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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의병

박종국에세이/시사만평펌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23. 8. 19.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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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의병



백승종



19세기 후반이 되자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서구열강의 침략이 가시화되었다.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략)와 신미양요(1871년 미국 함대의 침략)를 겪으며, 이 나라의 식자층은 분명히 깨달았다. 서세동점의 추세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조선 사회는 마치 거대한 파도에 떠밀려 난파하는 한 척의 조각배가 되었다.

서구열강은 근대식 살상 무기를 동원하여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그들로부터 개항을 강요당했고, 뿌리칠 힘이 없었다. 열강과 불평등 조약이 맺어졌고,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이권을 빼앗겼다. 나중에는 메이지 유신(1868)으로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을 거둔 일본까지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려 덤벼들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조선의 선비가 일어섰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선비는 구국의 의병운동을 전개하였고, 온 마을이 선비의 부름에 따랐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된 농민이, 죽음을 무릅쓰고 선비와 함께 투쟁의 길에 함께 나섰다.

그들과 달리 성리학적 사회질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동학의 기치 아래 뭉쳤다. 그런데 자세히 따져보면 동학의 밑바탕에도 성리학의 정신이 흘렸다. 동학의 종지(宗旨)로 우리가 이해하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은 성리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동학을 세운 최제우(崔濟愚)는 성리학자 최옥의 자제였고,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적 교양을 착실히 쌓은 한 사람의 선비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 그리고 손화중 등도 모두 선비의 후예였다. 그들도 동학에 입도하기 전에는 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 훗날 동학을 이어받은 증산교 측에서는 최제우의 동학이 지나치게 성리학(유교)에 기울었다고 비판할 정도로, 성리학과 동학 사이에는 동질적인 면이 같았다.
  
선비가 나라를 살리고자 창의(倡義)를 외치자 마을 사람이 뒤따라 일어섰다는 점이 중요하다. 조선 사회의 특징이 바로 그 점이었다. 선비도 농민도 가치관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많은 선비가 농민의 신망을 여전히 잃지 않았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국에서는 선비와 농민이 함께 하는 의병운동이 많았고,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최익현이었다. 그는 제자 임병찬 등과 함께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평일에는 무기를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그들이 무장투쟁을 일으켰으니, 그들의 싸움은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라 도덕심의 투쟁이었다. 그들은 살고자 일어선 게 아니었다. 오직 죽음으로써 신념을 지키고자 했으니,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1906년(광무 10) 윤 4월 11일,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죄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그 상소문에서 최익현은 자신을 막다른 길에 세울 수밖에 없는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나라 안팎의 도적이 합세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강제로 (개항이라는) 조약을 맺어 침탈을 강행하였습니다. 이제 나라가 존재한다는 말은 허울에 지나지 않고, 폐하가 계시는 자리도 허위(虛位)에 불과합니다. 종묘와 사직은 보전할 길이 없고, 민생은 어육(魚肉)이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릴 뿐입니다. (……) 그런데도 역적은 적(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우롱을 감수하며 이렇게 둘러댑니다.

‘일본에 외교권을 잠시 빌려주었다가 우리가 부강하게 되면 다시 찾을 것이다.’ 아, 저 왜놈이야 어차피 마음과 행실이 짐승 같은 오랑캐이니 인간의 도덕으로 꾸짖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적놈은, 국가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기어이 나라를 망치고자 이처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을 저지른다는 것입니까?”

알다시피 1905년에 조선왕조는 일본의 협박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채 ‘을사늑약’을 맺었다.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하루아침에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은 나라의 대신이면서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매국의 죄를 지었다. 최익현은 그들을 통렬히 규탄했다. 최익현은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는 선비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만약 하늘이 내린 재앙을 (우리가) 뉘우치지 않아,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저들에게 짓밟히게 된다면, 신은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장차 저는) 사나운 귀신이 되어 원수 놈의 오랑캐를 모두 없앨 겁니다. 맹세코, 저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을 결심입니다.”

운이 기울면 의병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최익현은 선언했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일본에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때 최익현의 나이는 74세였다. 최익현은 자신의 말대로 그해에 의병을 일으켰고, 거사가 실패하자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자신의 말을 끝까지 행동으로 실천했으니, 의로운 선비였다.

의병투쟁에 사실상 무슨 승산을 바랐겠는가.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최익현은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눈물로 맹세하였다.

“(역적들이 스스로) 저들의 노예가 됨을 즐거워하며, (도리어) 대의를 세운 우리를 원수처럼 여겨 (제 놈들끼리 앞을) 다투어 (우리) 의병을 비도(匪徒: 도적 떼)라 부르며 헐뜯겠지요. 그런다 해도, 신은 그런 짓을 (털끝만큼도)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매국노는 우리 의병을 ‘비도’라고 헐뜯었다. 그러나 큰선비 최익현은 자신에게 도적 떼의 누명이 씌워진다 하여도 목숨을 바쳐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런 마음이 어찌 최익현 한 사람만의 일이었겠는가. 황량한 저 들판에서, 깊은 산골짜기에서 이름 없이 쓰러져간 의병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미관말직에도 합류하지 못한 채 평생을 고생하며 산 이 땅의 가엾은 농부였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처자식을 버리고 스스로 죽음의 대열에 합류한 무명의 보통사람이었다. 이것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수만 수십만을 헤아리는 평범한 가장이 그때 그렇게 비장한 선택을 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구차하게 남의 노예가 되어 살기보다 차라리 떳떳하게 죽기를 바랐다. 우리 역사에 이런 엄숙한 순간이 존재했다. 죽음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서는 차마 함부로 단행할 수 없는 운명의 선택이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성리학의 역사적 결실이요, 선비의 문화적 역량을 증명하는 좌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오직 붓과 책만 숭상하던 선비였고, 그들의 교화로 순후한 인심을 자랑하던 우리의 농민이었다. 그런데 외적이 침입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그들은 손을 맞잡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을 펼쳤다. 비상한 의기요 애국심의 표현이었다. 이것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만약에 그들이 성리학의 충과 열과 효를 몰랐어도 이런 운동을 하였을까. 마을에 서당도 없었어도, 문자를 배울 길이 없었더라도 이처럼 의로운 집단적 행동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조선의 보수성만 탓할 게 아니라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멀리 시간을 거슬러 임진왜란 때를 돌이켜보아도 그러하다. 방방곡곡에 “충의지사(忠義之士)”, 즉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가 있었기에 의병도 일어났고, 죽음을 무릅쓴 훌륭한 장수가 나왔다. 지금 내가 사는 평택의 선무 제1등 공신 원균 장군도, 그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여러 아우와 이들 및 조카도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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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엄중한 누란지기 시국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이어서 옮겨왔습니다.

#백승종 교수님 글입니다.

|페친 조성민 교수님 페이스북에서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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