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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특집] 7.6.3. 북한은 어디로 가야 할까

박종국에세이/단소리쓴소리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2. 1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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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특집] 7.6.3. 북한은 어디로 가야 할까
  글쓴이 : 김종철     날짜 : 2009-04-26 08:55     조회 : 1226    

 

7.6.3. 북한은 어디로 가야 할까


북한문제에 관해서는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에 셀 수 없이 많은 전문가들이 있다. 이 문제가 세계적으로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핵무기로든 다른 무엇으로든, 북한이 뉴스의 초점이 될 때마다 전문가들은 앞을 다투면서 상황을 분석하고 앞날을 전망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9월에 남한에서 시작되어 다른 나라들로 널리 퍼진 ‘김정일 위원장 와병설’이다.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일인 9월 9일(9·9절) 노농적위대의 열병식에 그가 참석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되자 남쪽의 정보기관 고위직이 그의 ‘건강 이상설’을 언론에 띠운다. 그 소식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온 세계로 퍼져나간다. 이런 현상을 보고 북한 정권 쪽에서는 김 위원장의 군부대 시찰, 대학생 축구경기 관람, 담화 발표 사진을 잇달아 텔레비전에 내보낸다. 그러나 남쪽의 보수언론과 정보기관의 ‘전문가들’은 ‘어떤 사진은 옛날에 찍은 것으로서 가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중국 또는 프랑스의 전문의사한테 수술을 받은 듯하다면서 의사들을 추적한다. 나라 밖의 기자들도 ‘그 의사들 찾기 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2009년 1월 23일 평양을 방문한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대표단을 접견했다는 <조선중앙방송>의 텔레비전 화면이 나오자 ‘와병설’은 사그러든다.


그런데 3월 8일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12기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언론에서 ‘소동’이 벌어진다. 그 진원지는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었다. 그 신문은 2월 17일 중국 베이징발 기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3남 김정운이 결정됐다고 보도한다. 그러자 남한 언론들이 그의 출생 내력부터 살아온 과정까지를 샅샅이 전달한다. 그러나 정작 대의원 선거에서는 김정운은 물론이고 장남과 차남인 정남과 정철이 모두 뽑히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최고통치자가 될 사람은 일단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통설인데, 드러난 결과는 마이니치신문 기사를 오보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남쪽 언론매체 대다수는 겨우 26세밖에 안 된 김정운이 권력을 ‘세습’하기로 결정되었다는 남의 나라 신문 기사를 따라가다가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허깨비에 홀리게 만든 셈이 되었다.


남쪽의 언론뿐 아니라 권력이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근거가 박약한 소문을 바탕으로 흥미 위주로 전달하거나 자기들의 ‘희망사항’을 기정사실처럼 만들려고 하면 남북관계에는 악영향 말고 달리 올 것이 없다.


 ‘군사적 강성대국 건설’과 ‘이밥에 고깃국’


북한은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신년공동사설’을 발표한다.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등 북한의 대표적 언론매체들이 공동사설 형식으로 싣는데, 남한의 대통령 신년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정권 수립 이듬해인 1946년 1월부터 김일성 주석이 전국 인민에게 방송하는 형식을 취하던 ‘신년사’는 그의 사후인 1995년부터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발표하지 않고 ‘공동사설’로 나오게 되었다.


‘총진군의 나팔소리 높이 울리며 올해를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빛내이자’라는 제목의 2009년 신년공동사설은 이 해를 “당의 부름따라 전 인민적인 총공세로 강성대국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역사적인 비약을 이룩하여야 할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규정했다. 이 대목은 김정일 위원장이 2008년 말 천리마제강을 방문했을 때 ‘강성대국 건설’ 목표인 2012년까지 4년 남았음을 상기시키면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를 강조한 일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동사설에는 ‘총공격전’ ‘ 전 인민적 총공세’ 같은 격렬한 용어가 나온다.


  (···) 공동사설이 나오면 이를 관철하는 대회나 강연 및 학습이 전국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된다. 공동사설은 당의 공식적인 지도적 지침을 담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이를 숙지하고 이행하는 노력이 강요된다. 올해의 경우 공동사설 관련 강연회에서 다소 이례적으로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말이 재등장했다고 한다. ‘이밥에 고깃국’은 지난1950년대 북한의 ‘천리마 운동’ 시절 북한식 사회주의의 미래로 정의된 바 있다. 이번 강연회에서 “수령(김일성)님께서 그토록 소원하시던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세상이 우   리 장군(김정일)님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영태 통일 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시론 ‘이밥에 고깃국과 미사일’, <서울경제> 2009년 3월 12일자)


나는 북한이 2012년까지 건설하겠다고 하는 ‘강성대국’이 어떤 수준의 나라를 말하는지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보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성대국’이 자본주의 국가들이 말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총합이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화적 수준까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북한이 4년 안에 연평균 국민소득을 4,5만 달러로 끌어 올리거나 미국이나 일본 같은 군사력을 갖게 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이 말하는 강성대국은 ‘남한과 외세에 맞설 수 있도록 강한 군사력을 키우고 인민들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뜻이 아닐까?


북한이 오래 전부터 식량난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1990년대 말에 K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꽃제비’는 굶주린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북한 당국은 한동안 그 방송사를 극도로 적대시했다.


나는 2006년 11월에 금강산지구에서 열리는 문화행사에 참석하려고 북한 땅을 처음 밟았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자마자 도로 양 옆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군인들이 버스 안의 남한 사람들이 군사시설을 촬영하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현대’ 안내원이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가 적발되는 사람이 나오면 어김없이 차를 세우고 그를 끌어낸다고 한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 군인들의 얼굴에 핏기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동해안의 한 호텔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나서 이른 아침에 금강산 구경을 가는데, 도로 연변의 집단부락에서 직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온정리 지역은 남쪽 사람들의 관광 덕분에 다른 데보다 비교적 생활형편이 나으리라고 짐작했는데, 그들의 얼굴은 ‘이밥에 고깃국’을 자주 먹은 혈색이 아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남쪽에서 보통 수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쇠고기를 놓고 ‘한우냐 호주산이냐’를 따지는 장면이  생각났다.


나는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까지 굶어본 적이 있어서 굶주림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고 있다. 특히 예닐곱 살 적이던 한국전쟁 시기에 하루에 한 끼밖에 찾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코흘리개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쌀밥은 커녕 불어터진 보리밥 한 덩어리도 없어서 배가 홀쭉해지면 속이 쓰리다 못해 뒤틀리는듯하던 것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햇볕정책’으로 불리던 대북포용정책을 펼친 김대중 정부 시기에 식량이 모자란 북한에 쌀이나 밀가루, 라면 같은 먹을거리를 많이 보내고, 노무현 정부가 그것을 이어받은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보수세력 중에서 극단적인 사람들과 언론매체가 ‘퍼주기’라고 비난했지만,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해서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북한이 목표로 하는 ‘강성대국’이 자기방어를 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기르고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일 정도의 경제 발전을 뜻하는 것이라면,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군사력은 제한적으로 유지하고 경제에 치중하는 것이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 더 나은 길일 것 같다. 왜냐하면 남한이 무력으로 북한을 침공해서 통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전쟁이 일어나면 남과 북의 치명적 무기들이 한반도를 ‘석기시대’로 돌려보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의 미국이 항공모함과 전투기에 장착된 핵탄두로 북한에 선제공격을 가할 까닭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단, 북한이 남한으로 장거리포를 쏘거나 미국, 또는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비상사태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2009년 3월 12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끝나자마자 북한이 이른 시일 안에 인공위성을 발사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남한 언론에 나오고, 미국 정부는 그것을 ‘미사일 발사’와 같은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반응이 있었다. 북한은 1998년 7월 26일 제10기 대의원선거를 치른 지 한 달 5일만에 ‘광명성 1호’ 위성을 발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약 북한이 2009년 4월에 위성을 발사한다면, 15일의 김일성 주석 97회 생일, 20일의 김 위원장 ‘원수’ 추대 17주년, 25일의 조선인민군 창설 77주년 기념일을 맞이해서 쏘는 ‘축포’의 성격이 강하겠지만, 오바마 행정부와 남한 당국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북한이 특히 ‘신년공동사설’에서 이명박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탈선하는 그 어떤 요소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경한 어투를 사용한 뒤라서 우발적이든 고의적이든 북한과의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도 중국과 베트남식 ‘개혁 개방’을


나는 북한이 핵이나 미사일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위기 게임’을 벌이는 것은 더 이상 생산적인 결과를 낳기 어렵다고 본다. 북한이 그런 방식을 벗어나서 국제사회를 향해 개방을 하고 경제 교류를 활발히 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미국 정부가 2008년 10월 1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검증 요구를 받아들였다”면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그것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계속 비난하던 부시 2세가 결정한 조치였으니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6자회담 참여국들이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북한이 개방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1세는 이미 오래 전에 ‘레임 덕’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임기 말에 북한을 상대로 ‘최대의 외교적 업적’을 만들려고 하던 터라 동조세력을 얻기 어려웠다. 그리고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정권에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므로 절호의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나는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베트남에서 ‘개혁 개방’의 효과를 직접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맨 처음은 1993년 9월의 베트남이었다. 그때 한 신문사에서 일하던 나는 ‘통일 베트남’을 취재하고, 1965~75년의 베트남전에 참여한 한국 군인들이나 노무자들과 그 나라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한국 혼혈아 또는 튀기라는 뜻의 낮춤말)의 실태를 알아보려고 어렵사리 그 나라를 찾아갔다.


호치민시(옛 사이공)의 탄손녓 국제공항에서 가까운 시장통 옆의 숙소에서 아침에 눈을 뜬 나는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는듯이 요란한 소리에 놀라 창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가을날 새벽녘인데 오토바이들이 큰 도로를 메운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야 하루에미화로 1달러를 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낮에 돌아본 번화가에는 동냥을 하는 어린이들이 넘쳤다. 그 아이들은 한국 돈으로 100원쯤 줄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른들도 입성은 초라하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도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통일된 1975년 4월 30일 이래 지속되던 폐쇄적 환경이 1986년 정부가 ‘도이모이’(쇄신 또는 개혁이라는 뜻) 정책을 채택한 뒤부터 조금씩 숨통을 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정책은 “시장경제원리를 적극 도입함으로써 경제 분권화를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베트남은 공산당 독재의 정치적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당이 경제정책을 주도하면서도 시장경제원리를 바탕으로 민간부문의 공존을 허용하는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한 1986년 이래 1991년까지 베트남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5퍼센트 정도였으나 1992년부터 1997년 외환위기까지는 연평균 8.8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베트남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자를 유치하고, 1994년 2월 미국의 경제 제재가 해제됨으로써 국제사회의 자금 지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서 그런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북한이 개혁 개방을 할 때 참고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실제로 김정일 위원장은,  2007년 10월 16일 베트남의 농 득 마잉 공산당 서기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에서 “베트남의 도이모이, 곧 개혁정책과 경제발전 방향을 배우겠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0월 하순에  북한의 김영일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산업현장을 견학하면서 경제발전 학습에 열중하는 장면’이 남한 텔레비전에 방영된 바 있다. 그러나 어쩐 셈인지, 북한이 베트남식 개혁 개방을 추진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아직까지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호치민시에 머무는 동안 베트남 전쟁 전에 ‘동양 최대’였다는 쫄롱 시장을 찾아보았다. 도이모이 8년째이던 1993년 가을 그 시장에는 어느 자본주의 국가 못지않게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온갖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상인들과 손님들의 흥정은 우리나라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 비슷했다. 내가 그 뒤 이런 저런 일로 베트남을 찾아갈 때마다 경제는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외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여러 차례 전쟁에 시달린 베트남이 짧은 기간에 한국, 홍콩, 싱가포르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는 없었다. 1887년부터 1945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제2차 대전 중에는 일제 군대에게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이 개입한 전쟁에 휩쓸리고, 1979년에는 또 중국과 전쟁을 치른 그 나라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1999년 여름에 나는 한 언론사 대표로서 베트남 국영통신사의 초청을 받아 수도 하노이에 갔다. 그때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의 주선으로 응유엔 티 빈(Nguyen Thi Binh) 여사를 만났다. 1927년 생으로 그때 72세이던 그는 베트남의 부총리였다. 나는 20대 중반이던 1968년 봄부터 ‘빈’이라는 이름을 신문에서 너무나 많이 보았다. 여성인 그가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 평화회담’에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속칭 베트콩) 대표로 참석해서 미국 대표 헨리 키신저를 상대로 끈질긴 설전을 벌인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였다.


집무실에서 만난 빈 부총리는 키가 작은 편으로, 온화한 얼굴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부총리라는 그가 우리나라 여성들이 한국전쟁 뒤에나 입던 ‘유똥 원피스’ 차림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여한 아픈 역사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그는 “우리는 과거를 잊지는 않지만 일단 화해를 하면 앞만 보고 나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베트남과 다시 수교했으니 많은 도움을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의 표정은 담담하면서도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도이모이가 바로 그런 겸손과 자신감, 그리고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유연하게 외국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이 2012년까지 ‘강성대국 완성’을 하려면 ‘체제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미국의 부시2세 행정부 시기에 북한이 가장 불안해 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부시와는 달리 북한과 핵문제를 비롯한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직접 협상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 우선순위에서 북한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뒤에 있다. 게다가 2009년 들어 북한 정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미사일이나 위성 발사 계획 때문에 미국이 선뜻 대화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어렵고,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 정권은 ‘강성대국’을 이루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가장 시급한 것은 굶주리는 대다수 인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미국 국무부나 프리덤하우스 같은 민간단체뿐 아니라 남한의 국가인권위원회까지도 발표한 ‘북한의 인권은 세계에서 지독히 열악하다’는 조사자료를 ‘근거없는 비방’이라고 일축할 단계를 이미 넘어선 것 같다. 중국도 베트남도 개혁 개방 이전에는 인권 탄압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 뒤에는 그런 자세를 누그러뜨리면서 실제로 인권을 상당히 개선할 수 있었다.


나는 북한이 단기간에 그 사회를 바깥 세계에 완전히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 폐쇄적인 정책을 유지하면  빈곤을 벗어나면서 경직된 체제를 개선할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므로 점진적인 개방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이명박 정권도 북한체제가 무너지면 흡수통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동독을 흡수한 서독은 통일비용을 엄청나게 치르고서도 아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 시기에 동독은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넘는 동유럽 사회주의권 1위의 ‘부자나라’였는데도 그랬다. 그에 비하면 북한은 세계 하위권의 빈국에 속한다.


남쪽의 정권이 미국과 협력해서 일정한 기간 북한의 ‘체제 안정’을 보장하고 개방을 유도한 뒤에 평화공존을 굳히고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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