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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컴퓨터 앞에서 '쩔쩔매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3. 4.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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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아침 (Dmitri Shostakovich - Jazz Suite Waltz II) - 안치환
고장난 컴퓨터 앞에서 '쩔쩔매다'
문명과 기계에 얽매인 현대인의 삶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신아연(ayounshin) 기자   
며칠 전, 느닷없이 컴퓨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다 써 놓은 글을 꺼낼 방도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육필원고'를 써야했다. 사실 말이 거창해서 '육필원고'지, 고작 A4용지 한 매 정도를 채울 '잡문'을 쓸 뿐인데도 글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까봐 걱정이 앞섰다.

위드프로세서로 처음 글쓰기를 할 때 '기계와의 상견례'가 도무지 어색해서 이 화상과 앞으로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하고 난감했던 기분이 역전된 상황이었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평소엔 그렇게 나긋나긋하게 인간의 요구를 척척 들어주던 것이 무슨 심통인지 한번 앙탈을 부렸다하면 시치미를 떼며 도무지 요지부동인 것이 바로 컴퓨터가 아닐까.

본체 이상도 아니고 도무지 화면이 열리지 않으니 이거야 원, 얼굴을 봐야 대화를 할 게 아닌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기계와 싸움박질을 할 수도 없고 .

대하소설만 쓰는 어떤 이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수십 년 동안 육필로 작성하는 동안 오른쪽 어깨부터 목줄기, 손가락 끝마디까지 걸릴 수 있는 병은 다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작가에게 수작업이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업적'임에 분명하지만, 기계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소인배로서는 컴퓨터를 마다하고 직접 메우는 글쓰기를 한다고 하면 이내 미련한 짓으로 생각되는 것을 어쩌랴.

그런데 컴퓨터로 일을 할 때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은 이따금씩 다 써놓은 글을 몽땅 날려버리기라도 하면 도무지 머리 속에서 재구성이 잘 안된다는 점이다.

결국 두뇌의 명령을 전달받아 손끝에서 직접 쓰여지는 글과, 피가 통하지 않는 기계와 주고 받은 거래 방법의 차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내 경우에는 원고지에 직접 옮긴 글은 기억의 순서를 되짚어가면서 재생을 시켜내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편리성과 효율성에 많은 부분 가치를 부여하고 즐겨 의미를 찾는 것에 익숙해 있는 처지에서 이처럼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그야말로 셧다운이 된다는 점에서 편리함의 이면에 도사린 같은 양태의 불편함을 겪는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컴퓨터가 고장나기 몇 주전에는 정전으로 인해 비슷한 당혹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밤 10시 무렵, 쓰고 있던 컴퓨터가 '퍽' 하고 꺼지면서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깃들인 집안은 한마디로 올스톱 그 자체였다. 전등은 물론이고 전기를 사용하는 스토브에는 물 한잔도 끓일 수 없었다. 심지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차고문도 전기 없이는 꼼짝도 하지 않으니 자동차를 꺼내 빛을 찾아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기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문명과 기계에 얽매어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원해서, 선택적으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다를 뿐 우리 모두는 각종 문명의 이기에 짓눌려 살아가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 새삼 느꼈다.

한국의 유명 작가 중 한분은 단 하루라도 전화없이 살아보려고 일부러 코드를 뽑아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까짓 것, 옛날에는 이런 것 없이도 잘만 살았는데 제깐 게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전화 없는 날' 을 선포하니 그 해방감이 묘하기조차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웬걸, 반나절쯤 지나자 먹통인 전화통에 흘금흘금 눈이 가더니 울릴 리 없는 벨소리가 기다려지지를 않나, 나중에는 환청까지 들리는 것 같아 공연히 조바심이 일더라는 것이다.

급기야는 뿔뿔이 흩어져 사는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만 같고, 그래서 자신을 찾는 전화가 애타게 걸려오지 않을까 싶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이번에는 전화를 걸어 별일 없는지 챙기고 싶어 안달이 나더라고 했다.

더는 참지 못한 채 다시 전화줄을 연결해 놓으니 그제서야 안심이 되더라는 것이다.

해방감을 맛보려고 뽑았던 전화코드를 다시 연결시켜 놓고서야 비로소 안도감이 찾아왔다지만 요즘은 한술 더떠 집에 있는 전화로도 모자라 사람마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니 비록 무선이긴 해도 어디에 있든지간에 꼼짝없이 친친 동여매진 상태라야 비로소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상태라는 얘기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거추장스런 것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긴다면 사람살이는 어떻게 될까.

구태여 도인이나 현인, 종교인들이 말하는 '세상 떠나 살아가기'에 귀기울이지 않더라도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사는 법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것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저것에도 솔깃한 마음이 동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범부의 일상이지만, 첨단문명과 세련된 기계화에 매혹된 생활일수록 진정한 자유나 삶의 본질따위와 근접하기란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는 자각을 일상의 경험을 통해 수시로 느껴보는 것은 어떨지.
신아연 기자는 호주 거주 칼럼니스트로 한국의 신문, 잡지 등에 호주 관련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저서로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이 있다.

2004/02/23 오후 10:18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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