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도덕성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 ‘상징적 국가원수’이던 윤보선과 최규하는 논외로 하고 도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미국 하와이를 근거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은 3·1 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상하이를 방문한 뒤로는 임시정부를 다시 찾은 적이 없을 정도로 불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한다. 그는 1945년 8·15 이래 미국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1948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지만, 민족의 최대 숙원이라고 할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공권력으로 무산시키고, 친일에 앞장섰던 지주와 자산가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과 손을 잡는다.
많은 국민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지만, 그는 1960년 3월 15일의 대통령선거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부정이 저질러진 데 분노한 마산 시민들의 항거를 외면하고 종신집권의 길로 치닫다가 4월혁명으로 정치적 파산을 당한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에 세상을 떠난 뒤 꼭 30년이 되는 지금도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분야를 아울러서 그를 연구한 전문 자료들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도덕성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는 ‘정의’와 윤리에서 크게 벗어난 인물이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940년 4월 일제의 ‘꼭두각시 정부’라고 불리던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간다. 1942년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제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치된다. 이때부터 일본군 장교인 그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이 그의 생시와 사후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케네디, 박정희의 ‘불법’을 ‘승인’하다
박정희의 생애에서 인간적으로 심히 괴로운 시기는 1948년의 ‘여·순 반란사건’ 때였을 것이다. 1946년 12월에 한국 육사를 2기생으로 졸업한 그는 48년에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여·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그가 맏형인 박동희의 영향으로 남로당에서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한 장교들의 명단을 군 수사대에 넘겨주고 실형은 면한 채 예편당하고 사상 전향을 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한다. 군 수뇌부에 있던 만주 출신 인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서 결국 미국 케네디 행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은 정치적으로는 승리였을는지 모르나 국가적으로는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나는 청년기인 1967년부터 박정희의 ‘삼선 개헌’ 공작을 지켜보고, 1972년에는 동아일보사의 기자로서 ‘10월 유신’이라는 헌정쿠데타를 목격했다. 그리고 1974년 10월 24일에 선배 ·동료들과 함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한 바 있다.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가 선포한 ‘유신’이라는 것은 잔혹한 공포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뜻한다. 그는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의 영구집권 기도에 반대하는 민주인사들을 닥치는대로 투옥한다. 1974년 1월에 1호가 나온 ‘긴급조치’가 그 시발점이다. 2백 명이 넘는 청년·학생과 기성세대가 ‘민청학련’과 ‘인혁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거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는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장기형부터 사형까지를 선고받는다. 박정희의 그런 폭정을 보면서도 겁에 질린 채 기사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던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이 발표한 것이 바로 ‘10·24 선언’이다.
그 운동이 전국의 언론사들로 들불처럼 번지자 ‘유신 선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사의 광고주들을 협박해서 동아일보, 동아방송, 월간 신동아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마침내 1975년 3월 12일부터 동아일보사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이 사주 김상만의 손에 차례로 해직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무려 1백30여 명이 회사를 쫓겨나는데, 그중 113명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만들어 34년 동안이나 동아일보사와 국가를 상대로 명예회복과 배상을 요구한다. 그 결과 2008년 10월 21일,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동아일보사와 국가는 명예회복과 보상을 해야 한다”는 요지의 결정을 내린다.
‘유신 피해자들’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결정
이 결정 이전에 박정희 정권 시절에 사형을 당한 ‘인혁당 사건’의 8명과 민족일보사 조용수 사장이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정신적, 물적 배상을 받는다.
그런 일을 자행한 박정희는 1998년 2월 25일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래 노무현 정부가 물러나기까지, 보수세력이 명명한 ‘잃어버린 10’년 동안 화려하게 부활해서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현대사상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아래에 인용하는 글을 쓴 학자는 보수세력이 박정희를 미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이며 소설가인 이인화가 1990년대 후반에 쓴 글을 바탕으로 박정희를 ‘국가적 영웅’으로 미화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이인화의 눈에) 박정희는 ‘비로소 눈을 비비고 (···) 진정 위대했던 한 사람의 국가지도자로서 바로 보게 되는’ ‘선악을 초극한 인간 운명의 한 전형’으로 부각된다. 굴절 심한 박정희의 인생역정, 즉 스물여덟 살에 일본 육사를 나온 만주군 중위, 서른두 살에 숙군 대상자로 사형 구형을 받은 남로당 군사부 비밀당원, 마흔다섯 살에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짓밟는 쿠데타 주모자 등의 ‘씻을 수 없는 죄과, 이 도덕적인 오점들’은 ‘이 국가에 대한 경건주의와 숭고한 자기희생의 의지를 낳았’으며, ‘그(박정희)의 영혼에 암세포처럼 번져갔던 죽음의 힘’으로 승화된다. 이 ‘죽음의 힘은 그를 채찍질하여 국익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게 만들었’고, ‘오직 민족을 번영으로 이끌 절박한 시대적 과업만이 자기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던 북한의 전쟁도발을 막으며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늙고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이인화, 1997). 이렇게 ‘죽음의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한 초인적 초월성 맥락에서 정당성에 대한 이성적 관심은 사실상 조소의 대상일 뿐이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의 ‘민주화시대의 박정희’,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2007년 8월, 창비. 374쪽)
이인화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요즘 말로 ‘좌빨’이었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질서를 짓밟았는데, 그런 오점들이 민족을 번영으로 이끄는 시대적 과업에 대한 사명감으로 이어져 ‘자기구원’에 이른 셈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한다. 2008년 말에, ‘국민 여동생’이라는 애칭을 가진 문근영이라는 여성 연기자가 오래 동안 숨어서 해온 기부가 수억 원이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의 감탄과 칭송이 잇따랐다. 그런데 보수를 자처하는 한 논객이 “문근영의 외할아버지가 6·25 때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잡혀서 장기형을 살고 얼마 전에 죽었다. 외손녀의 기부도 사회주의적 운동의 일환”이라는 요지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인화는 박정희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다가 진리를 깨닫고 성자가 되어 종교를 창시한 듯한 인물로 비약시켰는데,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일가친척 중에 왼쪽으로 기운 사람이 있었다면 ‘좌빨’이 되는 것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도덕 불감증
전두환은 군인 시절부터 거의 언제나 노태우의 앞에 서서 대통령 자리까지 달려왔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4년제 정규 1기 졸업생으로서 1955년 2월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소위로 임관된다. 1961년에 육사에서 대위로 근무하던 그는 5월 16일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육사의 ‘지지 시위’를 유도해서 박정희의 신임을 얻는다. 그는 소령이던 1962년에 영남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 조직을 주도하고 1988년 2월 대통령직을 물러날 때까지 정치적 기반의 하나로 삼는다. 그는 대구·경북의 ‘명문고’를 나오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군대에서 ‘승승장구’해서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오른다. 바로 이것이 그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피살 뒤 후계자로 솟아오르는 데 결정적 디딤돌이 된다.
그가 노태우와 더불어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신군부’의 집권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1981년부터 88년까지 대통령 노릇을 하면서 1979년의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의 주동자라는 낙인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동족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잔혹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는 1987년의 6월항쟁 뒤 ‘친구이자 정치적 후배’인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여소야대’로 야당의 공세에 밀리던 노태우의 결정에 따라 1988년 11월 강원도의 백담사로 ‘귀양살이’를 떠나서 두 해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전두환의 ‘수난’은 세월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는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두 해만인 1995년에 ‘내란 및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는 이 재판에서 ‘제5공화국 비리’에 관한 심리를 아울러 받고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내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그중 532억 원만을 납부하고, 자신의 통장에는 29만원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사람들의 실소를 산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직한 정부’ 만들기를 거울삼아 한국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논하면서 전두환을 반면교사로 거론하는 것은 어쩐지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도 역사의 일부라서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노태우는 시종일관 전두환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간 사람이다. 그는 ‘하나회’ 핵심이면서도 군대 진급이나 보직에서 전두환에게 늘 뒤지더니,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내다가 마침내 1988년 2월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내란 음모 및 군사반란’ 재판에서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9억 원을 선고받는다.
거의 언제나 전두환의 ‘종범’처럼 다루어지던 그가 추징금에서만은 4백억여 원이나 앞선 것이다. 노태우는 그 중 2,286억 원을 납부함으로써 전두환보다 도덕적으로 ‘비교우위’에 서게 된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도덕적 상처
김영삼과 김대중은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가장 오래된 ‘숙명의 라이벌’이다. 나는 요즈음도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웃는 적이 더러 있다. 김대중이 남북관계나 국내정치에 관해 발언을 하면 김영삼이 조건반사적으로 반박이나 공격을 하는 때가 그렇다. 김대중이 어떤 말을 했건 간에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호된 비난이 날아간다. 그러나 공격을 받은 쪽에서 대응하는 것은 별로 보지를 못했다.
김영삼은 1927년생이고 김대중은 1925년생이니 호적상으로는 후자가 두 살 위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김영삼이 한 발 앞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1951년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영삼은 이듬해 5월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들어간다. 1954년 이기붕의 권유로 자유당에 입당해서 고향인 경남 거제군에서 총선에 출마한 김영삼은 압도적인 표차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27세의 최연소 의원이 된 것이다.
이승만의 종신집권 기도에 반발해서 자유당을 떠난 그는 1958년 총선에서민주당 후보로 부산시 서구에서 출마했으나 부정 혐의가 짙은 투개표 때문에 낙선하고, 1960년 4월혁명 뒤에 치러진 총선에서 재선의원이 된다. 그는 1964년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원내총무로 임명되는가 하면 대변인을 맡기도 하다가 1969년 11월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4O대 기수론’을 외치며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 전당대회에 나가서 언론과 정치인들의 예상을 뒤엎고 김대중에게 패배한다. 이때부터 김대중과 김영삼의 경쟁은 더욱 뜨거워진다.
그러나 두 사람이 늘 다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영삼은 1983년 전두환 정권에 맞서 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김대중과 함께 만들기도 한다. 1980년 5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은 국내 대리인을 통해 김영삼과 힘을 모아 신민당을 만들어서 민정당의 ‘제2중대’라는 비판을 받던 유치송의 민주당을 누르고 강력한 교두보를 쌓는다.
그러나 그들은 1987년의 6월항쟁 직후 영원히 돌아설 수 없을 정도로 결별한다.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명된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형식적으로 단일후보를 추진하다가 독자 출마의 길로 나가서, 결과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 뒤 김영삼은 1988년 4월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을, 김대중은 새로 만든 평화민주당을 이끌고 경쟁하는데 선거는 김대중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자 1990년에 김영삼은 김종필과 손을 잡고 ‘삼당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옮겨 간다. 그 이후 김영삼이 1992년에, 김대중이 1997년에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두 사람의 경쟁은 ‘40대 기수론’의 경우 말고는 해묵은 순서를 계속 밟아 나간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 도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민주세력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김영삼과 김대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영삼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같은 개혁적 조치를 함으로써 좋은 평가를 받은 반면에 차남인 김현철이 ‘소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권력을 휘두른 까닭에 ‘문민정부’와 ‘민주세력 최초의 집권’이라는 말이 무색해져버린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 그 시절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서 내가 쓴 글을 찾아 보니 이렇다.
(···)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가 1년 가까이나 남았는데도 머리칼을 자른 삼손처럼 보인다. 요즈음 몇 사람만 모여도 대통령과 둘째 아들 현철씨를 공격하지 않고는 얘기를 이어갈 수가 없다. ‘달리는 여론조사기관’이라는 택시 기사들은 대통령 부자가 존칭을 박탈당한 지가 오래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10% 안팎으로 곤두박질쳤다 하니 92년 선거에서 그에게 갔던 1천만여 표는 거의가 달아났다는 말인가?
(·····)
대통령이 이렇게 궁지에 몰린 직접 원인이 현철 씨임은 물론이다. 지난 4년 동안 현철 씨와 그의 사조직 또는 정보조직이 즐기던 ‘언론놀음’과 여론재판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 그의 머리를 치고 있다.
(·····)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관직도 없는 30대 청년이 총리와 장관 인사에 개입하고, 안기부 고위간부를 마름 부리듯 하며, 집권당 공천에 관여하고, 국빈들이나 머물 고급 호텔의 방을 사랑방처럼 썼다 하니····· 하물며, 만약 한보에 간 5조 원의 은행돈 대출에 그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진실로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겨레> 1997년 3월 18일자 칼럼 ‘왜 불행한 대통령들뿐인가’에서)
결국 김현철은 1997년 2월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영삼은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의 부도가 잇따르면서 마침내 IMF 외환위기를 맞아 숨을 가쁘게 쉬다가 김대중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물러난다.
전남 신안군의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43년에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8·15 해방 뒤 목포신문사와 해운회사의 사장으로 일한다. 그는 해운업을 하면서 몽양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정치생활을 하는 기간 내내 ‘좌익’ 성향이라는 공격에 시달린다. 그는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총선에 나가서 낙선한 뒤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해서 장면의 신파 계보에 들어간다. 그는 4·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든 뒤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 재선거에서 당선되지만 이틀 뒤에 일어난 군사쿠데타로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비운의 정치인이 된 그와 박정희의 악연은 그때부터 18년 동안 계속된다.
마침내 그는 1963년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초선으로 의사당에 들어간다. 그 선거 때, 박정희가 김대중이 장차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미리 막으려고 공화당 후보로 김병삼을 내세워 ‘총력지원’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967년에 재선된 김대중은 앞에 말한 ‘40대 기수 경쟁’에서 김영삼과 이철승을 이기고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다. 그는 1971년 4월의 대선에서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유권자들에게 경고하면서 파죽의 기세로 투표일을 향해 가지만 호남 출신인 그를 지역감정으로 몰아붙이는 박정희 진영의 홍보전과 ‘부정’ 혐의가 짙은 투개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집권 체제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일본에서 들은 그는 미국에 가서 교민들과 함께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머물던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부 부원들에게 납치당한다. 그는 일본의 바다에서 ‘상어밥’이 될 뻔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 소리에 놀란 납치자들이 급히 한국으로 데려와서 ‘귀가’시키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앞에 적었듯이 그는 1980년 봄 전두환 일파의 ‘신군부’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쓰고 사형선고까지 받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긴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간신히 이기고 대통령이 된 그는 같은 민주화운동 출신인 김영삼이 수구보수세력으로 넘어가서 대통령이 된 것과는 달리 자력으로(보수의 김종필과 손을 잡았으므로 완전한 자력은 아니지만) 정권을 장악한 민주진영 최초의 정치지도자가 된다.
그는 당선자 시절부터 환란을 수습하면서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 국민을 구해내고, 보수언론 사주들을 탈세 혐의로 구속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지만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김대중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그의 세 아들이었다. 홍일, 홍업, 홍걸이라는 이름이어서 ‘홍삼 트리오’라고 불린 그들은 그의 임기 말을 여러 가지 스캔들로 얼룩지게 한다. 김대중 측근과 직계 가족의 어지러운 이권 찾기에 관해서는 다음 글이 그 본질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현 정부하에서의 부패게이트에도 과거 정부에서와 같이 여전히 공식적 권력이 부당하게 이용되고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비공식적 권력(막후 권력 혹은 실세)이 공식적 권력을 통제·왜곡한 것이다. 왕조시대가 아님에도 막후정치가 득세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부패문제를 형성하는 주된 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식적인 법과 제도적 절차가 무시되는 후진국의 모습이다. 특히 대통령과 밀접히 관련된 인물들이 부패문제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직접적인 개입이 없더라도 대통령이 작금의 여러 부패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도덕적 책임을 부담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윤태범 충남대 교수의 ‘끊이지 않는 게이트의 망령’, <김대중 정부 5년 평가와 노무현 정부 개혁과제>, 경향신문사·참여연대 엮음, 2003년 2월, 한울, 17~18쪽)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역시 정치부패의 척결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한국정치사에 있어 최초로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하에 부패방지법, 돈세탁방지법 등을 제정하는 등 정치자금과 관련된 정치부패를 근절하기 위한 다각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오히려 각종 게이트와 대통령의 아들까지 부정에 연루,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 부패한 정부로 국민적 비판을 받고 있다. (김영래 아주대 교수의 ‘정치개혁의 무덤 음성정치자금’, 위의 책, 32쪽)
김영삼과 김대중은 모두 개혁에 역점을 두었으나 각 부문에서 구체적 계획을 강력하고도 끈질기게 추진하지 못하고 ‘부패’라는 불명예를 안은 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특히 ‘6·15 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김대중으로서는 그런 업적이 도덕성 확보로 이어지지 못한 사실이 아쉬울 것이다.
노무현도 결국은 비슷한 길로
194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노무현은 흔히 ‘자수성가’한 정치지도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는 1966년에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2년 뒤 육군에 입대해서 사병으로 복무하고 1971년에 제대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야말로 평범한 한국 남성의 전형이다. (2009년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평균율’과는 크게 다르지만).
민간사회로 돌아온 뒤 곧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그는 결혼해서 1남1녀의 아버지가 된 상태에서 세 번 실패한 뒤 1975년 제17회 때 합격해서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다. 그는 짧은 법관생활을 떠나서 1978년 변호사 개업을 하고는 주로 조세와 회계에 관한 사건 등을 맡아 상당히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1년에 ‘부림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2년 뒤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항쟁에 참여한다.
노무현은 42세 때인 1988년 4월 총선 때 김영삼이 총재이던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서 당선함으로써 직업정치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이해찬, 이상수와 함께 ‘노동위 삼총사’로 불리면서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는데,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5공 청문회’ 때 ‘광주학살’과 관련해서 전두환을 날카롭게 추궁한다.
그는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민주공화당이 합치는 이른바 ‘삼당합당’ 때 정치적 ‘보스’인 김영삼을 따라 가지 않아 박정희 군사독재의 후계자들과 전통적 야당 지도자가 ‘야합’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다는 평가와 함께 민주화운동 진영에 신선한 인상을 준다.
그는 그 뒤 정치의 세계에서 가시밭길을 걷는다. 1992년 ‘작은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출마해서 낙선하고,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서 36.7%라는 높은 득표율을 올리고도 2위에 그친다. 1996년 15대 총선 때는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가서 다시 고배를 마신다. 1998년 그는 서울 종로구의 보궐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출마해서 당선되고, 2000년 4월에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를 떠나서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부산 북·강서을에 나갔다가 허태열에게 패배한다.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고 대의를 따라가는 그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조직한 것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노사모)이다. 노사모는 한국 대통령선거 사상, 대대적으로 부정이 저질러진 때를 제외하고 대체로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크게 작용한 민간조직임이 분명하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을 가진 그가 2002년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대다수 국민들은 ‘바보 온달’처럼 우직한 정부가 정직한 행정을 펼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2003년 2월 25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오래지 않아 도덕성을 크게 의심받게 하는 암초에 부닥친다. 그해 10월에 그의 측근 중의 측근인 대통령 총무비서관 최도술이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최도술은 노무현보다 한 살 아래로, 부산상고 동문인데다 노무현이 변호사를 하던 시절 사무장을 맡은 바 있다. 게다가 그는 1995년 부산시장 선거 때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회계책임을 맡을 정도로 신뢰를 받고 인간관계도 끈끈한 인물이었다. 노무현이 그렇게 믿은 최도술이,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2002년 12월 말에 SK그룹 회장 손길승한테서 ‘당선 축하금’ 명목으로 10억 원이 넘는 양도성 예금증서를 받은 사실이 드러난다. 최도술과 손길승 모두 구속되어 실형을 사는데, 그 사건은 노무현에게 치명타에 가까운 것으로, 2004년 3월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때 야당인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 해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소추안을 내고, 국회의장 박관용이 경호권을 발동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강경한 저항을 ‘제압’하면서 탄핵안을 헌법재판소로 넘긴다. 노무현은 한 동안 대통령 공무 수행을 정지당했다가 5월 14일 헌재가 국회의 소추안을 기각함으로써 업무를 재개한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사건이 아니라 2009년 봄에서 따지면 다섯 해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노무현은 대통령 임기 내내 크고 작은 추문들로 시달린다. 노무현이 탄핵 파문으로 고역을 치르던 무렵 형인 노건평이 자신이 경영하는 정원토건이라는 회사에서 10억 원을 빼내 차명으로 주식투자를 한 사실이 드러난다.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실이 친인척과 측근을 ‘밀착 감시’하는데도 그런 대형사고들이 잇따라 터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노무현의 직계존비속 중에서 노건평을 빼면 이렇다 할 혈육이 부정이나 부패에 관련된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과 김대중의 세 아들이 구속된 전례와 비교하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평을 들을 만했다. 그러나 노무현이 임기를 마치고 김해 봉하마을로 돌아간 지 열 달도 안 된 2008년 12월 초에 노건평이 검찰에 구속됨으로써 그 우월성은 빛이 바랜다. 동생의 대통령 재임 중에 그가 농협의 세종증권 매입에 개입해서 ‘중개인’과 함께 30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이다.
노무현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2009년 4월 8일 그 자신의 ‘고백’을 통해 밝혀진다. 노무현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한테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데 대해 ‘홈페이지’에 이렇게 ‘사과문’을 발표한다.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이라고. ‘저의 집’은 경상도 말로 아내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은 부인 권양숙이 얼마나 되는 돈을 언제 받았는지 밝히지 않은 채 상세한 내용은 검찰에 나가서 진술하겠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은 검찰 정보를 인용해서 권양숙이 남편의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박연차한테서 10억 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노무현의 이런 고백이 나오기 여러 날 전부터 그의 조카사위 연철호가 박연차의 돈 500만 달러를 받아 ‘유령회사’ 비슷한 기업을 세웠다는 보도가 요란하게 나오던 터라 노무현과 함께 집권세력을 이루었던 민주당과 그의 지지자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아래의 기사는 노무현이 받은 상처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 도덕성 하나로 정권을 만들었고, 그것이 권력을 지탱한 뼈대였지만, 결국 ‘검은 돈’이란 한국 정치의 비극적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 한 마디로 도덕성은 ‘노무현 정치’의 자양분이었고, 위기를 돌파하는 무기였다.
(···)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이권 개입이나 인사 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 다짐했고, 친형인 건평씨의 청탁 의혹에는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머리 조아리지 말라”고 일갈했다. (···) 임기 말 ‘참여정부 실패론’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괜찮은 대통령인데, 국민이 영 눈이 높아 안 쳐준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4월 8일자, 김광호 기자의 기사에서)
검찰이 전직 대통령인 노무현을 조사한 뒤 재임중의 ‘위법행위’로 기소할는지는 지켜 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만으로도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부도덕성 계보’에 두드러지게 덧칠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도덕성’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정직한 정부’라는 이정표를 거울삼아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도덕성을 짚어보고 나서, 이제 이명박 정부에 이르고 보니 머릿속이 산란해진다. 이 쟁점이 하도 오래 국민들을 어지럽게 했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에 제1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 전,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박근혜 후보가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에 박 캠프가 특히 집요하게 이 후보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서 그의 ‘도덕성 이력서’는 윤곽이 대체로 드러났다. 다만 가장 뜨거운 쟁점이던 ‘BBK’는 그의 대통령 취임 나흘 전인 2008년 2월 21일 특별검사가 ‘무혐의’라고 밝힘으로써 없던 일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그의 도덕성은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잠잠해지기는커녕 더욱 거센 논란에 휩싸인다.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을 고생스럽게 보낸다. 8·15 해방 직후에 부모의 고향인 경북 포항으로 온 그는 집안 형편이 너무나 어려워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 하지만 장학금을 약속받고 동지상고에 입학한다.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가서 한 해 동안 노동을 하다가 고려대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그는 3학년 때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뽑히고, 1964년에는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서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는데, 옥살이 기간은 6개월이다.
‘전과자’라는 경력 때문에 취업을 못 하다가 1965년에 어렵사리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경영주 정주영과 긴밀한 상하관계를 맺으면서 승진을 거듭한다. 29세에 이사가 되고, 입사 12 년만인 1977년에 현대건설 사장의 자리에 오른다. 1988년에는 회장이 된다. ‘탁월한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던 그는 1990년대 초의 ‘걸프전’ 때문에 미수 채권을 회수하지 못해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빌미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는 ‘현대’를 떠나서 1992년 제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에 출마해서 이종찬과 노무현을 누르고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다. 그러나 그는 선거기획을 맡았던 참모가 “이 후보가 거액의 선거비용을 누락시키고 7천만 원 가량만 신고했다”고 폭로하는 바람에 기소되자 재판 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한다. 나중에 그는 서울 고등법원에서 벌금 4백만 원을 선고받는다. 이 사건은 이명박의 정치생활에서 처음으로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그가 Lke라는 금융투자회사를 설립했다가 실패하고 김경준과 공동으로 세운 BBK의 ‘주가조작’ 사건에 연관된 혐의로 고통을 겪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대통령이 된 뒤 그의 도덕성은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정부 요직에 임명하기로 내정하거나 임명된 사람들 대다수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한다. 그는 국무회의를 구성하려고 15명의 후보를 지명하는데, 그 중 3명이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자녀의 이중국적 문제 등으로 자진사퇴한다. 그리고 임명된 사람들 대부분도 ‘고소영’(고려대 출신, 소망교회 신자, 영남이 고향인 사람), ‘강부자’(강남의 부동산 부자)라는 여론의 비난을 받는다. 앞에서 예로 들었듯이, 오바마 행정부의 ‘성과 담당 최고책임자’로 내정된 낸시 킬퍼가 14년 전인 1995년에 ‘단돈’ 298달러(환율을 1,500대 1로 계산하면 45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깨끗이 물러난 데 비하면 참으로 엄청난 부도덕이 드러난 인물들이 이명박 정부 한 해 동안 계속 중요한 직책에 기용되는 것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덕성 논란은 그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반대세력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함께 가야 할 국민으로 여기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8년 여름에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무렵과 그 얼마 뒤에 그가 한 말과 행동이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 앉아서 <아침이슬>노래를 들으면서 거대한 촛불의 일렁임을 보고나서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시 국민들에게 다가가겠다”고 말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지도 않은 시점에 공권력이 강경하게 ‘촛불’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에 못지않은 ‘공약 위반’은 대운하 공사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 뒤 여론이 거세게 반대하자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4대 강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된 대운하 공사’라는 비판을 받을만한 일을 하고 있다.
그의 도덕성이 균형감각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결정적으로 일으킨 것은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 재개발구역에서 일어난 ‘용산참사’ 때이다. 대통령이 경찰청장으로 내정한 당시 서울청장이 농성하는 철거민들을 무리하게 진압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그는 희생자들의 유족을 인간적으로 위로하기보다는 내정자를 끝까지 비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1974년 12월에 결성한 이래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해 애써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거룩한 분노로 맞서 저항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2월 2일에 발표한 선언문은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용산 참사는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파국의 종점은 어디인지 국가구성원 모두에게 질문과 충격을 던진 무서운 사건이었습니다.
먼저 국가와 공권력의 존재이유를 따져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위하는 바른 정치가 공화국 탄생의 근본 동기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몇몇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 국민의 생존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용산 참극에서 나타났듯이 국민을 국민으로 대하지 않고 서슴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경찰과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검찰을 두둔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더욱 우리를 슬프고 울분에 떨게 만듭니다. 유감스럽지만 1987년 어느 대학생의 죽음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했던 일 하나로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정권이 붕괴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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