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대의 철학·문학·예술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읽혀진다. 그걸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한다. 정(正)·반(反)·합(合)의 변증법으로 역사발전의 법칙을 궁구하여 ‘시대정신’의 개념을 확립하는데 일조했던 G.W.F. 헤겔은 시대정신을 “개개의 인간 정신을 초월한 보편적 세계정신이 역사 안에서 자기를 전개해 가는 각 과정”으로 해석했었지만 역사적 상대주의가 등장한 19세기 이후의 역사철학자들은 “시대정신은 그 시대에 완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실제로 역사를 더듬어보면 시대정신에 부합하여 당대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고 하더라도 후대의 시대정신에 의해 반 영웅으로 재평가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건국 역사가 일천한 대한민국의 경우도 시대가 나름대로의 영웅을 배출했다. 나라 세우는 게 지상 과제였던 해방 직후의 이승만은 신생 정부수립의 기초를 닦아 사사오입 개헌이니 뭐니 치졸한 독재에도 불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대접받고 있고,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돼 옷을 벗었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복직한 후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또한 생전에는 친일-좌익-쿠데타 주모자-독재자에 지나지 않았건만 경제가 화두가 된 지금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산업화 이후 민주화를 갈망하던 시절의 김대중은 온몸으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에 저항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헤겔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와 김대중의 민주화는 그 시대의 정신으로서, 각자의 업적 또한 전 시대의 정신을 부정함으로써 새 시대정신의 지평을 여는 정(正)-반(反)-합(合)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바, 좋은 쪽으로만 평가하자면 세 사람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대립하면서 새로운 합(合)을 모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김대중 지지세력이 아직도 패를 갈라 박치기를 해대고 있는 것은 그 정-반-합의 과정이 너무 짧은 시간에 이루어져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올드 타이머들의 시대정신과 김대중 시대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시대정신이 대립하기 때문일 뿐 나라 쪼개 따로 따로 살자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민주화 시대의 영웅이었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이 서거했다. 박정희 개발독재 세력으로부터 각종 음해에 시달려온 나머지 국내보다도 국외에서 더 유명했던 그는 “해방과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좁은 정치 공간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미래 지향적인 업적을 이룬 지도자”였다. 전 세계 주요언론들이 그의 서거 소식을 급보로 내보내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00년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던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한국, 아시아, 더 나아가 전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한 화해를 위한 그의 위대한 기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조전을 보내오기도 했다. 아직도 정치인들 뒤꽁무니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정계은퇴와 복귀를 번복했다고 손가락질하지만 그를 아예 대한해협에 수장시켜버리려고 했던 독재세력의 핍박에 비하면 옥의 티에 불과하고, 또 혹자는 지역감정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해먹었다고 눈을 흘기지만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쿠데타로 정권 잡아 고향 뒷산 깎아 공단 만들고 고향사람만 요직에 등용하여 지역감정의 씨를 마구잡이로 뿌려댔던 박정희 독재는 천세만세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어야 한다는 데 토를 달지 못한다. 역사는 발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 마침표를 찍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산업화 시대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박정희는 쿠데타 후 군복을 벗으면서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말했었다지만 김 전 대통령 서거에 즈음해서는 “다시는 이 나라에 김대중과 같은 불운한 정치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말을 대신 해주고 싶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한 명의 영웅보다는 수많은 훌륭한 시민을 길러 내는 것’, 건국-산업화-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게 김 전 대통령의 진정한 바람일 거라고 믿는다. 진심으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빈다. <채수경 / 뉴욕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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