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노동자들은 월급이라도 받지 않나 | ||||||
[정문순 칼럼] 비정규직 남성노동에 묻힌 여성들의 '노동'을 발견하다 | ||||||
노동자영상보고서, ‘1986.1998.2009’(라넷 제작)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에 등장한 노동자들은 그 와중에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졸음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일하면서 그들의 몸도 영혼도 바뀌었습니다. 숙달된 노동자는 거친 노동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탈바꿈시켜야 했습니다. 늘 피로와 싸우다 언제부턴가는 몸이 힘들 경우 “생각 없이 멍하게” 작업을 해내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몸을 갉아먹는 피로도, 노동 소외도 힘들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인간적 모멸과 무시일 것입니다. 비정규직 남성노동자들에 대한 모욕은 여성화의 위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자신이 맡은 라인에서 40분 만에 끝내야 할 작업을 50분이 지나서야 마친 젊은 노동자에게 사장이 손해를 물어내라고 하면서, 손해액이 월급보다 크다고 3개월로 분할해서 갚으라고 합니다. 항의하는 노동자에게 사장이 한 말은 “네 엄마한테 전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졸지에 엄마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유치원생쯤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사장은, 고분고분하지 못한 비정규직 남성노동자를 노동의 위계질서에서 최말단에 위치한 여성 노동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존재로 격하시킨 셈입니다. 월차조차 맘대로 못 쓰더라도 잘리기 싫어 항변도 못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 정규직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만 비정규직은 그런 것마저 없다고 자조합니다. 해고는 사장이 “집에 가라.”고 한마디 내뱉으면 끝입니다. ‘집’은 여성의 노동이 있는 곳이지요. ‘집에 가서 애나 봐라’는 말은 양육을 전담하는 여성노동에 대한 비하와 멸시가 잔뜩 묻어나는 고전적인 어법입니다. 남성 노동자에게 집에 가라는 말로 해고 통보를 대신 하는 것 역시 비정규직 남성 노동 밑에 무보수 여성 가사노동을 서열화시키는 말입니다. 노동법은커녕 비정규직을 한마디 말로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장의 머릿속에 비정규직은 언제라도 여성노동을 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하는 하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악의적이게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남성성을 박탈하고 여성으로 호명함으로써 인격적 모멸을 가하는 어법이지요. 그렇게 쫓겨난 노동자들은 과연 사장에게 저항할까요? 자기모멸에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아무래도 큽니다. 법도 안 지키는 사장은 그것을 노린 건지도 모릅니다. 인정사정없는 위계질서 속의 남성 노동은 철야 잔업을 밥 먹듯이 하는 노동자의 몸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지만, 늙은 어머니는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는 자식이 안쓰러워 차마 깨우지를 못합니다. 가정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곳이라고 모두 알고 있는데,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 생존하여 돌아온 자식의 몸을 회복시키려는 여성의 돌봄 노동이 가능할 여지마저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현실이 무섭습니다. 인터뷰하는 노동자 곁에서 그의 동료가 하는 말이 계속 함께 들렸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영상을 되돌려 보아야 했습니다. 경상도 출신인 내 귀에도 남성노동자들의 경상도 말투는 똑똑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단념했습니다. 아마 감독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겠지요. 라넷의 임인애, 홍은영 감독의 특장으로 알려진 다성성. 초점 인물만이 아닌 화면 밖에 배제된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함께 나오는 이 기법은, 1998년 현대자동차 여성 식당노동자들의 해고 투쟁을 다룬 2001년 작품 ‘밥‧꽃‧양’에서도 선보인 바 있습니다. 한 사람을 불러 앉혀놓고 혼자만 말하게 하는 인위적인 인터뷰 일색이던 여타의 다큐멘타리 영상이 왜 갑갑하고 불편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올바른 말일진정 감독은 한 사람의 말만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나도 영상을 지배하는 주된 목소리가 아닌 소음을 읽어내고 싶은 욕심이 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기막힌 처지야 널리 알려져 있어 어쩌면 새롭게 이야기할 것은 없는지 모릅니다. 내가 작품에서 절실하게 공감을 느낀 사람은 일터에 나갈 남성노동자가 아닌 무보수 가사노동자인 그의 아내였습니다.
내 경우도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아이에게 줄 밥을 차리는 일이 왜 그리 힘들던지요. 칼과 불을 사용하려면 졸린 채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아이가 제 입에 밥을 넣을 때면 긴장해 있던 몸은 비로소 제 자리로 돌아가 혼곤한 잠에 무너졌습니다 영상 속 남성노동자의 아내는 아침 6시 남편의 입에 김이 솟는 밥을 넣기 위해 몇 시에 일어나야 할까요. 졸린 채 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이부자리를 걷고 남편을 깨우고 그 전에 밥을 차려놓는 일은 엄두를 못내는 일이지요. 시계를 차고 잠자는 남편을 깨우는 아내의 얼굴에는 졸음 기운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피곤함을 마음껏 나타낼 수라도 있지만 하루 종일 아이들과 씨름하여 남편보다 덜 피곤하지도 않을 아내는, 일터에 나갈 남편을 돌보기 위해 피로를 몸에 나타낼 여지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널브러져 자는 어린 아이들.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면 아내는 눈도 붙이지 못하고 아이들을 놀이방이나 유치원에 보내는 전쟁을 한바탕 치러야 할 것입니다. 자본이 위계화시킨 노동구조에서 정규직 남성노동자가 정점에 있으며 그 아래 비정규직 남성노동자가 있습니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당사자들이 ‘일당벌이’라고 말하는 외주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는 그보다 더 밑에 위치하겠지요. 그러나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정당한 대가를 받는지 여부가 문제일 뿐 모두 임금만큼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내'나 '엄마'로 불리는 여성 무보수 가사노동자의 처지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화면 바깥 언저리에 서성이고 있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중심을 차지할 날을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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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1/14 [16:47] 최종편집: ⓒ 대자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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