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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사회의 명암

세상사는얘기/다산함께읽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21. 6. 1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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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사회의 명암


박 원 재 (율곡연구원장)

 

올해는 결단코 혼자 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더구나 코로나19 방역 때문에 대행서비스도 예년과 달리 65세 이상 어르신과 장애인에게만 제공된다니, 아직까지는 나라에서 나를 ‘젊은이’로 공인해주는구나 하는 뿌듯함(?) 속에서 컴퓨터를 켜고 도전을 시작했다. 유튜브에 널려있는 고수들의 조언을 길잡이 삼아 어렵게 마침표를 찍었다. 근데 뭔가 찜찜하다. 매번 일정 금액을 환급받았는데 이번에는 소액이긴 해도 더 내야 한단다. 좀더 확실하게 알아보라는 아내의 채근에 거금 10만원을 주고 ‘전문가’에게 의뢰했다. 결과는 더 내야 한다는 금액보다 열배 남짓 환급이다. 남는 장사를 했으니 전문가에게 맡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무력감은 뭘까? 지난달 있었던 종합소득세 신고 때 이야기이다.

 

어떤 무력감

 

그동안에도 몇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중도포기하고 세무서의 면대면 대행서비스를 이용하곤 했다. 그러면서 이런 것도 혼자 못해내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온라인을 이용한 일상 처리가 힘들기 시작하면 늙는 것이라는데 하는 우울감과 그래도 명색이 ‘박사’인데 일반 국민 대상의 온라인 서비스도 이용할 줄 모른다니 하는 자괴감이 체증의 정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박사’라고 하면 모든 부문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박사(博士)’의 한자가 ‘넓을 박(博)’ 자를 쓰니, 딱히 그른 기대도 아닐 성싶다. 하지만 그런 기대에 어긋나기라도 하면 “박사님인데 그것도 모르세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데는 계면쩍지 않을 요량이 없다.

 

 

외람된 말이지만, 나 같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평균 이상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점점 일상화되어 가는 전문 영역의 서비스를 이용할 때면 종종 앞서와 같은 무력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먼저 부딪치는 것은 용어의 낯설음이다. ‘과세표준’이니 ‘이월결손금차감’이니 ‘세액공제감면’이니 ‘누진공제’니, 이걸 다 이해하려다 보면 그야말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이 곤경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세무사에게 그냥 맡기는 것이다.

 

또 하나의 양극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렇듯 조금이라도 깊이 있는 일들은 일반인이 엄두를 내기 어려운 구조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어떤 일이든 전문가 그룹이 등장하여 처리하면 효율성은 배가될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가 꼭 긍정적이기만 할까? 적어도 두 가지 우울한 전망이 있다. 첫째, 대중은 과정에서 소외되고 결과만 누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일견 편리해 보이지만 삶이 다른 사람의 손에 매이게 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둘째, 과정에 대한 대중의 그런 무지를 토양으로 전문가 그룹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카르텔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의사가 써주는 처방전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죽으라는 약인지 살라는 약인지 알 수가 없다. 약사라는 또 다른 전문직의 손을 빌려야만 된다. 이른바 ‘지배적 전문직(dominant professions)’ 계층의 출현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사(士)’ 자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이들 지배적 전문직은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법적, 관행적 권한에 의거하여 자기들만의 ‘필요’를 만들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제도를 발명한다. 나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그것을 강제할 것인가도 결정한다. 그 결과 일반사람들은 변호사나 세무사나 의사를 통하지 않고는 그 분야의 일을 아무것도 처리할 수 없는 심리적 불구의 상태에 놓인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예전에는 ‘피’를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말’은 먹고 산다. ‘말’의 본질은 소통이다. 지배적 전문직들이 구축하는 카르텔은 이 소통을 방해한다. 양극화는 경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양극화와 언어의 양극화! 평등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깨어있는 의식으로 풀어가야 할 또 하나의 과제이다.

 


글쓴이 / 박 원 재
· 율곡연구원장
· 전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동양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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