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의 영웅 테세우스는 기원전 2천년 쯤 크레타 섬의 반인반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제물로 바쳐진 젊은이들과 함께 30개의 노가 달린 배를 타고 아테네로 귀환한다. 이를 기념하여 매해 아테네 시민들은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에서 타고 온 배를 타고 아폴론이 사는 델로스 섬까지 항해하는 해상축제를 벌였는데,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그 배가 기원전 3세기까지 남아 있었던 바, 나무로 만든 배가 썩지 않고 천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썩은 널빤지를 뜯어내고 새 널빤지를 붙이는 등 보수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테세우스의 배’를 보고 철학자들이 질문을 던진다.
갑판이고 뭐고 옛것은 하나도 없이 몽땅 다 교체되었는데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는가? 껍데기 등 물질적인 것들이 다 바뀌었을망정 테세우스가 탔던 배와 구조나 생김새가 똑 같다면 ‘테세우스의 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른 바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문제다. ‘identity’의 뿌리는 ‘같은’을 뜻하는 라틴어 ‘idem’, 정신적 측면의 동일함 즉 동질성을 ‘identity’라고 하고 그걸 확인하는 것을 ‘identification’이라고 한다. 어떤 존재의 과거와 현재를 인식할 때 정신적 측면을 살피느냐 물질적 측면을 살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 옛날 초등학교 코흘리개 시절의 ‘나’와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지금의 ‘나’는 정신적으로 따지면 동일인지만 물질적으로 따지면 전혀 별개의 인간,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공통분모 위에 서 있다고 인정받는 ‘민족’ 또한 어떤 측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개념이 달라진다.
유전자나 생김새 등 물질적 측면만 따진다면 미국인이나 베트남인과의 혼혈들은 한민족이라고 할 수 없는 반면 한국의 전통과 사고방식 등 정신적 측면을 따진다면 그들 또한 당연히 한민족에 속한다. 이곳 미주한인사회에서 태어나 한국말 한 마디도 못하는 2세들 또한 법적으로는 미국국민이지만 정서적으로는 한민족임을 주장하는 것을 본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북한 어린이 영양문제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토론회에 참석하여 통일을 대비해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북한은 스스로 자멸할 것이므로 통일이 안 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면서 “북한 어린이 영양문제는 비단 우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우리의 동질성을 결정하는 문제로서 이미 체격상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어머니와 딸이 걸어가면 어머니는 작고 딸은 어머니보다 머리 하나가 큰데서 보듯 (북한 어린이들의 영양문제를 방치할 경우) 통일이 된다고 해도 저기는 북한사람이고 여기는 남한사람이라는 게 한 눈에 드러날 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감상적인 ‘통일론’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는 같은 민족이 아니라”라는 말꼬리나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럼 통일하지 말고 영원히 남남으로 살자는 거냐?”고 천박한 시비를 걸고 있지만 기실은 현 정권이 물질주의적으로 경도돼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여서 더 큰 걱정을 금할 수 없다. 정신적 가치관보다는 물질을 더 중시하기에, 도덕과 인륜과 철학보다는 돈 돈 돈 염불을 외우고, 지역간 계층간 국민통합보다는 효율적인 이익창출에만 더 열을 올리면서, 경제논리만 내세워 부자들과 기업들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북한 주민들이 못 먹어서 왜소해졌으므로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박 대표에게서 섬뜩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국민을 두들겨 패서라도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맹신하는 개발독재의 머리통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이 반만년 역사가 어쩌고 우리 민족이 저쩌고 정신적 가치관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지저분한 이율배반, 역겨움을 금할 수 없다. <미주세계일보 / 채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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