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핵파즐법(綜覈爬櫛法) : 종합하고 분석하여 꼼꼼히 정리하라
모원의가 지은 《무비지(武備志)》는 종핵(綜覈)을 다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여태 이러한 편집이 없다. 생각 같아서는 그 문목(門目)을 본떠 따로 우리나라 방비에 관한 책을 엮고 싶어 평소에 뜻을 품고 있었다. (중략) 상례(喪禮)에 대해서는 비록 이미 파즐(爬櫛), 즉 가려운 데를 긁고 엉킨 것을 빗질하듯 자세히 하였으나 우리나라의 상례는 지금껏 논저가 없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 8-13
종핵파즐(綜覈爬櫛)은 복잡한 것을 종합하여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주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질하듯 깔끔하게 정리해 낸다는 뜻이다. 다루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여기에 휘둘려서 허둥지둥 하기 마련이다. 공부하는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명징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눈앞에 펼쳐진 어지러운 자료를 하나로 묶어 종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촉류방통(觸類旁通)의 방식으로 비슷한 것끼리 갈래로 묶고, 교통정리를 하고 나면 정보 간의 우열이 드러난다. 그래서 요긴한 것을 가려내고 긴요치 않은 것을 추려내는데 이 과정이 바로 ‘핵(覈)’이다. 꼼꼼하고 면밀하게 따져서 쭉정이는 솎아내고 알맹이[核]만 남겨야 한다.
공부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그 다음은 남은 알맹이에 날개를 달아주는 과정이다. 무슨 말인지 모를 것들은 마고할미의 긴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쏙쏙 긁어주듯 명쾌하게 설명을 보태고, 어지러워 혼동되기 쉬운 것은 흐트러진 머릿결을 참빗으로 빗겨주듯 깔끔하게 교통정리 한다. 이것이 바로 파즐(爬櫛)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던 내용이 비로소 일목요연해진다. 복잡하기 그지 없던 것이 단순명료해지고, 앞뒤가 안 맞던 말이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공부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이하는 절차다. 심입천출(深入淺出)이라 했다. 공부는 깊게 들어가서 얕게 나와야 한다. 세게 공부해서 쉽게 풀어야 한다는 말이다. 고수들의 말은 쉬워 못 알아들을 것이 없다. 하수들은 말은 현란하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읽을 때는 뭔가 있는 것 같다가도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다시 다산의 말이다.
독서는 모두 방법이 있다. 세상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을 읽을 때는 구름 가고 물 흐르듯 해도 괜찮다. 하지만 백성과 나라에 보탬이 되는 책을 읽을 때는, 단락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깊이 따져 대낮 창가에서 졸음을 쫓는 방패막이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반곡 정공의 난중일기에 제함[題盤谷丁公亂中日記]〉
잘 모아 살피고, 잘 추려내야
‘단단리회(段段理會), 절절심구(節節尋究)’하라고 했다. 책 속에 담긴 이치와 만나 하나가 되고[理會], 잘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찾아 알 때까지 따져본다[尋究]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이회심구법(理會尋究法)은 종핵파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제 그 실례를 살펴보자.
김부식은 중국으로 치면 남송 고종, 고려로는 의종 때 사람이다. 삼국이 처음 일어나던 때와는 거리가 무려 1,200여년이다. 고종 때 중국의 조정(趙鼎)이나 장준(張浚)이 한나라 때 위상(魏相)과 병길(丙吉) 당시의 일을 정리하여 올릴 때 어찌 능히 상세하게 이를 말했겠는가? 하물며 우리나라의 옛 역사 기록은 황탄하고 비루하여 한 가지도 근거로 삼을만한 것이 없다. 삼한이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조차 모르는데 그밖에 것을 오히려 어찌 말하겠는가?
우리나라 일을 말하려 하는 자는 반드시 널리 중국의 역사책을 참고하여, 무릇 우리나라에 속한 것은 샅샅이 찾아 빠짐없이 담아내어, 앞뒤를 살펴 두루 통하게 하고 연대를 따져 편입시켜야 한다.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종핵(綜核)의 실상이 있게 된다. 단지 우리나라 역사에만 의거하여 억지로 책을 엮으려 한다면 사실이 누락되고 연대가 어그러지는 일이 없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일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자라면 마땅히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강역고의 첫 권에 제함[題疆域考卷耑]〉 6-204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1200년 전의 삼국시대 역사를 쓴 일은 남송 때 조정이나 장준 등이 1200년 전 한나라 선제 때 위상과 병길의 이야기를 쓴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는 근거로 삼을만한 기록이 많지 않고, 남은 것은 설화 같은 이야기뿐이다. 김부식이 우리나라 기록에만 의거하여 역사책을 엮은 결과 《삼국사기》에는 앞뒤가 안 맞고 표현이 부적절하며, 연대가 잘못된 것이 적지 않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역사를 쓰려면 우리 쪽 기록 뿐 아니라 중국의 기록도 꼼꼼히 살펴 종핵(綜核)해야 한다고 다산은 말했다.
앞서는 종핵(綜覈)이더니 여기서는 종핵(綜核)이다. 핵(覈)은 낱낱이 파헤쳐 꼼꼼히 따져 끝장을 보는 것이다. 핵(核)은 핵심이니, 종합하여 핵심만 추려낸다는 뜻이다. 의미는 둘 다 같다. 종합은 흩어진 것을 모으고, 핵심은 중요한 것을 추린다. 모으기만 해서는 안 되고 잘 추려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종핵인가? 같은 글에서 다산은 김부식이 범한 오류의 실례를 이렇게 종핵한다.
백두산 줄기는 몽고 땅에서부터 남쪽으로 1천 여리를 내달려 백두산이 되었다. 이 큰 줄기의 동쪽 땅에 별도의 한 지역이 있어 다른 곳과 서로 섞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우하은주(虞夏殷周) 때는 숙신(肅愼)이라 했고, 한나라 때는 읍루(邑婁)로 불렀다. 당나라 때는 말갈(靺鞨)이요, 송나라 때는 여진(女眞)이니, 오늘날에는 오랄영고탑(烏喇寧古塔)이라고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이미 한나라 선제(宣帝) 때 멀쩡하게 말갈이란 이름이 있다. 이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이렇다. 북적(北狄)을 삼대 때는 훈육(葷粥)이라 했고, 한나라 때는 흉노(匈奴), 당나라 때는 돌궐(突厥), 송나라 때는 몽고(蒙古)로 불렀다. 종류는 비록 같지만 명칭은 통용하기가 어렵다. 한나라 역사를 정리하는 자가 돌궐이 쳐들어왔다고 쓴다면 입을 막고 크게 웃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크게 잘못된 대목이니, 덮어 가릴 수가 없다.
말갈은 당나라 이후에나 사용된 명칭인데, 한나라 때 일을 말하면서 말갈이라고 말했다. 고대의 역사 기록을 보면 이렇게 사실 관계가 맞지 않거나 맥락이 닿지 않은 내용이 한 구 가지가 아니다. 삼한(三韓)만 해도 마한 진한 변한이 구체적으로 한반도의 어느 지점에 위치했는지조차 분명치가 않다.
다산은 유배지의 빈곤한 사료만으로 《아방강역고(我邦疆域攷)》를 정리했다. 그의 방법은 중국 쪽의 한반도 관련 기록과 우리의 고대사 기록을 하나하나 맞춰보고 대조해서 종핵파즐(綜覈爬櫛)하고 이회심구(理會尋究)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다산의 논의가 모두 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귀양지의 부족한 문헌과 오늘날처럼 근거가 되는 출토 유물이 전혀 없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가 했던 작업의 선구적인 가치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의문난 것은 밑바닥까지 다 캐내야
종핵파즐법의 또 다른 실례를 하나 더 들어본다.
내가 수년 이래로 자못 독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저 읽기만 하면 비록 하루에 천번 백 번을 읽는다 해도 안 읽은 것과 같다. 무릇 독서란 매번 한 글자라도 뜻이 분명치 않은 곳과 만나면 모름지기 널리 고증하고 자세히 살펴 그 근원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차례차례 설명하여 글로 짓는 것을 날마다 일과로 삼아라. 이렇게 하면 한 종류의 책을 읽어도 곁으로 백 종류의 책을 함께 들여다보게 될 뿐 아니라 본래 읽던 책의 의미도 분명하게 꿰뚫어 알 수가 있으니 이 점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사기》의 〈자객열전〉을 읽는다고 치자. ‘조(祖)를 마치고 길에 올랐다(旣祖就道)’라는 한 구절을 보고, “조(祖)가 뭡니까?”하고 물으면, 선생님은 “전별할 때 지내는 제사다”라고 하실 것이다. “하필 할아버지 조(祖)자를 쓰는 것은 어째서인가요?”라고 물으면, 선생님은 “잘 모르겠다”고 하시겠지. 그런 뒤에 집에 돌아오거든 사전을 뽑아다가 조(祖)자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아라. 또 사전을 바탕으로 다른 책으로 옮겨가 그 풀이와 해석을 살펴, 뿌리를 캐고 지엽을 모은다. 또 《통전(通典)》이나 《통지(通志)》, 《통고(通考)》 등의 책에서 조제(祖祭)를 지내는 예법을 찾아보고, 한데 모아 차례를 매겨 책을 만든다면 길이 남는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전에는 한 가지 사물도 모르던 네가 이날부터는 조제의 내력을 훤히 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비록 큰 학자라 해도 조제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은 너와 다투지 못하게 될 테니 어찌 크게 즐겁지 않겠느냐? 주자의 격물(格物) 공부도 다만 이와 같았다. 오늘 한 가지 사물을 궁구하고, 내일 한 가지 사물을 캐는 것도 또한 이처럼 시작하는 것이다. ‘격(格)’이란 밑바닥까지 다 캐낸다는 뜻이다. 밑바닥까지 다 캐지 않는다면 또한 유익되는 바가 없다. -〈학유에게 부침[寄游兒]〉
공부를 하다가 모를 말과 만나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완전히 알 때까지 끝장을 보라는 이야기다. 조제(祖祭)는 고대에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비는 제사다. 워낙 교통이 험하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조(祖)자를 쓰는 것을 보고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그저 조상에게 안녕을 비는 거겠지 생각하고 말면 안 된다.
자전에서 ‘조(祖)’자를 찾아보면 뜻밖에 ‘길 제사 지낼 조’라는 뜻이 나온다. 풀이를 찾아보면 “고대에 먼 길을 떠날 때 행로신(行路神)에게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도 할아버지 조자를 쓰는 까닭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여기서 한 번 더 나가야 한다. 더 자세히 찾아보면, 먼 옛날 황제의 아들 누조(累祖)가 여행을 좋아하다가 길에서 죽었다는 기록과 만나게 된다. 조(祖)란 조상이 아니라 바로 누조의 귀신을 위로하기 위해 생긴 제사임을 그제서야 알게 된다. 마음이 후련해진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조제는 어떤 방식으로 지냈을까? 이것은 역대 여러 종류의 제사 지내는 방법을 적은 《통전》이나 《통지》 같은 책을 보고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을 참고해보니 그 제사지내는 형식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이런 공부의 과정을 목차를 세워 작은 책자로 정리하면 아주 훌륭한 자료가 된다. 예를 들면 고문헌에 나오는 조제의 용례, 조제란 명칭의 의미와 유래, 역대 기록을 통해본 조제의 방법과 변화가 각각의 챕터가 될 것이다. 이런 학습의 과정을 통해 나는 조제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가 될 수 있다.
처음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익숙해지면 하루에도 한 가지씩 이런 작은 책자들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다. 다산은 이것을 격물(格物) 공부로 설명했다. 격물(格物)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물의 의미에 대해 끝장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격(格)’은 ‘바룬다’는 말이다.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를 주섬주섬 추려서 아래 위로 탁탁 추스르면 들쭉날쭉 하던 종이들이 가지런하게 모인다. 탁탁 추스르는 것이 바로 격(格)이다. 이를 달리 말한 것이 바로 파즐(爬櫛)이다.
모르던 것을 깨치는 동안 앎이 쌓이고 삶이 나아지고
격물을 통해 앎으로 나아가는 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다. 조제의 의미를 따지기 위해 사전을 찾고 이 책 저 책 뒤지는 동안 나는 《사기》의 〈자객열전〉만 읽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제사 제도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옛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허투루 지나치기 쉬운 것들 속에 깊은 의미가 간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르던 것을 하나씩 깨쳐나가는 동안 앎[知]이 내 안에 축적되고, 그 앎은 단순한 지식[知]를 넘어서 지혜[智]가 된다. 다산에 따르면 격물치지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 할 지를 아는 것이다. 바깥 사물을 격물치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치를 따져 내 삶 속에 깃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을 일러 궁리진성(窮理盡性)이라 한다.
격물치지와 궁리진성,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완성된 인격을 추구한다.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나가고, 그 속에 깃든 이치를 따져 내 삶을 향상시켜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부하는 보람이요 기쁨인 것이다.
다산은 말한다. 복잡하다고 기죽지 마라. 갈래를 나누고 무리를 지어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종합해야 한다. 그 다음은 옥석을 가릴 순서다. 하나하나 꼼꼼이 따져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차례 지우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변별하며, 먼저와 나중을 자리매김 하라. 그리고 나서 누가 들어도 귀에 쏙 들어오도록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헝클어진 것을 빗질해 주어라.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는 것이 공부다. 남들은 못 봐도 나는 보는 것이 공부다.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를 통해 내 삶이 송두리째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 공부다. 마지 못해 쥐어짜며 하는 공부 말고, 생룡활호(生龍活虎)처럼 펄펄 살아 날뛰는 그런 공부가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