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疏)와 통(通) 합쳐야 비로소 ‘소통’이다
[논단] MB식 어법은 국민에 ‘이해’ 강요, 국민에 대한 예의 아니다
강상헌
이대통령의 어법(語法)에 문제가 있다. 논점(論點)의 차이에 대한 차분한 궁리를 담지 않고, ‘열정으로 설득하면 왜 내 진심을 왜 몰라주겠는가’하는 식으로 듣는 이에게 납득을 강요하는 전근대적 소통법 말이다. ‘내 말은 옳고, 진심이며, 애국적인데 왜 너는 알아듣지 못하는가’하는 투의 발언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면 된다’의 박정희 식이나 보리 싹을 잔디로 (위장해) 납품한 기발(奇拔)하기 짝이 없는 정주영의 ‘현대’ 식은 당시에는 (결과적으로) 절실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이미 변했다. 전근대적 구태의연(舊態依然)의 발상법을 거듭 국민에게 ‘소통하겠다’고 내민다면 이는 억지다. 듣는 이들 서운하다. 모두 생각 깊은 어진 인격(人格)들이다.
대통령과 그 주위의 인사들은 소통의 ‘소(疏)’ 글자만을 들고 소통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그랬다. 보도들을 인용한다.
...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가 신공항 백지화에 유감을 표하고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데 대해 기자회견에서 "지역구인 고향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또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것도 (박 전 대표가) 아마 이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문제를 (나와 박 전 대표 사이에) 크게 마찰이 생겼다, 충돌이 생겼다고 신문에서 보도는 안 하셔도 된다."면서 "이 문제는 입장에 따라서 조금 견해를 달리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이 일을 직접 집행하는 입장에서, 나 하나 편하자고 (편한 결정을 하고) 그냥 떠나면 된다."면서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피해는 다음 세대에 입는다는 것을 알면서,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상대(박 전 대표)의 견해를 간단히 ‘지역구를 의식한 정치적인 발언’으로 결론 냈다. ‘내(대통령) 입장’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것이라는 생각의 발언이 이어졌다. 신문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도하면 인 될 것’이라는 의중(意中)을 드러냈다. (해당 지역민을 포함한) 국민에 대해서도 ‘내 결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대통령의 뜻’이 갖는 무게를 고려한다면 이 ‘의중’은 (다소) 고압적(高壓的)이다. ‘고압’을 담지 않았더라도 듣는 이들에게 ‘내 말 이해 못 하면 서운해!’하는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생각이 그렇더라도 표현은 수많은 국민의 다양한 시각(視覺)을 고려했어야 했다. 나라의 대표인 대통령의 발언은 ‘친(親)국민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종교관 얘기는 꺼내지 않으려 한다. 또 ‘사대강’(四大江)도 그렇고, 원자력 안전에 관한 정부의 언급, 이번의 동남권신공항 문제에 관해서도 필자는 여기서 견해 표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와 그 주변 인사들이 펼치는 언설(言說)에 대한 우려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疏)는 상소문(上疏文)이란 말에서 보듯, 또 ‘물 흐르는 모양’의 글자 모양이 가르쳐주듯,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명복(冥福)을 잘 챙겨달라고 부처님 명부(名簿)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이르기도 한다. 일방통행(一方通行)의 의사표현이다. ‘진심을 알아달라.’는 것은 ‘소’다.
트인다는 ‘소’ 곁에 통(通)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통은 말 그대로 ‘통한다’는 뜻이다. ‘통하였느냐?’라는 철 지난 유행어로도 감(感) 잡을 수 있지만, 이 말은 ‘오고 간다’는 뜻이다. 비로소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이 완성된다.
통(通)의 바탕글자 중 하나인 용(甬)은 원래 청동기 시대에 손잡이 달린 종(鐘)을 그린 글자에서 시작돼 관(管) 또는 곡식을 담아 재는 저울 역할 용기(容器)의 뜻을 가지게 됐다. 이제 그 뜻은 통(桶)이란 말로 바뀌었다. 사전은 ‘몸 둘레가 둥글고 속이 비어 있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속은 왜 비어있나? 담기 위해 비어있다. 원래 뜻인 종의 이미지를 그려봐도 그렇다. 비어있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날 것 아닌가?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언설이 소(疏)일 수는 있되, 통(通)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을 역사 오랜 문자학(文字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머리 속은 꽉 채워 남의 생각 들어올 여지를 아예 막고, 남에게 ‘이해하라’고 하는 어법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슬픈 얘기지만, 과거 암흑시대에는 ‘그런 말씀’에 모두 숨죽이고 바짝 기어야 했다.
생각이 말로 드러나는 것이다. 말 때문에 시비(是非)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말을 말거나, 말을 잘하거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생각은 트이고 또 통해야 한다. 그게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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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4/09 [06:02] 최종편집: ⓒ 대자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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