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부자나라 미국서 편안히 살아보겠답시고 이민 왔지만 몇 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플러싱 코리아타운에 셋방 얻어 혼자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요즘 그 놈의 해외 금융자산 신고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잠을 설친다.
이민 올 때 서울 변두리 아파트를 처분한 돈 3억원을 살아 있을 적에는 이자 받아 용돈으로 쓰고 죽으면 자식들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정기적금을 들어놓고 푸드스탬프와 극빈자 보조금으로 연명해왔으나 최근 국세청(IRS)에서 ‘해외은행 및 금융계좌 보고’(FBAR·Report of Foreign Bank and Financial Accounts) 불이행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밝히면서 미 신고자에 대해서는 계좌보유연도에 따라 매년 1만 달러 벌금형 부과, 고의적인 탈세자에 대해서는 10만 달러 또는 해외계좌잔고의 50% 중 큰 액수를 기준으로 벌금형 부과, 탈세금액이 크거나 돈세탁 혐의가 있을 경우 형사 처벌하겠다고 윽박질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계속 숨겨두자니 불안하고, 제대로 신고를 하자니 푸드스탬프와 극빈자 보조금은 물론 메디케이드까지 포기해야 하고, 아들딸에게 미리 나눠주자니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만약의 경우’가 걱정된다. IRS의 FBAR 불이행 단속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9.11 테러 후인 미국 경기가 내리막길을 걷던 지난 2003년에도 해외의 ‘검은 돈’을 찾아내겠다고 두 눈 부라렸었으나 당시 마크 에버슨 국세청장이 상원에 청문회에서 실토했듯이 외국정부 및 금융기관들의 비협조와 IRS 인력부족으로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었다.
그런 실패를 거울삼아 머리를 짜낸 게 어떤 한 은행을 본보기로 조져보자는 것, 거기에 걸려든 게 비밀계좌로 유명한 스위스의 최대은행 UBS였고, UBS는 미국인 금융계좌 정보를 내놓으라는 IRS의 반 공갈 반 협박에 스위스의 금융비밀정보법을 내세워 “나치 전범의 경우처럼 IRS가 정확한 인적사항을 제시하면 관련자 금융거래내역을 공개하겠다”고 버텨왔으나, 2008년 7월 플로리다 연방법원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미국인 고객 2만여명의 금융거래내역을 IRS에 제출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지자 2009년 2월 형사기소 면제 대신 미국 영토 내 미국인 고객 자료를 공개하고 7억 8천만 달러의 벌금을 내기로 합의했었다. IRS의 FBAR 불이행 단속강화는 한 푼의 세금이라도 더 뜯어내자는 것, 미국이 많이 가난해졌고 그 만큼 야박해졌다는 증거다. 세금 포탈을 위한 지하경제 비중이 7.9%로서 전 세계 최저임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 이후 1조 달러를 돌파한 막대한 재정적자로 인한 달러 가치 하락, 예산부족으로 인한 국공채를 남발한 탓에 11조 5천억 달러에 달한 국가 부채, 불황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진 저축률 등으로 심각한 돈 가뭄을 겪고 있어서 그런지 김 할머니와 같은 가난한 이민자의 쌈짓돈까지 까발려 세금을 매기려고 덤벼들고 있음에 눈이 절로 흘겨진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주차 및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남발하는 것은 물론 동네 네일살롱, 빵집, 이발소 등 서민들이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근근이 꾸려가는 구멍가게에까지 각종 규칙과 법령을 들이대며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볼 때는 관용이고 뭐고 이성과 품위를 깡그리 상실했다는 느낌도 든다. 엊그제는 대기 중인 손님들을 위해 커피 메이커를 설치해놓고 고객들에게 차를 대접한 퀸즈의 한 미용실에 위생국 단속반원들이 들이닥쳐 4천달러의 벌금과 함께 40일간의 영업정지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미국물 좋던 시절은 다 지나갔나? FBAR 불이행 단속 강화가 부자나라 미국으로 이민 와서 얼렁뚱땅 더부살이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보려던 이민자들의 본국 역이민을 부채질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미국 이민정책연구소와 BBC 월드서비스가 공동으로 작성하여 어제 발표한 ‘이주와 글로벌 침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이민이 격감하고 있는 가운데 이민자들의 고국 송금액도 대폭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고 미주 코리아타운에서도 역이민이 늘어나 지난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간 역이민 숫자가 1962년 해외이민법 제정 이후 처음으로 이민 숫자를 추월한 것으로 집계됐었다. 날이 갈수록 아메리칸 드림이 건포도처럼 쪼그라들고 있다는 게 피부로 감지된다. <채수경 / 뉴욕거주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