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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의 주운 이야기]감잎 석 장

박종국에세이/단소리쓴소리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1. 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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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의 주운 이야기]감잎 석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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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창밖에서 감이 호롱처럼 익어 간다. 아직 어린 나무인데 재작년부터 감 서너 알을 매달더니 올해는 가지가 제법 묵직하다.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와 집을 드나들 때마다 어린 정원수들에 눈길이 자주 간다. 준공을 따느라 급조한 정원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많은데 철마다 죽어 가는 나무들이 눈에 띈다. 나로서는 타향이나 다름없는 먼 곳으로 이사를 온 터라 과연 이 동네에 정붙이고 오래 머물 수 있을까, 새로 온 사람으로서 문득문득 시름겹고 막막하다. 어린 정원수들도 신세가 나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새 아파트에는 사람만 입주한 게 아니라 나무들도 입주한 셈이다. 


 노란 꽃을 폭죽처럼 터뜨려 봄을 알리던 창밖 산수유 두 그루가 결국 뿌리를 못 내리고 작년과 올해 차례로 죽어서 사라졌다. 산수유와 더불어 창밖에 머물던 감나무도 두 그루 가운데 하나만 남았다.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도 죽어 가는 정원수들을 볼 때마다 조경업자나 관리 사무소 사람들이 야속하다. 그러니 창밖 풍경이 목가적일 리 없다. 그나마 저 감나무 한 그루가 스산한 가을 뜰을 지켜 줘서 고마운 마음마저 인다.
 
 호젓한 시골길에 들어서면 들이나 숲가에 가지를 한껏 벌인 묵은 감나무들을 더러 볼 수 있다. 대개 예전에 집터였던 자리다. 사람 떠나고 집과 돌담이 허물어진 자리에 이정표처럼 감나무는 서 있다. 누군가 가족을 이루고 집을 지으면서 대대손손 깃들어 살리라는 마음으로 심었으리라.
 
 아홉 살 혜정은 아침이면 곧잘 키를 둘러쓰고 소금을 받으러 오던 아이였다. 할머니는 소금 대신 물을 뿌려서 아이를 내쫓으며 빙그레 웃고는 하였다. 혜정은 이불을 적시기는 해도 동생을 셋이나 돌보는 듬직한 맏딸이었다. 어느 날 혜정이네가 멀리 간척지에 새로 생긴 마을로 이사를 갔다. 온 가족이 짐을 나누어 이고 지고 가는 이사 행렬이 우리 집 앞에 이르렀다. 혜정은 동생 하나를 손에 잡고 또 하나는 등에 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어른들끼리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제 넘어야 할 고개 밑이라 이들 가족은 쉽게 발을 떼놓지 못했다. 잘 가라, 잘 있어라, 하는 인사가 몇 번이나 오갔다. 별안간 아이들 속에서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혜정이 손을 꼭 잡고 선, 다섯 살 난 여동생이었다. 우는 아이는 제 집에 붉은 감을 매단 채 환하게 선 감나무를 가리키며 “감나무도 데려가자.”고 떼를 썼다. 잇따라 혜정이 훌쩍거리고 등에 업힌 아이도 언니들을 따라 울음을 터뜨렸다. 딸들이 어찌나 막무가내인지 그 집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쳐가며 몰듯이 고개를 넘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도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서울행 무궁화호에서 할아버지 한 분과 동석하게 되었다. 행색이 추레한 노인은 자식들 보러 가는 농한기 노인네처럼 보따리 짐이 많았다. 삶은 밤을 내주면서 이것저것 묻는 말씀이 많아서 조금은 귀찮았다. 노인은 수원의 아들네에 간다면서 자식들이 잘 되었다고 한참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노인은 자꾸만 보따리를 풀어 홍시며 대추를 내놓았다. 저 혼자 익은 과일들이라고 했다. 보따리 푸는 손길 너머로 얼핏 놋요강이 눈에 띄었다. 아마 노인은 수원에 아주 살러 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짐을 매만지던 노인이 요강에서 손수건 한 장으로 소중하게 묶은 물건을 꺼내 펼쳤다. 놀랍게도 붉은 감잎 몇 장이었다. 할머니 살아생전에 시골집 마당에서 노을빛으로 물드는 감나무 잎을 좋아했노라고 또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느 해 늦은 가을, 여자를 따라 그녀의 옛집을 찾아갔다. 부모도 떠난 고향집은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다. 아직 우리에게는 사랑이 찾아오지 않은 때였다. 사랑도 마치 무슨 경주처럼 출발 신호가 있는 줄 아는 나이였다. 우리는 서로가 건네는 말마디 눈길마다 사랑에 대한 예감으로 설레었다. 그래서 그녀의 옛집을 찾아가는 길이 그녀의 옛 시간들을 공유하고 마음을 얻으러 가는 길만 같았다.
 
 녹슨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당 가득 수북한 감잎이 밟혔다. 그녀는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동안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열쇠가 채워진 방문 틈으로 앉은뱅이책상이 보였다. 나이 어린 오누이가 촉 낮은 전등을 밝히고 밤 깊도록 지낸 자리였다. 뒤꼍 언덕에는 무화과가 주인도 없이 익어 있었다. 아버지가 심은 나무라는데 채 열매를 맺기도 전에 온 가족이 떠났다고 했다. 나는 무화과 열매를 따 주며 가족이라도 된 듯 뿌듯했다.
 
 그녀가 볕 바른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조는 동안 나는 하릴없이 마당에 쌓인 감잎을 쓸었다. 내 빗질은 그녀의 쓸쓸한 마음에 닿아 있었다. 빗질 소리에 눈을 떴을까? 어느 결에 그녀가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충만감에 사로잡혔다.

작가소개
이야기 들려주는 남자, 전성태 님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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