많다. 지금도 창녕지역에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 많이 남아 있는데, 창녕읍 교리 일대에 펼쳐진 교동 고분군과 화왕산 서쪽 기슭인 목마산성 아래서 볼 수 있는 송현동 고분군이 바로 그것이다. 두 고분군은 도로를 사이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현재 교동에 21기, 송현동에 17기가 복원되어 남아 있다. 하나, 이 고분군은 일제 때 발굴된 탓에 대부분의 유물이 일본으로 건너간 상태이다. 그 까닭은 비화가야(飛花伽倻)를 ’원래 일본 땅‘이라고 우기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을 추종하는 일본인들의 도굴로 인하여 고분은 속이 텅 비어버렸다. 때문에 비화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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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교동 고분 횡혈식 석실분(앞트기식 돌방무덤) 석실분은 일반적으로 연도가 달린 횡혈식 고분을 가리키는 말이나, 수혈식에 있어서도 내부공간(매장부)이 사람이 서서 다닐 정도로 거대한 것은 석실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석실분도 내부구조에 따라 수혈식, 횡구식, 횡혈식의 3유형으로 구분된다. 수혈식 석실분(구덩이식 돌방무덤)은 네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오다가 시신을 위로부터 매장하여 덮게돌을 다 덮은 것이며, 횡구식(앞트기식 돌방무덤)은 세 벽을 쌓고 천장 덮게돌도 다 덥고 나머지 한 측벽으로 매장하고 나서 입구를 막아버리는 것을 말한다.
ⓒ 박종국
횡구식 석실분

 

 

  창녕 교동 고분군의 발굴은 1918년부터 1919년에 걸쳐 일본인에 의해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다. 그런데 발굴보고서가 제대로 간행하지 못한 것은 물론, 발굴유물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다. 일본으로 옮겨간 유물 중 일부분은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야유물 가운데 출토지가 창녕으로 확인된 것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금동관, 금동제 관모(冠帽), 금은장식 환두대도(環頭大刀)처럼 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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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교동 고분군(도야리 목마산성쪽) 1918년에서 1919년에 걸쳐 일본인에 의해 교동고분군의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지만 발굴보고서가 제대로 간행되지 못한 것은 물론, 발굴유물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옮겨가고 일부만 국내에 남아있다. 일본으로 옮겨간 유물의 일부분이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박종국
발굴보고서

  한편, 이 고분군의 출토 유물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토기이다. 이 토기들은 창녕 현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기형은 이미 경주 계통의 것을 모방하고 있으며, 금제 태환 귀걸이, 삼엽형 장식이 달린 은제허리띠 조각과 같은 장신구는 신라로부터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무덤이나 출토 유물로 보아 이미 비화가야(비사벌국)는 신라와 깊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비화가야가 적어도 5세기 중반에는 왕에 버금가는 힘과 권세를 지닌 지배자가 통치한 국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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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교동 고분군에 위치한 창녕박물관 창녕에서 24번 도로를 따라 밀양 방향으로 나가다 보면 황왕산 서쪽 기슭에 창녕박물관이 있는데, 2개의 전시실과 시청각실을 갖추고 있다. 가야시대의 유물 중 총 166종 276점(토기류 85점), 말 장식품 42점, 장신구류 50점, 무기종류 53점, 기타 46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교통 고분군과 계성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시실내에는 유리 고인돌 모형이나 진흥왕 척경비 모형, 그리고 무덤의 내부 양식을 이해할 수 있게 모형도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전시관 중앙 홀에는 가야 고분의 축조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형관이 설치되어 관람객이 가야시대 고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야외 전시관에는 개성고분군의 모형도를 만들어 고분의 양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 박종국
창녕박물관

 

  창녕 고분군 답사는 담담한 마음으로 그쳤다. 근데 분개할 일이 많았다. 역사적으로 도굴이나 약탈을 문화우월주의로 자만하는 나라는 많다. 영국과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일본도 버금가는 나라다. 굳이 세계 역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들이 강화도와 거문도에서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를 보면 백일하에 드러난다. 일제가 36년 동안 우리 강토를 헤집고 다니며 강탈해 간 문화재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거다.  흔히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 때는 아예 도공들을 붙들어감으로써 이 땅의 문화재 존망 자체를 싹쓸이해 갔다. 텅 빈 껍데기만을 복원해놓은 고분군, 울컥한 마음이 치솟았다. 한국인으로써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컸기 때문이다.

 

 

창녕 송현동 고분군(사적 81호)

출토된 유물 대부분 일본에 강탈당한 아픈 역사를 남겨

 

  송현동 고분군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군은 창녕의 동북쪽 목마산(牧馬山) 기슭에서 서쪽으로 송현동 일대에 위치하며, 그 일부는 도야리로 통하는 도로를 넘어 교동지역(校洞地域)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원래는 80기 정도의 큰 고분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16기에 불과하며, 횡구식 석곽(앞트기식 돌방무덤)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는 것도 있다.

 

  2군은 송현동 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기가 있으며,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어 원형이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몇 기가 되지 않는다. 이 유적은 교동 고분군과 인접하고 있어 유구나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8년 교동 고분군과 함께 발굴된 89, 91호 고분의 보고서가 없어 이를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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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81호) 이 고분군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도굴되었거나, 주변이 경작지로 변해 성격 파악이 어렵다. 송현동 고분군을 비롯한 창녕지방 고분군은 약탈적인 발굴과 도굴을 겪었다. 예를 들면 1918년 엄청난 양의 유물에 대한 도굴행위를 시작으로 권력과 결탁한 도굴행위가 대낮에도 공공연하게 행하여졌으며, 도굴한 유물의 대부분은 상인의 손을 거쳐 일본에 유출되었다. 송현동고분군은 봉토는 대형분이고 세 멱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뚜껑돌을 여러 개 놓은위 막지 않은 벽을 통해 안치하고 나머지 벽을 쌓아 막는 방법인 횡구식 석실분으로 무덤의 혀태와 구조 출토 유물들은 교동 고분군과 비슷하다.
ⓒ 박종국
창녕 송현동 고분군

 

  또한 이 고분군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도굴되었거나, 주변이 경작지로 변해 성격 파악이 어렵다. 송현동 고분군을 비롯한 창녕지방 고분군은 약탈적인 발굴과 도굴을 겪었다. 예를 들면 1918년 엄청난 양의 유물에 대한 도굴행위를 시작으로 권력과 결탁한 도굴행위가 대낮에도 공공연하게 행하여졌으며, 도굴한 유물의 대부분은 상인의 손을 거쳐 일본에 유출되었다.

 

  현재 일본의 ‘오쿠라(소창(小倉)) 컬렉션’이라는 것도 당시 대구에 있던 오쿠라가 수집한 것으로, 그 대부분이 가야의 유물이다. 창녕고분군의 경우, 그 부장품이 방대했던 것은 출토품의 메모가 남아 있던 교동 7호분의 목록을 참작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분의 출토유물은 굽다리접시(고배(高杯)), 항아리(호(壺)) 등이 대부분이다.   

       

  근래 다종다양한 유물을 쏟아낸 창녕 송현동 고분군(사적 81호) 중 제6∙7호분은 신라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신라고분일 가능성이 커졌다. 봉분(封墳)을 남쪽(6호분)과 북쪽(7호분)을 잇대어 조성함으로써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는 마치 표주박을 방불케 하는 ‘쌍둥이 고분’인 이 두 무덤은 축조 방식이나 출토 유물 모두 신라적인 특징을 농후하게 보이고 있다. 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7호분 봉토가 6호분 봉토 일부를 까먹은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7호분이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출토 유물이나 매장 방식으로 볼 때 두 고분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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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송현리 고분군 중 제6, 7호 고분 근래 다종다양한 유물을 쏟아낸 창녕 송현동 고분군(사적 81호) 중 제6?7호분은 신라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신라고분일 가능성이 커졌다. 봉분(封墳)을 남쪽(6호분)과 북쪽(7호분)을 잇대어 조성함으로써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는 마치 표주박을 방불케 하는 ‘쌍둥이 고분’인 이 두 무덤은 축조 방식이나 출토 유물 모두 신라적인 특징을 농후하게 보이고 있다.
ⓒ 박종국
쌍둥이 고분

 

  출토 토기류는 종류별로는 뚜껑과 굽다리 접시가 세트를 이룬 유개고배(有蓋高杯), 덮개 갖춤 사발 모양 유개발(有蓋鉢), 목이 긴 항아리형 장경호(長頸壺) 등이 섞여 있다. 이들 토기류에는 지역적 특색이 강한 것도 있으나, 밀집침선문(密集針線文), 톱니 모양 삼각침선문(三角針線文), 나뭇가지 모양 수지문(樹枝文), X자형 침선문을 비롯해 신라적인 속성을 농후하게 엿보이는 유물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이상에서 교동 고분군에 현존하는 고분 중 36기는 지금까지 복원 정비한 것인데, 그 중 1기는 입구 쪽을 개봉했으며, 명덕못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 전체가 고분군이다. 장방형의 고분은 평면횡구식 석실이며, 측면은 크고 작은 자연석기,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1918년경 발굴조사 되어 대부분의 유물을 일본이 갖고 가고 지금은 금동관, 순금이식, 귀금속으로 된 장신구와 철제 무구, 토기 등이 중요 출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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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송현동 고분의 횡구식 석실분 입구(계성분 모형관) 창녕박물관 전시관 중앙 홀에는 가야 고분의 축조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모형관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이 가야시대 고분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모형관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이 가야시대 고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특히, 전야외 전시관에는 계성 고분군의 모형도를 만들어 고분의 양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 박종국
계성고분군

  송현동 고분군은 봉토는 대형분이고, 세 멱을 쌓아올렸으며, 그 위에 뚜껑돌을 여러 개 놓은 뒤 막지 않은 벽을 통해 안치하고 나머지 벽을 쌓아 막는 방법인 횡구식 석실분으로, 무덤의 형태와 구조 출토 유물들은 두 고분군에서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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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내 풀꽃나무가 웃자라 있는 창녕 송현리 제4호 고분 답사하는 날 창녕 교동 고분군은 봉분을 말끔하게 깎고 있었으나 아직 손이 미치지 못하는 지 송현리 고분군은 여름내 웃자란 풀꽃들로 산발 같은 머리채를 하고 있었다.
ⓒ 박종국
창녕 송현리 제4호 고분

 

  그러나 일제치하인 1918년에 이루어진 교동 고분군 일부와 송현동 제89,91호분의 발굴에서 화차 2칸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발굴보고서조차 작성되지 않았고, 그 대부분이 일본으로 반출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사람들을 반드시 응징해야한다는 당위성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같은 해에 교동 21호,31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는 그 결과가 고적 조사 보고서로 발표되었다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이것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창녕지역 고분군에 대한 조사 기록, 비화가야의 역사증거이라는데 답사자의 마음은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미디어 불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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