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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당구첩경법(當求捷徑法)

세상사는얘기/다산함께읽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10. 2. 6.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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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당구첩경법(當求捷徑法)
  글쓴이 : 정 민     날짜 : 2006-05-18 11:43     조회 : 356    

 

4) 당구첩경법(當求捷徑法) : 길을 두고 뫼로 가랴, 지름길을 찾아 가라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흘러가면 도랑이 만들어진다. 이는 이치가 그런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지름길을 찾아서 가야지, 울퉁불퉁한 돌길이나 덤불이 우거진 속으로 향해가서는 안 된다. -〈다산의 제생에게 주는 말[贈茶山諸生]〉 8-7



당구첩경(當求捷徑)은 마땅히 지름길을 구하라는 말이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하지만 다산은 공부하는 사람은 마땅히 첩경, 즉 지름길을 찾아서 가야한다고 말한다.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데, 굳이 바위로 뒤덮인 너덜이나 덩굴이 우거진 숲 속을 헤맬 필요가 없다. 지름길을 찾아가란 말은 요령을 부리란 말이 아니다. 노력을 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바른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거두는 보람은 하나도 없게 된다. 무조건 책상 앞에 오래 붙어 앉아 있는다고 공부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학원만 보내고 과외만 시킨다고 다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공부하는 머리가 터져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돌아가는 길, 알고보면 지름길


물은 가장 빠르고 신속한 길을 따라 흘러 내려 도랑을 만든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학교 공부도 그렇고 회사의 당면한 과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최적, 최선의 길이 있다. 초학들은 그 분명한 길이 보이지 않아 공연히 헤매 돌고, 산기슭에서부터 길을 잃는다. 회사에 자문역을 두거나, 학교에 스승이 있는 것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바른 길로 이끌어주기 위해서다.


다산은 초당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위해 이런 당부를 내렸다.


글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과문(科文)이 가장 어렵고, 이문(吏文)이 그 다음이다. 고문(古文)은 쉽다. 그러나 고문의 지름길을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이문이나 과문은 따로 애쓰지 않아도 파죽지세와 같다. 과문을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벼슬하여 관리가 되어도 공문서 작성에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 서문이나 기문, 혹은 비명(碑銘)의 글을 지어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몇 글자 쓰지도 않아서 이미 추하고 졸렬한 형상이 다 드러나 버린다. 이로 볼 때 과문이 정말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을 뿐이다. 

내가 예전 아들 학연에게 과시를 가르쳤었다. 먼저 한위(漢魏)의 고시부터 하나하나 모의하게 하고나서 점차 소동파나 황산곡의 문로를 알게 했다. 그랬더니 수법이 점점 매끄러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과시 한 수를 짓게 했더니, 첫 번째 작품에서 이미 여러 선생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 뒤로 남을 가르칠 때도 이 방법을 썼더니 학연과 같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위 같은 글


서양 속담 중에 “사람이 빵만 구하면 빵도 얻지 못하고, 빵 이상의 것을 추구하면 빵은 저절로 얻어진다”는 말이 있다. 주자는 “사람이 이익을 추구하면 이익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그 몸을 해치고, 의리를 추구하면 이익은 따로 구하지 않아도 절로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말했다. 다산의 논법도 이와 흡사하다.


과문(科文)은 과거 시험장에서 통용되는 문장이다. 격률의 형식이 까다롭고, 전고를 많이 사용하므로 특별한 연습과 훈련이 없이는 쉽게 지을 수가 없다. 이문(吏文)은 관리들이 행정적으로 필요한 문서에 쓰는 글이다. 체재가 엄격하고 전문 용어가 많아 여기에 밝지 않으면 쓰기가 쉽지 않다. 고문(古文)은 옛 고전에서 쓰고 있는 보통의 문장이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은 평범한 고문은 거들떠보지 않고 오로지 특별한 과문만 공부한다. 기출 문제를 뽑아놓고 모범답안을 외우고, 모의고사를 통해 답안 작성 연습을 집중적으로 한다. 선생이 붙어 답안을 검토하고, 점수를 좀더 잘 받게 하려고 첨삭지도를 받는다. 조선시대 서울의 행세하는 집안 치고 이렇게 하지 않는 집이 없었다. 다산의 처방은 좀 색다르다. 과문을 잘 하려면 고문을 먼저 익혀라. 고문을 잘 하면 과문과 이문은 저절로 된다. 하지만 과문만 잘하면 이문도 고문도 다 할 수가 없다. 과문은 과거시험 볼 때만 필요한 글이다. 하지만 고문은 죽을 때까지 계속 써야하는 글이다. 이문은 직접 쓰지 않고 아전이나 서리를 시킬 수도 있다.


과거 시험을 공부하는 아들에게 다산은 엉뚱하게 한위 시기의 고시를 먼저 가르친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그 케케묵은 옛 시를 열심히 가르치고, 계속 훑어 내려와 소동파 황산곡의 시문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그 바탕 위에서 과문을 짓게 하자 모두들 재주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과문만 가르쳤다면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산이 말하는 지름길이란 남들이 보기에는 돌아가는 길이다. 목표가 과문에 있는데, 과문은 버려두고 고문만 하라니 아무도 귀 기울여 들을 사람이 없다. 하지만 결과로 보면 다산이 옳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된다. 대학 입시에 논술시험을 잘 보려면 논술 학원에 보내서는 안 된다. 평소에 좋은 책을 많이 읽게 하고,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하고 쓰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학원에 가면 답안 작성 요령을 배울 수는 있지만,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 문제지를 받아들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평소에 많이 읽고 생각하고 써 본 학생은 어떤 문제가 나와도 걱정 없이 써낸다. 그리고 그 역량은 평생을 함께 한다.


“콩과 조는 천하에 지극한 맛이다. 쪄서 밥을 만들어도 맛있고, 볶아서 떡을 만들어도 맛있다. 또 달리 범벅이나 죽, 밀과나 엿을 만들어도 또한 모두 맛이 있다.” 다산이 〈나경의 가례집어에 써준 서문[羅氏家禮輯語序]〉에서 한 말이다. 고문의 쓰임도 이와 같다. 바탕이 되는 공부는 모두 이처럼 그 효용이 다함이 없다.


먼저 경전을 공부하고, 다음에 역사서를 읽는다

  

다산은 과문 공부 뿐 아니라 일반적 학습과정의 지름길도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제시했다. 그 기본은 선경후사법(先經後史法), 즉 경전을 먼저 배우고 나서 그 다음에 역사서를 읽는 방법이다. 앞에서 본 〈이인영을 위해 준 글〉에서 말했듯, “사서로 나의 몸을 채우고 육경으로 나의 지식을 넓힌 뒤, 여러 가지 역사서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는” 순서다. 경전 공부는 나의 바탕을 다져주고, 역사 공부는 득실치란의 변화를 이해하게 해준다. 경전이 원리를 제시한다면, 역사는 그 원리의 적용과 변화를 이해시켜준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된다. 〈두 아들에게 부침〉에서도 “반드시 먼저 경학으로 그 기초를 세운 뒤에 앞 시대의 역사를 섭렵해서, 그 득실과 치란(治亂)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에 마음을 쏟아 옛사람이 경제에 대해 쓴 글을 즐겨 보도록 해라.”고 했다.


같은 맥락의 글을 두 대목만 더 읽어보자.


《예기》 여러 편을 다 읽었으면 마땅히 《시경》 국풍과 《논어》를 읽어야 한다. 그 다음엔 《대학》과 《중용》을 읽어라. 또 그 다음엔 《맹자》와 《예기》《좌전》등을 읽고, 그 다음엔 《시경》의 아송(雅頌)과 《주역》의 계사(繫辭)를 읽어라. 그 다음에 《상서》 읽기를 마치면 《사기》와 《한서》를 읽고, 그제서야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가져다가 두 번 세 번 찬찬히 읽어 볼 수 있다. 혹 주자의 《통감강목》으로 읽어도 또한 괜찮다. -〈반산 정수칠을 위해 준 말[爲盤山丁修七贈言]〉 현대실학 278


대체로 저서의 방법은 경전의 서적을 으뜸으로 삼는다.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이 그 다음이다. 관방(關防)과 기용(器用)의 제도 같은 것도 외적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또한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자질구레하고 시시한 이야기 같은 것은 구차하게 한때의 웃음이나 취할 뿐이다. 진부하여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나 지루하고 쓸데없는 주장 따위는 한갓 종이와 먹을 낭비하는 것일 따름이다. 직접 진귀한 과일이나 좋은 채소를 심어 살았을 때의 먹고 살 도리를 넉넉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8-12


허접스런 이야기를 모아 한 때의 웃음거리나 제공하는 일, 들으나 마나 한 쓸데없는 주장을 세우는 것, 이런 것은 공부가 아니다. 그런데 골몰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농사를 지어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더 낫다.


먼저 ‘나를 위한 공부’, 다음에 ‘남을 위한 공부’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다산은 경전을 먼저 읽고, 역사서와 경제서를 통해 이를 징험하는 학습의 단계를 반복해서 밝혔다. 그는 경전과 역사 공부를 반반씩 합쳐 온전한 학문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학문에는 자기를 위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남을 위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있다. 위기가 먼저고 위인이 나중이다. 수신제가가 있어야 치국평천하가 있는 것과 같다. 경전 공부는 수기(修己), 즉 내 몸을 닦는 위기지학이다. 그것은 안으로 수렴하는 공부다. 이를 통해 바탕이 서면, 그 다음에는 밖으로 미루어 확장하는 치인(治人) 또는 안인(安人)의 위인지학으로 나아간다. 역사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공부가 그것이다.


학문은 위에서 차례차례 밟아 내려오는 상학하달(上學下達)의 공부와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공부로도 나눌 수 있다. 공부도 번지수를 제대로 알고 해야 한다. 무작정 책상 앞에 앉아 문제를 풀고 공식을 달달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수학은 하학상달하는 공부다. 덧셈과 뺄셈을 배운 뒤 곱셈과 나눗셈을 배운다. 방정식을 배우고 인수분해를 배워야 미분과 적분으로 올라간다. 의욕만 가지고 대뜸 윗 단계로 건너 뛸 수는 없다. 다음 단계를 소화할 수 있으려면 이전 단계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붓글씨는 반대로 상학하달의 공부다. 초서를 배우려면 대뜸 왕희지로 올라가서 차례로 문징명이나 왕탁까지 내려온다. 해서를 써도 구양순이나 안진경에서 시작하지 한석봉의 천자문이나 추사의 글씨로 시작하는 법이 없다. 왕희지를 충분히 익힌 뒤에 다른 대가의 것도 아울러 익혀 다양한 풍격을 갖춘다. 시학도 상학하달의 공부다. 시를 배우는 사람은 이백 두보와 《시경》과 《초사》를 표준으로 삼는다. 근대 대가의 시집으로 학습의 대본을 삼지는 않는다. 그저 참고할 뿐이다.


경전 공부는 상학하달의 공부다. 옛 경전을 먼저 읽고, 주석과 풀이를 읽는다. 원리와 본질을 먼저 알아 추기급물(推己及物)하는 공부다. 내게로 말미암아 사물로 나아가는 원심적이요 연역적 방식이다. 역사와 경세 공부는 하학상달의 공부다. 하나하나 깨우쳐 원리를 깨달아 마침내 전미개오(轉迷開悟), 즉 미혹을 돌려 깨달음에 도달하는 구심적 귀납적 공부다. 이 두 가지 공부가 앞에서 쓸어주고 뒤에서 훑어줄 때 안목과 식견이 비로소 열린다. 생각이 툭 터지게 된다. 다산은 자신의 저술도 명확히 이 두 가지 길로 구분해서 서로 섞지 않았다. 앞서 본대로 자신의 저술을 설명하면서 경집(經集)이 232권, 문집이 260권이라고 분리해서 말했다. 《목민심서》와 같은 경세의 저작은 모두 문집 속에 포함되어 있다.


바른 길, 느려보여도 결국은 더 빠른 길


다산이 말하는 지름길은 사실은 바른 길이다.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짧은 기간에 거저 먹는 방법을 지름길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름길이 아니라 망하는 길이다. 요행히 한 두번은 통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바른 길은 처음엔 느려보여도 결국은 더 빠르다. 돌아가는 길이 첩경이다. 바탕을 다지는 것이 질러가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느려보여도 초반 이후에는 그 가속도가 엄청나다.

다산은 말한다. 지름길을 찾아라. 더디 보이는 길이 지름길이다. 무슨 답답한 말이냐고 하지 마라. 해 보면 그게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맨땅에 헤딩하듯 하는 공부는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규모를 세워라. 갈림길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덤불 속에서 방황하지 않으려면, 돌밭에서 목마르지 않으려면 지름길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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