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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축기견초법(築基堅礎法)

세상사는얘기/다산함께읽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0. 2. 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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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축기견초법(築基堅礎法)
  글쓴이 : 정 민     날짜 : 2006-05-18 10:57     조회 : 389    

 

3) 축기견초법(築基堅礎法) : 기초를 확립하고 바탕을 다지라  



이에 문무의 장교와 아전을 모두 불러 각자 역할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집 지을 때 터를 굳게 다지지 않기 때문에 단청이 채 마르기도 전에 주추가 먼저 내려앉는 것이다. 또 규모가 낮고 작아서 여염집 백성의 거처와 같게 되면 체모를 높일 수가 없다.” 그들로 하여금 터를 다지게 하여 석달 간 달구질을 그치지 않았다. -<곡산의 정당을 새로 지은 일에 대하여[谷山政堂新建記]〉



축기견초(築基堅礎)는 터를 다져 주추를 굳게 한다는 말이다. 터다지기를 굳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근사한 집을 지어도 단청이 채 마르기 전에 주추부터 내려앉는다. 또 고을의 정사를 살피는 집이니 화려한 장식이나 회랑은 없더라도 규모가 작아서는 안 된다. 다산이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다 낡아 무너진 정당 건물을 신축하면서 한 말이다. 터를 다지는 데만 석 달이 걸렸는데, 막상 공사를 마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은 반년이었다. 터다지는 데 3개월, 짓는 데 3개월이 걸린 것이다.


사람되기 공부로 기초를 세운 뒤에


터다지기를 소홀히 하면 주추가 내려앉는다. 주추가 내려앉으면 다시 뜯어 새로 짓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게 새로 집을 지으려면 경비는 몇 배나 들고 시간과 노동력도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기다. 이 기본기가 잘못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아도 그 이상은 안 된다. 뒤늦게 깨달아 다시 기본부터 닦으려 하면 그때까지의 잘못된 습관이 방해해서 상태가 전보다 더 나빠진다.


공부의 일도 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기초를 튼실히 닦아야 한다. 우왕좌왕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보다 진득하니 앉아 바탕 공부에 몰두하는 것이 낫다. 바탕 공부란 어떤 것인가?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독서는 무엇보다 먼저 바탕[根基]을 세워야 한다. 바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배움에 뜻을 두지 않고는 능히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배움에 뜻을 두었다면 반드시 먼저 바탕을 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바탕이란 무엇을 말하겠느냐? 효제(孝悌),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운 것일 뿐이다. 모름지기 먼저 힘껏 효제를 행하여 바탕을 세운다면 학문은 저절로 무젖어들게 마련이다. 학문이 내게 무젖어 들고 나면 독서는 모름지기 별도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된다. -〈두 아들에게 부침[寄二兒]〉(현대실학 303


공부보다 인간이 먼저 되라는 얘기다. 공부의 바탕이 되는 근기(根基)는 효제의 덕성을 바탕으로 갖추어진다. 인간은 인간성에 바탕한 근기를 갖출 때 비로소 목표가 생긴다. 내가 이 일을 해서 부모님이 기뻐하시겠지 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날 때 갈 길의 방향이 정해진다. 형제들이 저렇게 잘 하니 나는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을 지닐 때, 잡념 없이 더 정진할 수가 있다. 이럴 때 경전의 말씀은 하나하나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내 안에 스며든다. 주체가 일단 서면 아무 책을 읽더라도 내게 다 약이 된다. 그때부터는 차례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효제의 마음가짐을 내 안에 깃들일 수 있는가? 다산은 계속해서 말한다.


경학, 역사, 실용의 학문 순서로


근래 들어 한두 젊은이들이 원나라 명나라 사이의 경박하고 망녕된 자들의 괴로워 끙끙대고 뾰족하고 자질구레한 글을 가져다가, 이를 본떠 절구와 율시를 짓고는 은근히  세상에 우뚝한 문장이라고 자부하며, 거만하고 경박하게 고금을 쓸어 엎겠다고 한다. 나는 늘 이를 불쌍하게 생각한다. 반드시 먼저 경학으로 그 기초를 세운 뒤에 앞 시대의 역사를 섭렵해서, 그 득실과 치란(治亂)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에 마음을 쏟아 옛사람이 경제에 대해 쓴 글을 즐겨 보도록 해라. 이 마음 속에 언제나 만 백성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길러내겠다는 마음을 지닌 뒤라야 바야흐로 독서한 군자가 될 수가 있는 법이다. -위 같은 글 


젊은 사람은 혈기가 안정되어 있지 않아서 늘 낯설고 신기한 것에 눈을 판다. 그들은 종종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을 착각하고, 새로움과 괴상함을 혼동한다. 남들이 많이 간 길은 거들떠보지 않고, 생전 처음 보는 길로 모험을 떠나기를 즐긴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가더라도 괴상한 것과 혼동하면 안 된다. 주체가 흔들릴 때 모험은 대개 용기이기보다 만용이 된다.


그들은 또 유행에 민감하다. 이것이 좀 뜬다 싶으면 이쪽으로 우루루 몰려가고, 저쪽이 새롭게 부각되면 저쪽으로 무너지듯 쏠린다. 낯설고 새로워도 나 혼자 가는 길은 웬지 불안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가야 편안하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해서는 안 될 것도 있다. 동서남북은 내가 어디에 있든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다. 하지만 상하좌우는 내가 선 위치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가변적이다. 동서남북을 상하좌우로 알 때 문제가 생긴다. 상하좌우를 동서남북으로 착각해도 비극이다.


바탕을 다지는 일은 동서남북을 배우는 일이다. 현실에 적용하고 실제에 응용하는 것은 상하좌우의 분별과 관련된다. 상하좌우만 알면 방향을 잃었을 때 집을 찾아갈 수 없지만, 동서남북을 알면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동서남북은 경전의 말씀이다. 말씀 하나 하나를 마음에 새기면 마음 속에 호연한 기상이 생겨난다. 가슴이 쭉 펴지고 눈빛이 맑아진다. 역사책은 상하좌우와 같다. 어떤 때는 동쪽이 왼쪽이 되고 남쪽이 위쪽이 되기도 한다. 좌우가 바뀌고 상하가 요동친다. 그 흥망성쇠의 득실과 치란을 살펴보면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이 환하게 들여다보인다. 그때 비로소 세상에 보탬이 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다짐이 겉잡을 수 없이 올라온다.

  

공부를 그저 출세의 수단으로만 여겨서는 공부도 잃고 나도 잃는다. 사업을 단지 돈벌이의 방편으로 생각하면 결국엔 패가망신하게 된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이런 물음에 수시로 대답해 보아야 한다. 좌표를 설정하지 못하면 그저 망망대해에 나침반 하나 없이 떠돌다 풍랑을 만나 좌초하고 만다. 등등하던 기세가 막상 작은 시련 앞에서 맥없이 무너진다.  


문장은 결과일 뿐 목적이 아니다

     

다산이 한강 가 마재에 살 때 일이다. 열 아홉 살 난 이인영(李仁榮)이란 젊은이가 책상자를 지고서 다산을 찾아왔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젊은이가 대답했다. “문장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훌륭한 문장을 남길 수만 있다면 공명(功名)과 멀어져 평생을 불우하게 살아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말하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책 상자 속에는 모두 기이하고 청신한 시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점검해 보니 뱃 속에 든 지식이 호리병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거침이 없었다. 참으로 명민하고 똑똑한 젊은이였다. 다산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자네 우선 거기에 앉게. 내가 자네에게 말해 주겠네. 문장이란 무슨 물건일까? 학식은 안으로 쌓이고, 문장은 겉으로 펴는 것일세.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살가죽에 윤기가 나고, 술을 마시면 얼굴에 홍조가 피어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그러니 어찌 문장만 따로 쳐서 취할 수가 있겠는가? 중화(中和)의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성품을 다스려, 몸가짐을 공경히 하고, 성실로 일관하되, 중용을 갖춰 변함없이 노력하여 도를 우러러야 하네. 사서를 내 몸에 깃들게 하고, 육경으로 내 식견을 넓히며, 여러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게 해야겠지. 예악형정의 도구와 전장법도의 전고(典故)가 가슴 속에 빼곡하여, 사물이나 일과 만나 시비가 맞붙고 이해가 서로 드러나게 되면, 내가 마음 속에 자옥하게 쌓아둔 것이 큰 바다가 넘치듯 넘실거려 한바탕 세상에 내 놓아 천하 만세의 장관이 되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네. 그 형세를 능히 가로막을 수 없게 되면 내가 드러내려 했던 것을 한바탕 토해놓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네. 이를 본 사람들이 서로들 ‘문장이다’라고들 하니, 이런 것을 일러 문장이라 하는 것일세. 어찌 풀을 뽑고 바람을 우러르며 빠르게 내달려, 이른바 문장이란 것만을 구하여 붙들어 삼킬 수가 있겠는가? (중략)

바라건대 자네는 이후로 문장학에 뜻을 끊고, 서둘러 돌아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게나. 안으로 효우의 행실을 도타이 하고, 밖으로는 경전의 공부를 부지런히 하게나. 그래서 성현의 바른 말씀이 언제나 몸에 젖어 나를 떠나지 않도록 하게. 한편으로 과거시험 공부도 해서 몸을 펴기를 도모하고 임금을 섬기기를 바라야할 것일세. 그리하여 밝은 시대의 상서로운 인물이 되고, 후세의 위인이 되도록 해야지. 경박한 기호로써 이 천금 같은 몸을 가볍게 버리지 않도록 하게. 진실로 자네가 고치지 않는다면, 차라리 노름질 하고 술집을 드나들며 노는 것이 또한 문장을 배우는 것보다 더 나을 걸세.  -<이인영을 위해 준 글[爲李仁榮贈言]〉  


문장은 결과일뿐 목적이 아니다. 문장은 얼굴 위에 오른 불콰한 낯빛에 불과하다. 뱃속에 든 술기운이 없으면 얼굴은 붉어지지 않는다. 술은 한방울도 안 마시고 얼굴만 붉어지는 법은 없다.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어 영양 상태가 좋아지면 피부는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서 살결만 고와지는 경우는 없다. 바탕 공부는 그러니까 맛난 음식의 영양분이고 향기로운 술의 더운 기운이다. 문장은 그것이 얼굴 위로 드러난 윤기요 홍조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학이란 것이 따로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따로 존재할 수 없는 문장을 쫓아 천금 같은 세월을 허송하느니, 차라리 술집에 가서 기생을 끼고 노름하고 술 마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바탕 공부의 중요성, 강조하고 또 강조


다산은 자신을 찾아온 젊은이에게 이렇게 따끔하게 충고했다. 충고만으로 모자라 아예 장편의 글로 써 주었다. 오늘날 이런 내용을 글로 쓰는 사람은 없다. 다산의 문집을 들춰보면 도처에서 바탕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학연에게 주는 가계(家誡)〉에서는 “몸을 닦는 일은 효우로 바탕을 삼아야 한다. 이점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면, 학식이 제 아무리 고명하고 문사가 아름답다 해도 흙담에 대고 색칠을 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다산의 이런 정신은 19년 강진 유배 생활에서 찬연하게 빛났다. 터를 굳게 다져 바탕공부에 힘쓴 사람과 한때의 가벼운 재주로 세상의 명망만 쫓은 사람은 역경의 순간에 확연히 갈린다. 다산은 회갑을 맞아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귀양지에서의 삶을 스스로 이렇게 정돈했다.

     

나는 바닷가 강진 땅에 귀양을 왔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배움에 뜻을 두었지만 스무 해 동안 세상길에 잠겨 선왕의 큰 도리를 다시 알지 못했더니, 이제야 여가를 얻었구나. 그리고는 마침내 흔연이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육경과 사서를 가져다가 골똘히 연구하였다. 무릇 한위(漢魏) 이래로 명청에 이르기까지 유가의 학설 중에 경전에 보탬이 될만한 것을 널리 수집하여 꼼꼼히 살펴 잘못된 것을 정하여 취하고 버릴 것을 드러내어, 일가의 말을 써서 갖추었다. 선대왕이신 정조 임금께서 비평하신 《모시강의》12권을 시작으로 이와는 별도로 《강의보》 3권과 《매씨상서평》 9권, 《상서고훈》 6권, 《상서지원록》 7권, 《상례사전》 50권과 《상례외편》 12권, 《사례가식》 9권과 《악서고존》 12권,《주역심전》 24권, 《역학서언》 12권, 《춘추고징》 12권, 《논어고금주》 40권, 《맹자요의》 9권, 《중용자잠》 3권, 《중용강의보》 6권, 《대학공의》 3권, 《희정당대학강록》 1권, 《소학보전》 1권, 《심경밀험》 1권 등을 지었으니 경전에 관한 책이 모두 232권이다. (중략) 경계하고 공경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는 동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주신 복이 아니겠는가? 또 내가 지은 시율이 18권인데, 다 깎아내면 6권쯤 될 것이다. 잡문은 전편이 36권, 후편이 24권이다. 또 잡찬은 문목이 각기 다르다. 《경세유표》 48권은 아직 마치지 못했다. 《목민심서》 48권, 《흠흠신서》 30권, 《아방비어고》 30권은 미완성이며,《아방강역고》 10권, 《전례고》 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천》 3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을 저술하였다. 모두 합해 말하면 문집만 모두 260여권이다.


방대한 저술, 굳건한 바탕공부의 힘이 있었기에


그저 베껴 쓰는 데만도 10년은 조이 걸릴 경집(經集) 232권과 문집 260여권을 다산은 강진 유배 19년간 모두 정리해냈다. 참고할 서적도 넉넉지 않고, 여건도 여의치 않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뤄낸 경이롭다 못해 경악할만한 성과였다. 굳건한 바탕공부의 힘이 위력적으로 발휘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도 영조 때 나주 벽서사건에 연좌되어 함경도 회령과 전남 신지도에 유배 가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 어떤 사람이 그가 귀양살이 하는 집을 찾아갔다. 벽장을 열어 보여주는데, 그 속에 좋은 벼루와 기이한 술잔 같은 값 나가는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어보니, 신지도의 진장(鎭將)이 이런 것을 가져다주고 자기 글씨를 사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장은 그의 글씨를 얻어다가 서울로 올라가 비싼 값에 팔았다.


그의 유배 생활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귀양지의 섬에서 그는 박을 심었다. 가을에 박이 익으면 박 속을 파내고 그 속에 자기가 지은 글을 써서 넣고 밀랍으로 주둥이를 봉해 일삼아 바다로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문자를 쓰는 땅에서 누군가 얻어 보고, 바다 동쪽에 이광사란 사람이 있음을 알아주면 족하다.”

 

한 사람은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귀양살이의 시간을 하늘이 준 축복으로 알고 학문 연구에 몰두 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학술계의 경이로운 금자탑을 세웠다. 그의 오랜 귀양살이는 그 개인에게는 절망이었지만, 조선 학술계를 위해서는 벼락같이 쏟아진 축복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진장에게 글씨를 팔아 벽장을 채워 놓고 배부르게 지냈다. 그리고도 모자라 박에다 제 글을 적어 세상을 향해 띄워 보내며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했다. 그는 결국 섬을 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쓸쓸히 죽고 또 잊혀졌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인가? 근기(根基), 즉 바탕공부의 차이 때문이다.    


다산은 말한다. 기둥을 세우기 전에 터를 굳게 다져라. 주추를 놓기 전에 터를 굳게 다져라. 진도를 빨리 나가려 들지 말고 터를 굳게 다져라. 단청이 마르기도 전에 기울어지고 벽이 갈라지는 그런 집은 아예 짓지도 말아라.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터를 굳게 다져라. 달구질을 오래 할 수록 터가 단단해진다. 그 굳건한 토대 위에 주추를 얹고 기둥을 얹고 들보를 얹어라. 천년 세월에도 기울지 않을 그런 집을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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