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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사람도 있고, 짐승만도 못한 사람도 있다.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5. 9. 6.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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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사람도 있고 짐승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
[칼럼]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 발표에 부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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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없는 독립전사 영령을 진혼하고자 세운 항일무명영웅기념비(중국 연변대 뒷산).
ⓒ2005 박도
"오늘의 잣대로 그때를 재지 말라."

5공 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불려나온 '5공 실세'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명언을 남겼다. 곱씹을수록 명언이다.

나는 이 말을 빌려 오늘 이 시점에서 친일파를 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맞아죽어야 하는 3대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제로 그랬다.

일제와 맞서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은 선열들

나는 지난 99년부터 중국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항일유적지를 세 차례 답사했다. 우리 선열들은 나라를 찾겠다고, 후손들을 왜놈의 종이 되게 할 수 없다고 고국의 문전옥답과 집을 버리고 영하 30∼40도의 북국 벌판을 헤매면서 일제와 맞서다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맞아서 죽었다. 어떤 분은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일제의 생체 실험도구로도 쓰였다.

그러나 당신들이 이렇게 몸바쳐 찾은 조국의 모습은 어떤가. 지난해 8월 16일, 의병정신선양회(회장 윤우)가 광복절 기념행사로 주최한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항일전적지 순례에 동참했다.

왕산 후손들도 참석했는데, 국내에 살고 있는 후손과 마침 러시아에서 광복절 해외동포 초청으로 잠깐 귀국한 후손들은 초면이라 윤우 회장이 한 사람씩 소개시키면서 “여러분, 이게 독립운동가의 현실입니다”고 울먹였다. 그때 여야 대표는 모두 골수 친일파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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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 후손은 풍비박산, 친일파 후손 여야 대표



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100년만의 귀향'

올 광복절을 앞두고 MBC 심야스페셜 8.15 특집 <100년만의 귀향>을 꼭 시청해 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내용인즉 왕산 선생 막내 아들의 막내인 허블라디슬라브가 중앙아시아를 떠돌다가 할아버지 순국 100년만에 한 중소기업 배려로 3년간 고국에 취업하기 위해 귀국, 키르키즈스탄에서 가져온 아버지 산소 흙을 할아버지 산소에 끼얹는다는 것. 허블라디슬라브의 형 허게올르기는 아직도 물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러시아의 한 움막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가 생긴 뒤 처음으로 순국, 교수형을 당한 그 할아버지가 금오산 뒷자락에 누워 손자들이 세계 뿔뿔이 흩어져 사는 걸 보면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과연 이 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이 땅에는 정의와 진실, 양심, 도덕이 있는지 물을 터이다.

광복이 된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친일파 청산이냐고 반문하거나 이젠 그 말에 신물이 난다고 외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 청산 문제는 과거 문제가 아닌 오늘의 문제요 내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외세에 빌붙어 사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되레 자랑스럽게, 그 후손조차도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어찌 정의와 양심, 도덕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정의와 양심이 없고 도덕적이지 못한 집안은 망하고 만다. 사회와 나라도 마찬가지다.

친일파 청산은 때를 놓친 게 사실이다. 친일파 인사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은 역사의 기록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것은 이 나라의 최소한 양심이요, 오늘을 사는 백성 된 최소한 도리이기도 하다.

▲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2004년 1월 19일 서울 느티나무카페에서 친일인명사전 성금 5억원 모금달성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2004 권우성
어떻게 모은 겨레의 성금인가

8월 29일 경술국치 95돌을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 1차 명단을 발표한다. 이 편찬사업에 쓰는 돈은 어떻게 모은 겨레의 성금이던가.

2003년 말, 국회예결위원회 예산조정 과정에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데 필요한 예산 5억원이 삭감됐다. 이에 2004년 1월 7일 <오마이뉴스>는 "다 떨어진 헌 고무신짝을 부여잡고"라는 칼럼을 실었다. 이 칼럼이 촉매제가 돼 국회예결위 처사에 분노한 네티즌들이 불길을 지피고, 그 불길이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당초 2004년 8월 15일까지 5억을 모으려던 예상을 깨고 모금 11일 만에 목표액이 초과됐다. 그 뒤 공식적인 모금을 중단했는데도 성금이 답지, 3만 명에 가까운 참여자가 7억 5천여만원을 보내줬고 '겨레의 눈물어린 성금'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성원으로 착착 진행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방해세력 또한 만만치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국민화합을 방해하는 사업이라는 등, 과거에 얽매이는 사업이라는 등, 친일대상 인사들은 허물도 있지만 공이 더 많았다는 등, 딴죽을 걸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세력이 있다. 대부분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친일 후손 세력이거나 신판 외세 의존세력의 방해 공작임은 뻔하다.

친일 후손들로서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였다면 그대들이 그동안에 누린 부와 권세는 어림도 없었을 게다. 이제까지 호의호식한데 부끄러워하라. 허물보다 공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후손은 친일인명사전에 그 공도 함께 기록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라.

▲ 2004년 1월 19일 저녁 <친일인명사전> 편찬성금 5억달성 기념행사에 참가한 시민들.
ⓒ2004 오마이뉴스 남소연
민주국가에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무덤 속의 친일역적 무리에게 부관 참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판단자료로 남겨야 한다. 이나마 일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지나쳐 버리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선열에 크나큰 죄를 짓게 되고 나라의 정신문화는 나락의 길로 떨어질 것이다.

당신이 왜놈 후손이 아니고 이 나라 단군의 후손이라면,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보태주지는 못할지언정 방해하지는 말라. 만일 조상의 친일로 부끄러움을 깨달았다면 조상의 죄를 대신 사죄하고 근신하면서 살아라. 진정으로 참회하는 이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용서'라는 미덕을 베풀 것이다.

짐승도 벌레도 제 집을 해치면 목숨을 걸고 지킨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사람다운 사람도 있고 짐승이나 벌레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될지 짐승이나 벌레보다 못한 사람이 될지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은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짐승이나 벌레로 살 것인가.
2005-08-29 01:39
ⓒ 2005 OhmyNews
애국자 후손은 풍비박산, 친일파 후손 여야 대표
[현장]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후손들이 서로를 몰라본 사연
텍스트만보기   박도(parkdo) 기자   
▲ 망우리 13도창의군탑을 참배하는 의병정신선양회원과 왕산 후손들
ⓒ2004 박도
서로 몰라보는 독립투사 후손들

지난 16일 의병정신선양회(회장 윤병석 전 인하대 사학과 교수)에서는 광복절 59주년 기념행사로 마지막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선생의 항일 전적지인 경기도 연천 일대와 남북분단의 현장인 휴전선 답사행사를 가졌다.

행사 첫머리에 망우리 소재 '13도 창의군탑(十三道倡義軍塔)' 참배에는 의병선양회 회원, 광복회 회원 및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여럿이 모여 왕산 선생을 추모했다.

이 모임에는 왕산 후손들도 참석한 바, 마침 러시아에서 광복절 해외동포 초청으로 일시 귀국한 왕산 선생의 증손녀 미라씨와 기라리이샤씨도 참석하였다. 그날 국내에서 참석한 왕산 선생의 다른 증손들과는 모두 초면이라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날 행사를 주관한 윤우 의병선양회 부회장이 이들 한 사람씩 소개를 시키며 서로 인사를 시켰다. 윤 부회장은 "여러분, 이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현실입니다"고 말씀하면서 울먹였다.

▲ 13도 창의군탑에서 처음 만나는 후손들. 왼쪽부터 러시아에서 온 왕산 증손녀 미라, 기라라이샤, 윤병석 회장, 외손 이항증, 권영조, 증손 허윤, 증손부 이민씨를 목발 짚은 윤우 부회장이 울먹이며 서로 인사시키고 있다.
ⓒ2004 박도
사마귀가 수레를 막듯 일으킨 의병

왕산 선생께서 옥중에 있을 때 일본군 소장 아카시가 왕산 선생의 애국심에 감복하여 목숨만은 살리고자 회유하였다. 그러자 왕산 선생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 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사마귀가 수레를 막듯,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카시 소장이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든 사람을 안마하는 것과 같다. 지체를 쓰다듬을 때에 비록 한 차례 고통은 있어도, 마침내 병을 낫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산 선생은 상 위에 있는 겉은 붉고 속은 푸른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언뜻 보면 붉은 빛인데, 안팎이 아울러 붉은 빛인가? 너희 나라가 한국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다"라고 크게 꾸짖었다.

또 일본 심문관이 "의병에 앞장 선 자가 누구이며 대장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이에 왕산 선생은 "앞장 선 자는 이토히로부미요,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하면서 "이토히로부미가 우리 나라를 뒤엎지 않았더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앞장 선 자가 이토히로부미다"라고 답하여 심문관의 말문을 닫게 하였다.

▲ 태풍전망대에서 휴전선을 바라보는 왕산 후손들. 왼쪽부터 허벽, 허윤 증손 부부 외증손녀 러시아 동포 기라리이샤, 미라, 외손 권영조씨
ⓒ2004 박도
그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정오 왕산 선생은 서대문 감옥이 생긴 후 최초로 교수대에 올랐다. 일본 중이 주문을 외우며 명복을 빌자 "충의로운 귀신은 저절로 하늘 나라에 오른다. 설령 지옥에 떨어진들 어찌 너희들의 천도에 의지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그리고는 담담히 운명하셨다.

왕산의 옥사 후 구미 임은동 허씨 일족들은 고향에서 일본 헌병과 순사, 밀정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1915년 만주로 야반 도주하다시피 망명길에 올랐다.

▲ 왕산 허위 의병부대의 주활동무대 연천 임진강
ⓒ2004 박도
몇 해 전 필자는 당시 성균관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장세윤 교수와 왕산 허위 선생의 임은동 생가와 후손들을 탐방하였다. 고향의 생가는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고, 임은 허씨 10여 가구 중 허호씨만이 홀로 고향땅을 지켰다. 만주로 망명했던 왕산 후손들은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연전에 미국에 거주하는 왕산 손자 허도성 목사가 일시 귀국하여 만났더니 임은 허씨 후손들이 그새 '일리야' '부로코피' '슈라' '나타샤'가 되었고, 당신 후손마저도 머잖아 '로버트 허' '벤허'가 될 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이 날 망우리 현장에서 만난 왕산 증손자 손녀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얼싸안고 눈물로 대화할 뿐이었다. 날마다 교통방송에 나오는 '왕산로'의 지명 유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왕산 선생과 동향인 필자도 중국에 가서 제대로 함자와 왕산로의 유래를 알았으니 다른 이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광복 60년이 다가오는 현 시점에도 여야 대표가 모두 친일파 후손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엊그제 망우리에서 본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만나는 장면이 떠올라 울고 싶은 마음을 이 글에 담아 보았다.

▲ 폐허가 된 구미시 임은동 왕산 생가 터
ⓒ2004 박도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투쟁의 등불"
금오산 도립공원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문'

▲ 왕산 허위 선생
ⓒ독립기념관
(아래는 금오산 도립공원 들머리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문>으로 필자가 다소 첨삭하였다...필자 주)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1855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1896년 왜적은 날로 모진 이빨을 드러내 우리의 주권을 앗아가니 선생은 책을 덮고 선비의 매운 서슬을 떨쳤다.

그해 3월에 격문을 사방에 날려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을 거쳐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깃발이 충청도 진천 땅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해산하라는 고종 황제의 왕명을 받들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흩었다.

1899년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도도한 탁류 속의 한 가닥 맑은 샘으로 넘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밝고 넓은 경륜을 펼쳤다. 그러나 기둥 하나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받치기에는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의 침략은 한층 심해지고 반역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병에게 잡히어 넉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그 후 선생은 경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는 삼도봉 아래 숨어서 각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서 두 번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강화 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합 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그 군사장이 되었다. 적 침략의 거점인 통감부를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병들이 약속한 시간에 닿지 못하자 선생이 몸소 300여명의 결사대만 거느리고 동대문 밖(현 망우리)까지 쳐들어가 고군분투하다가 패퇴하였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다.

1908년 경기도 연천군 유동에서 왜병에게 잡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렸다는 말인가!

그해 10월 21일 54세를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이 가시고 말았다. 선생은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
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2004-08-18 15:28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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