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적 지식 경영 : “단계별로 학습하라!”
1) 여박총피법(如剝蔥皮法): “파 껍질을 벗겨내듯 문제를 드러내라”
내가 비록 욕되고 고통스런 가운데 있었어도 예(禮)와 관련되는 책을 공부하는 것은 단 하루도 그만두지 않았다. 의리의 정밀하고 미묘함은 마치 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네가 왔을 때 너에게 말했던 것은 반 너머 거친 껍질이어서 근본과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생각건대 올해가 가기 전에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두 아들에게 보낸 답장〉
여박총피(如剝蔥皮)는 공부를 총피(蔥皮), 즉 파 껍질을 벗겨내듯 하라는 말이다. 파를 캐어 물로 씻고 뿌리를 자른다. 그리고는 겉을 에워싼 껍질을 벗겨낸다. 그러면 뽀얀 파의 속살이 드러난다. 이것을 썰어 국에 양념을 하고 간을 맞춘다. 파의 톡 쏘는 향취는 껍질에는 없다. 껍질은 그저 파의 속살을 감싸고 있는 걷어내야 할 군더더기일 뿐이다. 공부에도 이렇듯 한꺼풀 벗겨내야 할 절차가 있다. 다짜고짜 되는 것이 아니다.
파의 거친 껍질을 벗겨내야, 실마리 잡아
다산은 예법과 관계된 책을 연구하면서, 미묘하고 정밀한 예법의 의리를 파헤치는 것이 마치 이 파의 겉껍질을 벗겨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처음엔 자신도 껍질을 속살로 알고 붙들고 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계속 껍질을 벗겨내니 그제서야 비로소 파의 속살이 나오고, 지금껏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제들은 버려야 할 껍질에 불과한 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수많은 정보를 앞에 두고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가치 판단의 문제다. 이것이 과연 유용하고 가치 있는 정보인가? 믿을 수 있는가? 혹은 믿어야 하는가? 쓸모없는 정보를 믿고 여기에 얽매이다가는 큰일을 그르치고 만다. 가치 있는 정보를 그냥 지나쳐 흘려보내서도 안 된다. 지나놓고 보면 분명한데 그때는 아직 주견이 서지 않고, 비교할 근거가 없어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다산은 계속해서 껍질을 벗겨내다 보면, 다시 말해 하루도 끊임없이 궁구하고 살피다 보면 어느 순간 버려야 할 껍질과 먹을 수 있는 속살이 구분되는 시점이 온다고 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다산은 이때 곁에서 묻고 함께 토론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곁에 한 사람도 없으니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옛 경전의 주석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혼자만의 생각으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파의 껍질을 계속해서 한겹 한겹 벗겨나가는 것은 ‘실마리[緖]’를 잡기 위해서다. 실마리를 잡아야 얽힌 실꾸리가 풀린다. 실마리를 잡지 않고서 실타래만 들쑤셔 놓으면 나중에는 완전히 뒤엉켜서 수습할 수조차 없게 된다. 먼저 핵심 개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갈라낼 수 있다. 핵심을 잡으려면 안목과 식견이 서야 한다. 안목과 식견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 일단 옥석을 가리지 말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아야 한다. 일견 순환어법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것은 대학원생의 논문 지도를 하다보면 숱하게 겪게 되는 경험이다. 처음 단계에서 학생들은 작가나 작품 등 어떤 무엇에 대해 논문을 쓰고 싶다는 추상적인 생각만 있다. 대개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보니 재미있을 것 같다거나,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연구하지 않아서거나 하는 평범한 수준의 문제의식이다. 지도교수도 이 상태에서는 무어라 말해 줄 것이 없다. 전혀 턱도 없는 문제거나, 문제가 안 될 문제라면 다른 것을 알아보라고 하겠지만, 일단은 본인에게 내맡겨두는 수밖에 없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해결법을 제시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꼼꼼히 검토할 것과 연구의 큰 방향을 대강 일러준다. 그리고는 그가 제대로 된 문제를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터진다. 이리저리 자료를 검색해서 차곡차곡 쌓아놓고 책상 앞에 앉지만 막막하기 짝이 없다. 기존 연구 성과가 많으면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남들이 벌써 다 해놓은 것 같다. 막상 미진한 부분이나 잘못된 시각, 혹은 틈새가 보일 것도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가늠할 수가 없다. 기존 연구 성과가 없으면 없는 대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알 수가 없다. 문제에서 도대체 문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개 논문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테마를 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산 식으로 말해 ‘취서(就緖)’ 즉 실마리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머리를 들이박고 공부하고 싶은데 어느 구멍에 들이박고 파야 할지 분간이 안 선다. 그래서 조금 살펴보다가 길이 안 보이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문제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이 구멍 저 구멍 파다 말다 파다 말다 하는 사이에 제풀에 지쳐 나자빠진다.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 파악조차 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큰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 구멍 저 구멍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다. 공연히 실꾸리를 여기저기 들쑤석거려서는 점점 더 상황이 나빠져 수습할 수 없게 된다.
독서는 우물파기와 같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위백규(魏伯珪(1727-1798)는 〈김섭지에게 줌[與金燮之]〉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을 때, 능히 담긴 뜻을 깊이 궁구하지 않고, 다만 구두(句讀)와 풀이만 입과 귀로 섭렵하므로 마침내 확연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을 펼쳐 글로 지은 것도 또한 절로 이와 같게 된다. 책을 읽을 때 단지 글로 글을 읽을 뿐인 사람은 끝내 오묘한 경지에는 나아갈 수가 없다”고 했다. 책 따로 나 따로 노는, 입과 눈만의 독서를 경계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독서를 다음과 같이 우물파기에 비유하였다.
글을 지으려는 사람은 먼저 독서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물 파는 사람은 먼저 석 자의 흙을 파서 축축한 기운을 만나게 되면, 또 더 파서 여섯 자 깊이에 이르러 그 탁한 물을 퍼낸다. 또 파서 아홉 자의 샘물에 이르러서야 달고 맑은 물을 길어낸다. 마침내 물을 끌어올려 천천히 음미해보면, 그 자연의 맛이 그저 물이라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 다시 배불리 마셔 그 정기가 오장육부와 피부에 젖어듦을 체득한다. 그런 뒤에 이를 펴서 글로 짓는다. 이는 마치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짓고, 희생을 삶고, 고기를 익히며, 또 이것으로 옷을 빨고, 땅에 물을 주어 어디든지 쓰지 못할 데가 없는 것과 같다. 고작 석 자 아래 젖은 흙을 가져다가 부엌 아궁이의 부서진 모서리나 바르면서 우물을 판 보람으로 여기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김섭지에게 줌[與金燮之]〉
석자를 파면 축축한 흙이 나오고, 여섯 자를 파면 탁한 물이 나온다. 여기서 석 자를 더 파들어 가야 달고 찬 샘물을 얻을 수 있다. 이 샘물은 가뭄에도 절대로 마르는 법이 없다. 먹는 물과 빨래 물로 쓸 수가 있고, 농사 짓는 데 필요한 물로도 쓸 수가 있다. 하지만 석자만 파다 말면 고작해야 부뚜막 바르는 데나 쓸 수 있는 축축한 흙을 얻는데 그칠 뿐이다. 바른 독서는 그저 글의 껍질만 읽고 고작 축축하게 젖은 흙 얻은 데 만족해서는 안 되고,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는 달고 찬 샘물을 길어 올리는 데 미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잠깐 소나기로 땅을 깊이 적실 수 없어
이덕수(李德壽,1673-1744)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남겼다.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어야 책과 내가 융화되어 하나가 된다. 푹 젖지 않으면 읽으면 읽는 대로 다 잊어버려,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이 별 차이가 없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회오리바람이 불고 번개가 꽝꽝 쳐서 그 형세를 돕는다. 빗줄기가 굵은 것은 기둥만하고, 작은 것도 대나무 같다. 다급하기는 화분을 뒤엎을 듯 하고, 사납기는 항아리로 들이붓는 것 같다. 잠깐 사이에 봇도랑은 넘쳐흘러 연못처럼 되니 대단하다 할만 하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햇볕이 내려 쬐면 지면은 씻은 듯이 깨끗해진다. 땅을 조금만 파보면 오히려 마른 흙이 보인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연못처럼 고였던 것이 능히 푹 젖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성대히 교감하고 거세게 장마비를 내려 부슬부슬 어지러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리게 되면 땅 속 깊은 데까지 다 적시고 온갖 사물들을 두루 윤택하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푹 젖는다는 것이다. 책 읽는 것 또한 그러하다. 서로 맞춰보고 꿰어보아 따져 살피는 공부를 쌓고, 그치지 않는 뜻을 지녀, 푹 빠져 스스로 얻음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이와 반대로 오로지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만을 급선무로 한다면, 비록 책 읽는 소리가 아침저녁 끊이지 않아 남보다 훨씬 많이 읽더라도 그 마음속에는 얻은 바가 없게 된다. 이는 조금만 땅을 파면 오히려 마른 땅인 것과 한 가지 이치다. 깊이 경계로 삼을만 하다. -〈유척기에게 준 글[贈兪生拓基書]〉
또한 독서에서 푹 젖어듦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나기가 휘몰아쳐 땅 위에 갑자기 도랑이 생길 지경이 되어도, 날이 갠 뒤 흙을 파보면 금세 마른 땅이 나온다. 빨리 많이 읽기만 힘쓰고 의미를 살펴보고 따져보아 깊이 젖어들지 않는다면 소나기가 잠깐 땅 위를 휩쓸고 지나간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파의 껍질과 속살을 구분해 내려면 아홉 자 우물을 파야한다. 석자 파다 그만 두고 다른 데서 또 파려들면 부뚜막 바를 젖은 흙밖에 얻을 게 없다. 쓸데없는 파 껍질만 수북이 쌓아놓게 된다. 부단한 노력만으로도 안 되고, 꼼꼼한 정리나 관련 자료의 섭렵만으로도 안 된다. 물론 그것 없이는 더더욱 안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부하는 사람은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는 단서를 잡아야 한다. 여기에는 거듭되는 훈련과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된다.
다시 다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크게 걱정하는 것은 우리들이 모두 글이나 짓고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일이다. 산문(山門)에서 한번 흩어져 각각 제 집으로 돌아가면 아마득히 서로를 잊어버리는 지경이 될 것이다. 게다가 경박하고 행실 없는 자나, 천박하고 생각 많은 무리가 혹 잗단 재주나 말단의 기예를 가지고 효과가 빠르다고 유혹하거나, 장차 어떤 사람이 불교나 도교의 기미(氣味)를 가지고 이것이야 말로 참된 길이라고 하면, 여기에 막혀 흔들려서 스스로 게을러지고, 여기에 현혹되어 정신을 쏟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지취(識趣)가 거칠어질 뿐 아니라 도리어 진취(進取)에 방해가 된다. 반드시 바탕이 혼탁해져서 점점 밝음을 잃게 되어 마침내 쓸모 있는 학문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봉곡사에서 뜻을 적은 시의 서문[鳳谷寺述志詩序]〉 6-46
온양 봉곡사(鳳谷寺)에서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 모여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편집하는 작업을 마치고, 그곳에서 지은 시문을 모아 엮은 시집에 쓴 다산의 서문이다. 공부에서 실마리를 잡지 못하면, 그저 글 잘 짓고 많이 외우는 것이 공부인 줄로 착각하게 된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면 안 된다. 실마리를 잡는 일은 이것을 옳게 분별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공부는 내 삶을 가치 있게 향상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목적과 수단을 착각한다.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는 것은 목적이 될 수 없다. 교수가 되는 것도 목적은 아니다. 떼돈을 벌어 출세하는 것도 목적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또는 과정 끝에 주어진 결과일 뿐이다.
쓸모 있는 학문, 글 짓고 외우는 것만으로 부족
이 분간을 잘못하면 귀가 엷어진다. 쉽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데 왜 그 고생을 하느냐고 하면 금방 솔깃해진다. 그래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건너뛰어 버린다. 당장에는 남보다 빨라 보여도 결국은 더 늦는다. 분명히 될 것 같았는데 끝내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단사설(異端邪說)에 빠져 인생을 탕진한다. 이단사설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의 무능력과 불성실을 회피하기 위한 합리화의 논리가 이단사설이다. 그래서 그까짓 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할 것이 뭐 있겠냐며 파던 우물을 버려두고 딴 곳에서 새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남이 문제가 많아서 되는 일이 없다고 핑계 댄다. 이런 것이 모두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 생기는 일이다. 껍질과 속살을 구분 못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다산 같은 큰 학자도 처음에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껍질과 속살을 분간 못해 헛수고를 했다. 처음에 본 편지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번 내가 네게 목청을 돋워 이야기 했던 것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본질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파 껍질 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헛다리를 짚었다.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난번 네게 힘주어 말했던 것이 잘못 되었던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그러니 그때보다는 더 진전이 있는 셈이다. 실마리가 곧 잡힐 것 같기는 한데 될 듯 될 듯 안 된다. 되기만 하면 네게 보내 너와 토론하고 싶다.”
다산은 말한다. 문제를 회피하지 마라. 정면으로 돌파하라. 끊임없는 의문을 가지고 탐구해 들어가라. 처음에 우열을 분간할 수 없던 정보들은 이 과정에서 점차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서 실마리를 잡아라. 얽힌 실타래도 실마리를 잘 잡으면 술술 풀리게 마련이다. 더 이상 파 껍질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게 된다. 실마리를 못 잡은 채 자꾸 들쑤석거리기만 하면 나중엔 아예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손 쓸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