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 : 묶어서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어린 아이들이 그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검을’ 현(玄)자를 칭칭 감는다는 ‘감을’ 전(纏)자의 뜻으로 알고, ‘누르’ 황(黃)자를 꽉 누른다는 '누를’ 압(壓)자로 풀이한다. 이것은 아이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다. 능히 종류별로 접촉해서 곁으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자문에 대한 평[千文評]>
촉류방통(觸類旁通)은 비슷한 것끼리 엮어 옆에까지 통한다는 뜻이다. 연암 박지원의 〈창애에게 보낸 답장[答蒼厓]〉란 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꼬맹이 녀석 하나가 계속 딴전만 한다. 화가 난 훈장 선생님이 이놈 하고 야단을 치자, 녀석의 대답이 이랬다. “저 하늘을 보면 파랗기만 한데, 하늘 천자는 파랗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그러고 보니 천자문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한다. 풀이하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뜻이다. 제 눈으로 보기엔 하늘은 파랗기만 한데, 천자문이 하늘을 검다고 가르치니까 배울 맛이 싹 가신다는 것이다.
계통도 없고 체계도 없는 천자문
한술 더 떠 〈춘향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춘향에게 온통 마음을 뺏긴 이도령이 책방에서 건성으로 이 책 저 책을 읽다가 방자에게 퉁을 맞는다. 얼떨결에 천자문을 집어들고 ‘하늘 천 따 지’하고 시작하자, 방자란 녀석 점잖은 도련님이 천자문이 웬말이냐고 끼어든다. 게면쩍어진 이도령이 에헴 기침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천자라 하는 글은 칠서의 근본이라. 양나라 주사봉 주흥사가 하룻밤에 이글을 짓고 머리가 세었기로 백수문(白首文)이라. 낱낱이 새겨보면 쌔똥 쌀 일이 많지야.” 방자왈, “소인 놈도 천자 속은 압니다요.” 읽어 보라 하자, 방자가 읽는다. “높고 높은 하늘 천, 깊고 깊은 따 지, 홰홰친친 감을 현, 불타졌다 누를 황.”
그러니까 방자의 대답은 바로 위에서 읽은 다산의 우려가 그대로 현실로 반영된 셈이다. 왜 검다가 친친 감는다로 둔갑하고, 누르다[黃]가 누른다[壓]로 바뀌었는가? 하늘은 검지 않고 푸른데 검다고 하니 의미의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위를 감았다고 하니 아래는 짝을 맞춰 누른다고 한 것이다. 다산의 천자문 비판을 좀더 들어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른바 주흥사의 천자문을 얻어 어린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천자문은 자학(字學)에 관한 책이 아니다. 천지(天地)란 두 글자를 배워 놓고, 일월(日月)·성신(星辰)·산천(山川)·구릉(丘陵) 같은 연결되는 글자를 다 배우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버려두고, “잠시 네가 배우던 것을 그만 두고 오색을 배워라.”고 한다. 그래서 현황(玄黃)이란 글자를 배운다. 그러면 청적(靑赤)·흑백(黑白)·홍자(紅紫)·치록(緇綠)의 차이를 구별하기도 전에 느닷없이 그치게 하고, “잠시 네가 배우던 것을 놓아두고 우주(宇宙)를 배워라.”고 한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방법이란 말인가. ‘운등치우(雲騰致雨)’라 하여 ‘운우(雲雨)’의 사이에 ‘등치(騰致)’를 끼워 넣으니, 그 종류를 능히 다할 수 있겠는가? ‘노결위상(露結爲霜)’이라 하여 ‘노상(露霜)’의 사이에 ‘결위(結爲)’를 집어 넣으니, 그 차이를 능히 구별할 수 있겠는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그때그때 뒤죽박죽으로 네 글자씩 엮어 운자에 맞춰 배열한 결과, 천자문은 전혀 계통 없고 체계도 없는 책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천자문은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주흥사(周興嗣)에게 하루 밤 안에 천자문을 지어 바치면 사면해 주겠노라 해서, 하루 밤 안에 그가 지었다는 책이다. 이 책을 완성하고는 노심초사 끝에 갑자기 머리가 세어졌다 해서 백수문(白首文)으로도 불린다. 양 무제는 왕희지의 초서 글씨를 워낙 좋아하고 아꼈다. 그래서 왕희지 글씨라면 탁본을 해서라도 모두 모았다. 하지만 천 자도 넘는 이 많은 글자를 효과적으로 기억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그래서 무제는 왕희지의 초서를 학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덟 글자마다 운자를 달아 기억하기 쉽게 만든 천자문을 주흥사를 시켜 짓게 했던 것이다. 예전에 천자문이 초서 학습의 기본 교재로 많이 활용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당나라 때 승려 서예가 회소(懷素)는 왕희지의 초서 천자문을 800번이나 임서하여 득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자문은 처음 출발부터 있는 글자를 가지고 퍼즐 맞추기 한 결과일 뿐, 무슨 거창한 철학적 이념이나 우주의 이치를 담으려 한 책은 아닌 것이다.
천자문은 초서를 익히는 교재로는 어떨지 몰라도 어린 아이들이 처음 글자를 익히는 교재로 삼기에는 문제가 많다. 위에서 든 예처럼 개념이 들쭉날쭉 할 뿐 아니라, 문장의 구조도 왔다갔다 한다.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몸가짐 이야기로 건너뛰는 등 일관성도 없다. 다른 글에서 다산은 “처음 배울 때 천자문을 읽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습속이다”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비슷한 것은 묶어내고, 곁으로 통해야
다산은 아이들에게 효과적으로 한자를 학습시키는 대안으로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을 제시한다. 비슷한 것끼리 묶어서 연쇄적으로 가르쳐 이것으로 미루어 저것까지 알게 하는 학습법이다. 다산의 주장은 명확하고 단호하다.
찰 영(盈)자의 반대는 빌 허(虛)요, 기울 측(仄)의 반대는 평평할 평(平)이다. 그런데 천자문에서는 ‘일월영측(日月盈仄)’이라 하여 ‘영(盈)’자를 ‘측(仄)'자와 짝 지웠다. 이것은 세로를 말하다가 가로에 견주는 격이니 그 비슷한 종류가 아니다. 해 세(歲)자는 때 시(時)자와 무리가 되고, 양(陽)은 음(陰)과 짝이 된다. 그런데 ‘윤여성세(閏餘成歲)’라 하고 ‘율려조양(律呂調陽)’이라고 따로 말하여 홀로 가고 동떨어져 있게 하니 그 종류가 아닌 것이다.
대저 무릇 문자를 배울 때는 맑을 청(淸)자로 흐릴 탁(濁)자를 일깨우고, 가까울 근(近)으로 멀 원(遠)자를 깨우치며, 가벼울 경(輕)으로 무거울 중(重)자를 가르치고, 얕을 천(淺)으로 깊을 심(深)을 알게 해야 한다. 짝 지워 들어서 함께 펼쳐 보여주면 두 가지 뜻을 다 통하게 된다. 반대로 하나만 말하거나 치우쳐서 얘기하면 두 가지 뜻이 함께 막혀서 아주 똑똑한 경우가 아니고는 능히 깨우칠 수가 없다.
또 무릇 형체 있는 사물과 형체 없는 정(情)은 그 종류가 다르다. 행위가 없는 정(情)과 행위가 있는 사(事)도 그 종류가 같지 않다. 강(江)·하(河)·토(土)·석(石)은 형(形)의 이름이다. 청(淸)·탁(濁)·아(雅)·속(俗)은 정(情)에 해당한다. 물 고일 정(渟)과 흐를 류(流), 떨어질 운(隕)과 솟을 돌(突)은 사(事)에 해당한다. 그 종류를 가지고 잇대지 않고서는 능히 곁으로 통하게 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다산은 대립되는 개념어를 짝 지워 가르쳐 하나를 배우는 동시에 다른 하나를 엮어서 가르칠 것을 주문한다. 또 모든 한자어를 형(形)·정(情)·사(事)의 세 종류로 나누었다. 오늘날 개념으로 따져보면 대체로 형(形)은 명사, 정(情)은 형용사, 사(事)는 동사에 해당한다.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홑글자를 가르치지 말고 비슷하거나 반대가 되는 개념들을 엮어서 가르쳐라. 둘째, 글자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여 명사는 명사끼리 엮고, 동사는 동사끼리 묶으며, 형용사는 형용사끼리 모아 글자의 성질에 따라 계통적으로 배우게 하라.
어린이를 위한 대안 교과서, 아학편
다산은 말로만 하지 않고 2천자문인 《아학편(兒學編)》을 저술해서 자기 신념을 즉각 실천에 옮겼다. 상권 1천자는 유형지물(有形之物), 즉 명사를 유별로 모았고, 하권 1천자는 물정(物情)과 사정(事情), 즉 형상이 없는 개념어나 동사 형용사를 갈래 나눠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8자마다 운을 달아 천자문의 체례를 유지하여,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차별성을 강조했다. 《아학편》은 천자문이 아동의 발달과정과 인지과정을 완전히 무시한 점을 비판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일종의 대안 교과서이다. 다산은 〈중씨께 올림[上仲氏]〉이란 글에서 자신이 지은 《아학편》에 대해, “2천 글자를 다 읽고 나면 곧바로 《시경》 국풍을 가르쳐 주어도 저절로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다산이 어린이용 학습교재 지은 책이 하나 더 있다. 《소학주천(小學珠串)》이다. 원리는 똑 같다. 그 서문은 이런 이야기로 시작된다.
촉(蜀) 땅의 아이가 고운 구슬 수천 개를 얻었다. 보고 기뻐서 품에 넣고, 옷자락에 담고, 입에 물고, 두 손에 움켜쥐기도 하며, 동쪽으로 낙양에 가서 팔려고 했다. 막상 길을 떠난 후, 지쳐서 앞섶을 헤치면 품었던 구슬이 떨어지고, 물을 건너다 몸을 숙이면 옷자락에 담았던 것이 흩어졌다. 기쁜 일을 보고 웃거나 말할 일이 있어 입을 열면 머금고 있던 구슬이 튀어나왔다. 벌이나 전갈, 살무사나 도마뱀처럼 사람을 해치는 물건과 갑작스레 맞닥뜨리면, 그 근심에서 자기를 지키려고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놓치고 말았다. 마침내 절반도 못 가서 구슬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
실망해서 돌아와 늙은 장사꾼에게 이 일을 말해주었다. 장사꾼이 말했다.
“아아, 아깝구나! 왜 진작 오지 않았니? 고운 구슬을 나르는 데는 방법이 따로 있단다. 먼저 좋은 명주실로 실을 만들고, 빳빳한 돼지털로 바늘을 만든다. 푸른 구슬은 꿰어 푸른 꿰미를 만들고, 붉은 것은 꿰어 붉은 꿰미를 만든다. 감색과 검은 색, 자주빛과 누런빛도 색깔 따라 꿰어, 남방의 물소 가죽으로 만든 상자에 담는다. 이것이 고운 구슬을 나르는 방법이다. 이제 네가 비록 만 섬이나 되는 구슬을 얻었다 해도 꿰미로 이를 꿰지 않는다면 어딜 가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게다.”
이 책은 옛 경전에 나오는 명물수목(名物數目) 가운데 실제 배움에 보탬이 될만한 내용만 추려 매 숫자마다 10항목씩 한정 지워 300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적었다.
구슬은 꿰어서 보관해야
옛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주관(珠串)’이란 구슬 꿰미란 뜻이다. 이때 구슬은 낱낱의 글자다. 자전(字典)을 옥편(玉篇)이라고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글자들을 색색별, 종류별로 나눠 하나로 꿴 것이다. 꿰미의 색깔에 따라 족류(族類)가 갈리고, 이것들은 따로 놀지 않고 한데 합쳐져 방통(旁通), 즉 옆으로 통한다. 이것이 바로 다산이 말하는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이다.
글자 하나 하나가 모여 계통적 지식을 만들고, 연쇄적 확산을 낳듯,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정보들도 갈래별로 나누고 성질에 따라 분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산은 이렇게 부연한다.
오늘날 학문하는 방법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무릇 온갖 경전과 제자백가의 책에 나오는 사물의 이름이나 많은 목록들은 모두 고운 구슬이라고 할 수가 있다. 꿰미로 이를 꿰지 않는다면 또한 얻는 족족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머리 속에 어떤 체계가 가동되고 있지 않으면 배워보았자 안 배운 것이나 다름없다. 좀체로 질서를 보여주지 않는 잡다한 정보의 덩어리들을 갈래 지워 구분하고, 등위에 따라 배열하며, 차례에 맞게 순서 지울 수 있어야 한다.
논문 쓰기와 데이터 분석도 구슬꿰기와 같아
논문을 쓰거나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도 이 구슬꿰기와 다를 것이 없다. 대개 이 과정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게 뭘까? 왜 그럴까? 어떤 의미인가? 모든 의문은 대부분 이 세 가지의 범주 속에 놓인다. 어떤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라면, 우선 무슨 현상을 분석할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분석하고, 나아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따질 수가 있다.
내 경우 논문을 쓸 때 우선 공격목표를 명확히 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 선조와 광해군 연간에 갑자기 중국 강남의 서호(西湖)의 풍경을 그린 서호도를 집집마다 거는 것이 일대 유행을 했다. 처음엔 무심히 보아 넘겼는데 문집을 읽다 보니 자꾸 관련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싶어 어느 순간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무심히 모은 것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생각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색인을 뒤지고 검색어를 쳐서 본격적으로 찾았다. 뜻밖에 관련 자료가 많았다. 아래는 당시 논문을 쓰기 전에 내가 나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들이다.
왜 서호인가?
왜 하필 선조 광해 연간인가?
어떤 사람들이 이 그림을 선호했나?
서호도 성행에 다른 배경은 없는가?
서호는 어떤 코드로 이해할 수 있나?
그 전후로 성행한 소상팔경도나 무이구곡도와는 어떻게 같고 또 다른가?
임진왜란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 속에 담긴 심리상태는 어떤가?
《서호지(西湖志)》란 책의 수입과는 어떤 관련이 없을까?
비슷한 시기 가사작품인 〈서호별곡〉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서호도 관련 시문에 보이는 공통분모는?
왜 이 풍조는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당대 문학 사조인 낭만풍과는 어떻게 관련될까?
이렇게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던지고 보니, 이 논문은 ‘왜’와 ‘어떻게’에 비중이 놓은 논문임이 명확해졌다. 그 다음은 ‘왜’와 ‘어떻게’를 따로 모아 질문을 통합했다. 문제를 단순화 시키니, “왜 선조 광해 연간에 중국 서호를 동경하는 문화 현상이 갑작스레 대두했으며,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으로 요약되었다. 그렇다면 이 논문은 크게 두 덩어리의 생각을 다루게 될 것이었다. 현상의 대두 원인과, 현상 속에 내재된 의미 분석이 그것이다. 먼저 관련 자료의 개관이 필요하겠고, 여러 방증 자료를 통해 현상의 대두 원인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과정을 거쳐 〈16,7세기 조선 문인지식인층의 강남열(江南熱)과 서호도〉란 논문을 작성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중국 장교와 우리 지식인들 간의 교유는 상당히 활발했다. 그들은 대부분 절강 출신의 수군으로 서호 근처가 고향이었다. 또 당대 성행한 낭만주의적 경향은 가보지 못한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이국정서와 맹목적 동경을 낳았다. 거기에 당대 수입된 서호의 풍광이 판화로 그려진 《서호지》란 책이 독서인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이러한 동경을 부추겼다. 이는 전쟁의 참상이 빚어낸 도피 욕구와도 맞물렸다. 이전 시기 소상팔경도나 다음 시기 무이구곡도의 성행과 견주어 보면 한국 회화사의 지적 성향을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될 듯 하다. 대개 이런 내용이 논문의 결론이었다. 자료를 수집하는데 걸린 시간은 꽤 걸렸는데, 막상 논문은 며칠 만에 탈고했다. 자료를 수집하고 생각의 갈래를 나누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 생각이 정돈되면 글 쓰는 일은 대개 손가락 아래의 일이다. 하지만 생각이 정돈되지 않으면 자료를 다 모아 놓고 몇 년이 지나도 전혀 손을 대지 못한다. 생각이 익기만을 기다리는 자료 파일들이 내게도 적지 않다.
다산은 말한다. 갈래를 나누고 종류별로 구분하라. 그렇게 해야 무질서 속에 질서가 드러난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묶어서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그저 그러려니 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아내야 한다. 계통을 확립해야 한다. 산만해서는 안 되고 집중해야 한다. 흩어져서는 안 되고 집약해야 한다. 지리멸렬, 각개격파로는 적을 물리칠 수가 없다. 일사불란하고 명약관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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