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박 종 국
혹자는 지금 우리의 행복지수 86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생활환경이나 태도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높아졌다고 말한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뭉텅했던 국민의식이 다방면에 걸쳐 세련되게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무엇보다 스스로 질서를 지키려는 마음이 앞서고, 남을 위하려는 마음이 도타워졌다. 덕분에 거리가 활기차고, 어딜가나 낯찌푸리는 일이 적어졌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은 피부에 와 닿는다.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전국 방방곡곡 ‘붉은 악마’의 물결로 하나가 되었던 그 자리, 그 뒤끝을 생각해보면 확연하게 달라졌다. 근래 1700백만 촞불집회는 민의의 완숙의 표출이었다.
우리 스스로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며 한데 뭉치기를 좋아한다. 그뿐이랴. 조그만 일에도 신명을 함께 풀만큼 거리감이 없다. 누구나 어깨를 나란히 하면 서로 스스럼없는 친구가 된다. 좋다면 간이라도 빼주어야 직성이 풀리고, 속내를 쉬 감추지 못한다. 아무리 감당 못할 흉허물이라고 해도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그냥 덮어주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우리 삶은 까다롭게 시비를 걸거나 이리저리 잣대를 대며 눈을 치켜 뜰만큼 용렬스럽지 못하다. 이는 생긴 그대로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눈감으면 코 베 간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이 됐다. 누구나 바쁘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 온통 ‘빨리빨리’만 난무하고, 여유를 갖고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다. 그런 탓에 사소한 일 하나도 너그럽지 못하다. 그러니 자연 ‘네 탓이다’는 손사래에 익숙해지고, 일마다 불협화음이 꼬리를 문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넋두리가 아니다. 어쩌면 현대를 사는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난마(亂麻)가 아닐까.
어젯밤 평소 살갑게 지내는 친구가 가슴이 답답하다며 전화를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도 잡듯이 간청했다. 그는 법이 없어도 살만큼 사람이 좋다. 마음 씀씀이도 너그럽고 몸이 날래고 싹싹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요즘은 운전대만 잡으면 입이 거칠어지고,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된다고 했다. 인간이 양면성을 지녔다지만, 그가 교통질서를 어기고 커다란 사고를 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데 그가 교통사고를 냈다고 한다(그는 그게 단지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변명했다). 순간,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일로 혼자 일때면 발작을 하거나 불안해서 힘이 든다고 했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는 이상 꼭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고 하루 종일 불안에 시달려서 살 수가 없단다. 매사 자신이 없고 했다.
“요즘 누나와 여동생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어. 그래서 나한테도 여러 가지 불안 증세가 겹쳐서 나타나. 또한 그 일로 긴장하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몸 전체가 뻣뻣해져. 숨이 막히고 어지러워. 이런 일은 2년 전부터 시작되었어. 특히 날씨에 따라 그 증상이 더 심해. 귀가 먹먹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비행기를 탈 때 너무 불안해. 힘 빠지고, 온몸에 마비가 와. 터널 속에서 차가 멈춰 서면 괜히 불안해. 좁은 공간에서는 더욱 그래. 힘 빠지고, 두근거리고, 가슴도 쪼여들어. 그래서 협심증인가 싶어 검사를 받아보았으나 이상이 없다고 해. 그런데도 어떤 일이 생기면 갑자기 어지럽고, 가슴이 뛰고, 체한 듯 손발이 싸늘해지며, 손발이 마비가 돼. 혹시 이러다가 쓰러지는 게 아닌가, 못 일어나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돼. 항상 긴장이 되며 사람 많은 곳엔 못 가. 답답한 곳에는 더욱 그래. 건강에 걱정이 많아 텔레비전 보기가 겁나.”
친구는 분명 ‘공황장애’(恐慌障碍 panic disorder; 공황panic이란 말의 어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사람들을 갑자기 놀라게 만들었던 팬신에서 비롯됨)다. 공황장애는 평소에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공황발작 증상이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흔한 발작증상은 숨이 막히는 듯 하며, 어지럽고 졸도할 듯한 느낌이 들고, 맥박이 빨라지거나 심장이 마구 뛰거나 손발이 떨리고 땀이 난다. 또 숨이 막혀 질식할 듯,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심지어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엄습하게 된다. 이 병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신과에서도 처음에는 이 병을 심리적 원인에서 오는 불안신경증의 좀 심한 형태로만 생각했었고, 미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의사들이 대부분이다. 이 병의 원인과 치료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건 1980년대 초부터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런 고통을 자신만이 겪는다고 불안증이라거나 노이로제이거니 생각했다. 그렇기에 공황장애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 병은 대단히 흔한 병으로, 적게는 전인구의 약 1%, 많게는 약 5% 이내가 공황장애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증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기고 있거나, 다른 질병이라고 믿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공황장애는 치료는 물론, 완치가 얼마든지 가능한 병이다. 공황발작이 처음 시작될 때 정확한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면 많은 환자가 약물치료만으로도 쉽게 완치된다. 공황장애의 치료제로서 가장 먼저 사용된 약은 이미프라민(imipramine)이다. 그러나 이미프라민은 치료를 시작해서 일정한 용량까지 약을 늘린 뒤에도 약 3주가 경과해야만 뚜렷한 치료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단점을 가졌다. 그 후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된 약이 자낙스(알프라졸람, Alprazolam)로, 자낙스는 약을 복용해서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짧고, 공황발작을 억제하는 효과 외에도 예기불안 등 심리적인 불안감도 효과적으로 완화시켜 주기 때문에 현재는 공황장애 치료약물 중 가장 먼저 선택되는 약물로 되었다.
일반적으로 공황장애에 대한 약물치료를 시작하면 공황발작은 늦어도 2-4주 후면 현저히 없어지지만, 약을 끊은 후에도 증상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약 6개월 정도는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 한 가지 중요하게 알아두어야 할 점은 만약 환자가 임의대로 약을 복용하거나 중단할 경우에는 치료도 제대로 되지 않을 뿐더러 습관성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 때문에 반드시 정신과 전문의의 처방과 지시에 따라 약물치료가 시행되어야 한다. 약물치료를 받는 경우에는 가벼운 불안발작이 계속되는 경우가 흔한데, 이것은 전형적인 공황발작이 아니고, 심리적으로 공황발작에 대한 공포증이 생긴 환자가 사소한 자극이나 회피하고 싶은 상황에 노출될 경우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안발작인 경우가 많다.
공황장애가 대한 치료가 늦어져서 이미 공포증이 매우 심해진 환자들에게는 약물치료 외에도 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한다. 환자들이 오해하거나 잘못 믿는 여러 가지 편견들을 바로 잡아주는 인지적 치료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장소나 상황에 불안감 없이 접근하도록 도와주는 행동치료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 공황장애의 치료는 이와 같이 진단과정에서부터 치료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다각적인 공황장애 치료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최상의 효과를 기대한다. 이 경우 전체적인 치료 성공률은 최저 60%에서 최고 90% 이상에 이른다고 보고되었다.
공황장애의 진단기준(미국 정신의학회, APA)은, 누구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실제로 큰 위험이 닥친 상황도 아니고, 여러 사람의 관심의 초점이 된 장소에서 연설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상황도 아닌데, 예측할 수 없었던 공황발작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경우가 한번 이상이다. 이런 공황발작이 한 달 동안 네 번 이상이거나, 공황발작이 나타난 후 또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한 달 이상 지속적으로 느낀 경험이 있다면 ‘공황장애’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한 시간 남짓 긴 통화로 친구의 목소리는 젖었다. 단순히 불안하거나 신경증도 아닌데, 그는 매사 불안하고 무력증에 빠져 산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이 많다 싶었다. 그는 누나가 불치의 병을 얻었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매형 때문에 분개했다. 그것이 지독한 인간정리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살면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서로 인연을 달리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상대방이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해서 내팽개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자폐’를 겪는 사람한테 너는 자폐아라고 말 할 수 없듯이 심각한 마음의 공항(panic)을 겪는 친구에게 네가 옳으니 그르니 지청구할 수가 없었다. 다만 충분히 공감하며 경청할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마음 다져살라고 했지만, 내내 가슴이 아렸다. 누구보다도 심신이 건강했던 그였기에 한층 더 애달다. 그가 공황장애의 긴 터널을 능히 헤쳐 나오도록 신심을 다해야겠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이 많다. 따사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잘 챙겨보아야겠다.
박종국 2017-3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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