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1500만 시대
박 종 국
뭔 얘기냐구? 엊그제 산책하면서 뉴스를 들으니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500만 시대가 됐다고 한다. 설령 뉴스보도가 아니어도 주변에 반려동물이 많다. 특히 개를 키우는 가정이 흔하다. 예전 같으면 고작 개와 고양이 정도가 집지킴이겸 반려동물이었으나, 요즘은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반려동물 인구는 약 1,50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4가구 중 1가구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셈이다. 이중 강아지가 598만 마리, 고양이가 258만 마리로, 반려동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반려동물'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의미로, 인간에게 주는 여러가지 혜택을 존중하며, 애완동물은 사람의 장난감이 아니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1983년 10월 27~2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처음으로 제안된 용어다.
예전에는 일반적인 반려동물로 강아지와 고양이를 가장 많이 떠올렸다. 그런데 요즘에는 특이한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많다. 강아지와 고양이만큼 토끼도 많이 기른다. 크기가 조그마한 미니토끼가 한 때 유행하여 토끼를 기르는 사람도 많았다. 토끼와 비슷한 이유로 기니피그와 햄스터 등도 귀여움을 받는 동물이다. 이 외에도 반려동물은 뱀, 햄스터, 페릿, 라쿤, 물고기, 이구아나 등 여러가지다.
이는 반려동물을 '또 하나의 가족'으로 여기는 펫팸족(Pet+Family)이 생기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증가한 결과다. 그만큼 세상은 반려동물의 건강과 생활용품에 대한 관심 또한 뜨겁다. 요즘은 펫팸족을 넘어서 펫셰프족까지 등장했다. 펫셰프족은 반려동물의 건강을 위해서 수제 사료와 간식을 구입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유통업계는 이 같은 점에 주목하여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분주하게 움직인지 오래다.
필자는 불과 3년까지만해도 집안에서 그 어떤 동물을 키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개와 고양이라면 그 자체부터 싫어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가 동네 어른들의 모꼬지 술안줏거리가 되었던 아픈 기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동물사육 자체가 싫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그때, 춘궁기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고 어렵사리 모내기를 마치고나면 농촌은 그야말로 자루한 농한기였다. 아직 모는 땅심을 받지 못하고 햇평아리 주둥이마냥 노릿노릿해서 할 일이 없었다. 농촌에서 일손을 놓는 때는 딱 두 계절이었다. 오뉴월 맹천과 동짓달 혹한. 그 즈음 농투사니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투전을 하거나 군입거리에 눈을 사렸다.
그때 보리타작과 모내기로 쇠잔한 육체에 그만한 단백질 공급원이 바로 황구, 똥개였다. 물론 소돼지가 으뜸이었으나 가난한 소작인 주제에는 감히 넘겨볼 게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쉬운 게 황구를 잡는 게 능사였다. 당시 필자 집에는 소와 돼지, 닭을 적잖이 길렀다. 개는 집지킴이로, 쥐를 몰아내기 위해 고양이도 키웠다. 그리고 그 당시 농촌에서는 특별나게 토끼와 거위도 길렀다. 필자는 그게 또래에게 두고두고 자랑거리였다.
한데, 어린 필자가 결정적으로 개를 꺼려했던 사단은 그때 불거졌다. 당시 필자는 베이붐세대로, 어려운 경제사정땜에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사정은 열악했다. 한 학년 한 반이 육십명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교실이 부족하여 한 교실에 두 학년이 동거하는 오전오후반 수업이 일반화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마침 오전반 수업을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 감나무 아래 평상 위에 동네 아저씨들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보기만해도 군침이 도는 고기를 뜯는 중이었다. 선걸음으로 기웃대는데 이미 고기와 술로 불콰해진 아저씨가 고깃살덩어리가 뭉텅한 갈빗대 하나를 집어줬다. 마침 점심도 굶은 터라 받자말자 단숨에 먹어치웠다. 그 맛이 쫄깃하고 희안했다.
그런데 채 다음 갈빗살을 베어물었을 때 좌중에 오고간 이야기가 어린 필자를 경악케했다. 손에 든 그 고깃살이 바로 아침나절까지 소 풀 뜯으러 동행했던 우리집 누렁이였다! 어린 마음에 울며불며 누렁이를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누렁이가 마당가에 장작불 지핀 가마솥에서 팔팔 익혀 그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정들었던 누렁이는 단지 여름철 한낱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 쭉 필자가 지천명의 나잇살을 가질 때까지 그 어떤 동물을 길러본 적이 없다. 그보다 더러 몸보신한다며 보양탕을 즐겨먹었다.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베베라는 애칭으로 한 세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여배우이자 동물애호가였던 브리지뜨 바르도가 "개고기를 식용으로 하는 한국인은 야만인이다"고 성토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면서도 데면데면했다. 그만큼 누렁이에 대한 아린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사람이 그렇게도 변했던 거다.
그랬던 필자가 3년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강아지 푸들을 곱살맞게 키우기 시작했다. 푸들 '행자'(행복하게 자라라의 준말 애칭)와의 만남은 전혀 얘기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행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강아지를 키우는 상식이 전무했던 조막손만한 행자를 두고 전전긍긍하며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잠자리와 돌봄손끝이 달라짐에 불안한 행자는 시도때도 없이 율부짖었고, 배변도 가리지 못했다. 그야말로 복에도 없는 늦둥이 하나 건사하랴 아내는 낮밤을 바꿔 살았다. 궁하면 동한다고 했던가? 어언 3년이 지난 지금은 행자도 어엿하게 자랐을 뿐만 아니라, 적요한 삶의 활력에너지를 안겨주는 귀염둥이 식구가 되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뜬금 없다며 눈살 찌푸리기도 할 테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다. 행자를 키워보니 삶의 활기가 유다르다. 반려동물은 섣부른 생각만큼 혐오스럽지 않다. 문제는 어떻게 어떻게 돌보느냐에 달렸지 무조건 꺼려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는 처지라 층견소음 문제로 민원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키운다. 또한 길거리나 공원에 데리고 다닐 때 배설물로 꺼리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행자와 동행할 때면 꼭꼭 목줄과 배변 가방을 들고 다니며 뒷처리를 말끔하게 한다.
만에 하나 번려동물을 키우면서 뭇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는 이미 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다. 행자는 정기적으로 각종 예방접종을 빠트리지 않고, 먹이도 소금기를 제외하고 먹여 배변 냄새도 각별히 신경을 쓴다. 게다가 행자 위생에 관한 한 목욕은 나보다 더 애살맞게 챙긴다.
그럼에도 며칠 전 우리 아파트에 살던 어느 가구가 이사를 가면서 애써 키우던 강아지를 나몰라라 내다버리고 떠났다. 오죽하면 그랬을까싶어 일면 사정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 심사가 참 고약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유기견 신세로 떠도는 강아지가 많다. 그들이 무슨 잘못일까? 야심한 밤 배고픔에 처절하게 우는 저 개와 고양이는 쉬 잠들지 못한다.
사람이 얼마나 무심한지.
|박종국에세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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