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안의 자식 품 밖의 자식
박 종 국
“선생님, 우리 아이가 말을 안 들어요. 어찌나 고집이 센지 제 생각대로 하려고 해요. 작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6학년이 되니 아이 행동을 걷잡을 수가 없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올해 6학년 사내아이를 둔 어머니의 하소연이다. 아이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부모로서 크게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하루 종일 일터에서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예전과 다른 아이의 행동을 보고 참 섭섭하단다.
부모자식 간에 얼마나 흉허물 없이 대화할까? 또 휴일에 자녀와 목욕탕에 함께 가는 빈도는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거다. 딸내미의 경우 엄마랑 동행하는 게 쉽겠다. 그렇지만, 사내아이는 그렇지 않다. 데면데면해서 쉽게 대화가 끊긴다. 그러니 혼자 가겠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댄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 아이는 그렇게 대화를 끊어먹지도 않고, 목욕탕에 함께 가는 걸 주저하는 편도 아니다. 오히려 같이 가기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궂김 없이 자라 심성이 곱게 부드럽다.
요즘 세상, 자녀가 올바르게 성장하기만 해도 부모는 만족한다. 여태껏 아들과 나는 말도 잘 섞였고, 어떤 일이든 눈이 맞았다. 너무 닮은 데가 많아서 좋았고, 미운 구석이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부자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관계 설정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였다. 그만큼 나는 아들에게 처방을 챙겨주거나 가르치지 않았고, 충고하거나 명령하는 등의 타성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가슴으로 품고 사는 딸 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무리 어렸을 때 ‘품안의 자식’이 귀엽다지만, 언뜻 자라 사춘기에 접어들면 자식은 어느새 ‘품 밖의 자식’이 된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앞에 두고 조심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어려움에 처한 상태를 곧바로 벗어나게 도와주고, 벗어나게 처방해 주고픈 조급함이다.
아이의 문제는 어른의 눈으로 보면 당장에, 뻔히 해결할 문제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렇게 뻔해 보이는 해결책 이라도 부모가 서둘러서 처방해주고, 가르치고, 충고하고, 명령하는 타성에서 손을 툴툴 털어야한다.
아무리 자식이 하는 일이 철딱서니가 없는 짓이더라도 여유를 갖고 기다려 주어야한다. 권위적인 통제를 하는 부모 밑에서는 정형화된 자식은 나와도 창의적인 인물이 나올 수 없다.
그렇기에 아이가 스스로 제 문제를 헤쳐 나가는 모습을 옆도 아닌 뒤에서 지켜봐 주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그게 다 자란 자식을 ‘품안의 자식’에서‘품 밖의 자식’으로 배려하는 새로운 힘의 관계설정이 아닐까.
숫제 말로 아이하나 바르게 키우려면 온동네 사람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곁가지 난 자식을 바로 잡으려면 그만큼 절박한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아등바등 안달한다고 해서 아이 행동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느긋하게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게 자식을 건사하는 부모의 도리다.
초등학교 6학년 사내라면 이미 품안의 자식이 아니다. 내게 강변하는 엄마가 그 사실을 바로 인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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