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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자율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교장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박종국교육이야기/함께하는교육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8. 11. 2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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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자율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교장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께

바쁘게 진행되었던 학사일정을 거의 마무리하고, 대입시험을 목전에 둔 중요한 시기에 역사 교과서와 관련한 갑작스런 사안이 발생하여 무척이나 곤혹스러울 선생님께 몇 가지 의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10일 서울시교육청을 필두로, 일부 지역교육청이 나서서 학교장에 대한 역사 교과서 연수를 실시하였던 바, 명목상 교과서 안내였지만 대놓고 교과서 채택 변경을 지시하는 내용이어서 교장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난감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인사권자인 교육감의 공공연한 지시를 거역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고, 이미 신학기 교과서를 다 주문해 놓은 마당에 역사교사들과 적잖은 갈등을 겪으며, 채택을 바꾸자니 그 또한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채택 변경은 사상 유래가 없는 일로 교육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교육과학기술부가 교과서 필자들과 수정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교육청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교과서 문제에 개입하는 월권적 행위에 교장 선생님이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검정교과서가 교과부 소관 업무이며, 교과부가 수정 지시를 한 것도 아니고 권고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교과부의 권고안에는 정통성 문제를 검토했다고 적혀 있을 뿐, 세부내용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표현은 전혀 없습니다. 교과서 논란이 정치적인 의도로 부풀려진 알맹이 없는 시비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장 선생님께서 굳이 교과서를 바꾸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정권교체 이후 촉발된 정치적 문제를 학교 현장으로 끌어들여 이념 대결의 장으로 만드는 격이 되고 맙니다. 만약 이것이 실현된다면, 다음 정권 때는 또 어떤 갈등을 겪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부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뒤흔드는 불행한 선례를 남기지 말았으면 합니다.


둘째, 이러한 시도가 현행 법규를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미 학교에서는 교과용 도서 규정 30조에 따라 내년도분 교과서를 8월말까지 주문 완료한 상황일 것입니다. 이는 질 좋은 교과서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뚜렷한 근거도 없이 관련 규정을 상급기관이 스스로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는 학교 운영위원회 운영 규정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초중등교육법 60조에 따르면 학교 운영위원회는 최대한 구성원의 합의로, 민주적 절차로 운영되어야 하기에, 논의 결과를 승인할 권한은 교장 선생님께 드렸지만,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않게끔 사유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부 교육청에서는 사유서만 제출하면 되니까 교장의 리더십을 발휘하라고 했다는데, 과연 이것이 규정을 올바르게 해석한 것일까요?


셋째, 부당한 채택 변경이 학교 운영위원회의 자율성과 역사교사의 전문성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지금 시점의 채택 갈등은 학교 자치의 상징인 학교 운영위원회를 사실상 부정하는 격이며, 오랜 시간 학생들을 지도한 역사교사들의 전문적 판단을 무시하는 처사가 됩니다. 그동안 함께 학교 발전을 도모해온 학부모님, 지역위원님의 뜻과 다른 결정을 교장 선생님께서 했을 경우, 학교 운영이 정상적으로 될 수 있을지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또 20년간 역사를 가르친 경험으로 교사들이 채택한 교과서를 단 2시간 연수받고 교장 선생님께서 바꾸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만큼 혜안을 가진 교장 선생님이라고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 학교 역사교사들을 전문성 없는, 혹은 인정할 수 없는 교사로 여겨야 할까요? 과연 이러한 교사들과 함께 머리 맞대고 공교육 내실화를 꾀할 수나 있을까요? 이에 따른 갈등과 후유증은 고스란히 학교의 몫이 되고, 그것은 또 교장 선생님의 고민거리가 될 것입니다.


모쪼록 실체가 없는 정치적인 공세, 상급기관의 부당한 압력으로 학교 현장이 소모적인 갈등의 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교장 선생님께서 막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평생 묵묵히 교사의 길을 걸으셨고, 이 땅의 사표로서 제자와 역사 앞에 당당했던 모습 그대로 소신 있는 판단을 해 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어려운 시기에 학교의 등불이 되고, 열악한 여건에서 공교육을 함께 발전시킬 교사들의 나침반이 되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앞으로도 내내 건승하시고, 학교의 교육활동에 많은 성과를 거두시를 기원합니다.


2008년 11월 20일


교과서개악저지공동대책위(준)[민족문제연구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교육학회, 한국역사연구회, 전국가정교사모임, 전국과학교사모임, 전국국어교사모임, 전국기술교사모임, 전국도덕교사모임, 전국미술교과모임, 전국사회교사모임, 전교조수학교사회, 전국역사교사모임, 전국영어교사모임, 전국음악교과모임, 전국지리교사모임, 전국체육교사모임, 전국한문교사모임,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학교자치연대, 그린훼밀리운동연합, 남부교육시민연대, 건강사회를위한보건교육연구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서울교육혁신연대, 원탁토론아카데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대학노동조합, 전국전문대학교수협의회, 전국지역아동센터공부방협의회, 정의교육시민연합,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학벌없는사회, 한국생태유아교육학회, 한국YMCA전국연맹,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흥사단교육운동본부, 사월혁명회 (이상 40개 단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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