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기도하는 대통령, 믿을 거는 교회뿐
[정문순 칼럼] '나'를 잃어버린 개인들과 한국 교회, 열린 자세 아쉬워
정문순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들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 걸 보며 웃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군중 속의 고독’을 절감하게 된다. 음악과 교감하며 즐기는 일을 혼자 하지 못하고 굳이 떼로 모여서 해야 하는 마음을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집단 속에서 노래를 즐길 때는 혼자 듣거나 부를 때의 고유한 색깔은 버려지고 모두가 똑같은 수준에서 공감할 수 있는 평준화된 감각만 작동하게 될 것이다. 나만 누릴 수 있는 고유한 느낌을 버리는 건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나 같은 사람에게 노래는 철저히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개인 분화가 덜 된 탓인지 노래마저 집단으로 부르고 듣고 즐겨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나라에 유래가 없는 노래방 문화는 ‘다 같이 노래하자’ 사고의 산물일 것이다.
혼자서 뭔가를 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집단주의 병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개인을 지워버렸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행동도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어 집단을 물고 가는 것이 예사다. 개인이 집단의 위력에 의존할 때 그 개인은 전체의 일개 부속품의 지위로 떨어지는 길밖에는 없다.
이주민 출신 박노자 교수가 보기에는 나한테 노래 부르기만큼이나 집단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도 행위였다. 그가 기도는 섹스처럼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는 행동이라고 단정 지었을 때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는 의아함이 들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지나칠 것이 없는 말이었다. 과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도는 교회에 가서 하거나 남들과 함께 해야 되는 일인 줄 안다. 무리 지어 손잡고 교회를 나가지 않고도 혼자 성경에 심취하며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건 믿지 않는다. 하늘을 시샘하듯 뻗어 올라가는 교회일수록 혼자 공부하는 신자는 기독교인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교회가 휴대용 화장지를 붙여 뿌리는 광고지에는 기독교를 믿어도 교회에 열심히 나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라고 되어 있다.
기도가 신과의 대면에서 자신을 숨김 없이 온통 드러내는 일이 분명하다면, 이처럼 내밀한 종교 행위를 남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면구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신과의 만남과 합일에 자신 말고 남이 끼어들 틈새가 조금이라도 있겠는가. 만남이니 합일이니 하는 것은 모두 성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말이다.결국 종교 행위나 성교나 뿌리를 캐면 다를 것은 없다. 남들이 보는 데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마저 똑같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간다. 신이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증거도 없는데, 오히려 한꺼번에 동시에 접신할수록 ‘기도발’이 먹히기 힘들 것 같은데 왜 종교 행위는 공개적으로 남들 보란 듯이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남들 보는 데서 하면 기도가 더 잘 될까.
신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행위는 남들이 굳이 관심을 가질 일도 아닌 자신만의 것이다. 신에게 갈구하거나 기원하는 내용은 사람마다 같을 수가 없다. 그건 골방이나 어둠을 찾아야 어울리는 일이다. 예수가 여러 사람을 떼로 모아 기도하자고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기도는 역시 광야나 고원 같은 외로운 곳에서 혼자 하는 게 제격이다.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기도를 공개적으로 하는 건 대중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한국 교회는 이것을 모른다.기도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보여주거나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공개 기도를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혼자 성경 공부하면서 마음이 동할 때 기도하기보다 교회와 목사에 의지하는 신도는 신과의 단독적인 만남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느 종교, 어느 교단, 어느 교회에 소속된 일개 구성원의 자격으로서만 신과 만나기를 바란다. 광야에서 어느 것에도 의지할 수 없는 혼자가 아닌 집단 속의 누군가가 되어야 안심이 될 것이다.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 대한 구애를 강하게 느끼고 자신이 교회를 위해 존재함을 인정받고 싶어할수록 기도의 목청은 높아지고 몸짓은 요란해지고 과장될 것이다. 시끄러운 통성기도와 요란한 몸짓은 깊은 신앙심의 표현으로 착각된다. 그건 기도가 아니라 교회 주최의 신도 단합대회 수준에 불과하다.
한 나라 대통령이 특정 종교를 열심히 숭배하는 모습을 온 국민에게 보여줄 때 그 종교와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적지 않겠지만, 교회에 좋게 보이지 않으면 안되는 그의 정신 세계는 교회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편협하고 허약한 사람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은 국민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더라도 한 줌이라도 확실한 지지자를 챙기고 그들의 환호에서 용기를 얻는 태도는 시골 면장 지위라도 갖춰야 할 자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정치인이기를 포기함으로써 정치의 생명줄을 붙들려고 했다. 이해관계가 각양각색인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일은 귀찮고 어려운데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국민까지 챙기고 싶은 생각은 그에게 없다.
그가 진정 정치인이었다면 기도 장소로 청와대 지하 벙크를 택할지언정 벌건 대낮에 만인이 지켜보고 있는 곳을 고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국민과 맨몸으로 만나기를 포기하고 교회의 방패막이에 숨어서 교회를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편협한 집권자의 모습을 특정인만이 할 수 있는 돌출행동으로 보기는 무리일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울타리가 되어줄 기독교인의 맹목적 지지에 버티고, 다종교 국가의 행정 수반임을 망각하고 특정 종교집단을 대변하는 자로 스스로의 지위를 추락시키는 것을 정치라고 믿는 집권자의 불행은, 집단과 연고에 의존하여 개인을 내치는 한국 사회의 토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슬림들은 장소와 상관없이 몸을 댈 천조각만 갖추면 그 위에서 기도를 한다.해 지는 어느날 잡동사니가 곳곳에 널린 건물 옥상에서 낙조를 향해 절을 올리는 몇 명의 무슬림들을 보았을 때, 평범했던 주변 풍경도 일순간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본 일몰 풍경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그들에게 기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두터운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교회가 있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곳이 곧 교회이자 성소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무작정 빗장만 닫아걸지 말고 이런 모습만큼은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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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4/20 [11:27] 최종편집: ⓒ 대자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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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꿇은 MB, 누구에게 기도한 것인가? | |||||||||||||
[시론] 대통령의 기도는 은밀히 해야하지 홍보나 과시로 하면 안되는 것 | |||||||||||||
특정종교가 주최한 행사장에서 일국의 대통령 MB가 무릎을 꿇었다. 이런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후 무릎 꿇고 고개 숙인 MB의 사진은 갖가지 추측과 변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아마 이 사진은 대한민국 통치사나 세계 종교역사에도 주요한 자료로 기록될 것이다. 이유는 그 사진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종교도 상징체계로 구축되어 있다. 그럼 왜 무릎꿇은 MB의 사진이 반발을 불러일으킬까? 상징 지향성의 차이 때문이다. 종교의 상징은 항시 ‘속俗’과 분리된 ‘성聖’을 지향한다. 이게 진실이든 아니든 일반인은 적어도 종교란 그러해주기를 기대한다. 사회의 한 구성요소로 종교의 역할은 일상의 가변적 가치기준에서 벗어나 비일상적이고 영구적 가치기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기대를 안고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이해타산적 세상에서 벗어나 잠시 모두가 평안하고 모두가 존중받으며 차별없는 낙원같은 경험을 누리고 싶어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 낙원은 비폭력과 사랑이 충만한 곳이다. 이런 낙원 향수nostalgia for paradise 때문에 세속사회는 종교가 청빈하고 희생적이며 모범적이라 믿으며 추종한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한국 종교의 다수는 물량적성장의 일환으로 ‘힘의 과시’를 노골화하고 있다. 여기에 환멸을 느낀 신자들이 무신론자로 돌아서고 있다. 성직자들이 퍼붓는 강론의 많은 부분이 내 종교, 내 모임에 천당 보내 주는 힘, 부자 되는 힘, 출세시켜주는 힘이 있음을 과시하며 신도 늘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이처럼 성스러워야 할 종교가 속된 힘을 추구하면 할 수록 종교의 힘은 약화된다. 이는 한국뿐아니고 기독교 국가였던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 현상이며 이에 따라 지구적으로 무신론자의 비율이 점차 늘고 있다. 2011년 국가 조찬기도회장에서 벌어진 대통령의 '무릎 기도해프닝'도 이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촉매가 되고 있다. 종교가 ‘성’을 추구하지 않고 ‘속’과 야합해 이룬 어떤 성과도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고 만다. 코엑스에서 무릎꿇은 MB의 모습도 국민들은 겸손히 신의 뜻을 받들려는 통치자로 받아들이질 않고 ‘힘을 추구’하는 세속화된 종교인의 모습으로 받아 들인다. 언제나 종교의 상징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변화되거나 변질된다. 그 상징이 초자연적인 것의 실마리를 제공하면 긍적적으로 변화되고, 세속화를 자극하면 변질된다. 아마도 그날 행사를 주최한 측이나 MB는 겸손히 신에게 무릎꿇고 기도했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국민대다수가 그날 MB의 무릎은 신이 아닌 특정종교단체에 항복했다고 받아 들이고 있다. 국민대대수와 장로대통령과 그 축근들사이에 왜 이런 인식의 괴리가 생겼을까? 아마도 MB가 종교는 ‘속’이 아닌 ‘성’을 지향해야한다는 점을 망각했거나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히 성서에도 ‘은밀한 기도’를 부탁했다. 예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툭하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회당이나 큰 거리에 서서 나팔을 불듯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이런 말씀을 했다. ‘너는 기도 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는 광고도 아니고 홍보도 아니고 자기과시도 아니다. 은밀히 보시는 신과의 내밀한 교통이다. 이런 기도라야 사심없이 ‘그 나라와 의’를 이루는 신령과 진정한 기도가 될 것이다. 카메라 팍팍 돌아가고 온 국민이 바라보는 코엑스의 열린광장에서 신령과 진정의 기도가 쉽게 나올까? 그런 기도란 형식적 의례에 그칠 가능성이 크고 이 때문에 다수의 국민들은 MB의 무릎기도를 종교의 ‘성’성이 결여되고 극히 세속화된 홍보성내지 교계 결집용 액션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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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3/16 [03:24] 최종편집: ⓒ 대자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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