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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내리던 날 쌀이 떨어졌습니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3. 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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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내리던 날 쌀이 떨어졌습니다
40 평생 이런 눈 처음... '강원도의 힘'은 스키타고 도로 내달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송성영(sosuyong) 기자   
ⓒ2004 송성영
3월 5일, 새벽부터 오후까지 그야말로 눈이 '허벌나게' 내렸습니다. 내가 살아온 40여 년의 기억 속에서 이만큼 내린 눈은 처음이었습니다. 번개에 천둥까지 쳤습니다.

불과 며칠전에 새로 이은 사랑채 처마가 주저앉았고 금세 쌓여 가는 함박눈에 슬레이트 지붕마저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았습니다. 한 시간에 한번 꼴로 슬레이트 지붕에 쌓이는 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 며칠전 새로 이은 사랑채 처마가 내려앉았습니다
ⓒ2004 송성영
집 뒤 대나무 숲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어졌고 아예 쩍쩍 갈라져 쓰러진 대나무들도 꽤 많았습니다.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집 뒤가 휑 했습니다. 대숲에 가려져 있던 산자락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 우리집은 눈 속에 덮혀 있고 집뒤 대숲은 폭격을 맞은듯 폭삭 주저앉아버렸습니다.
ⓒ2004 송성영
텃밭 옆에 지어 놓은 풍산개 '돌진이'이 집은 휘어진 대숲에 쌓여 동굴이 돼 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게 된 돌진이는 눈밭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돌진이는 집을 잃은 덕분에 목줄에서 풀려나 한껏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 돌진이는 졸지에 집을 잃었지만 목줄에 풀려 오히려 자유를 찾았습니다.
ⓒ2004 송성영
꾀를 부려 조금 일찍 씨를 뿌려 놓은 상추밭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고 옆집 희준이 할머니네 비닐하우스는 말 그대로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옆집 할머니네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았습니다.
ⓒ2004 송성영
"애들아 오늘 학교 가지 마라."

아빠의 '등교거부 선언'에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더미로 때마침 집에 머물러 있던 막내 삼촌과 강원도에서 찾아온 삼촌 친구와 함께 예전에 에스키모인들의 보금자리인 이글루 집을 만들었습니다.

▲ 아이들은 신이나 삼촌들과 함께 마당 한가운데에 에스키모인들의 이글루 집을 지었습니다.
ⓒ2004 송성영
아내는 짐짓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집 옆에 대나무가 내려앉으면서 전화선까지 끊어져 외부와 차단되었고, 때마침 쌀까지 떨어졌던 것입니다. 쌀이 떨어졌지만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접어 둬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이미 차창까지 눈 더미에 덮혀 있었습니다. 점심 무렵부터는 국수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 쌀이 떨어졌는데 면소재지로 나가는 도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2004 송성영
다행히 강원도에서 온 막내 삼촌 친구, 이윤구씨가 '강원도의 힘'을 발휘해 가지고 다니던 스키를 타고 눈 덮인 도로를 내달려 면소재지에 가서 쌀을 사왔습니다. ‘강원도의 힘’은 전봇대에 올라가 전화선까지 연결해 주었습니다.

▲ 강원도에서 스키 강사를 한다는 막내 삼촌친구, 이윤구씨가 스키를 타고 쌀을 사왔습니다.
ⓒ2004 송성영
쌀이 들어오고 전화선이 연결되자 금세 얼굴이 환해진 아내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흥분된 목소리로 생중계를 했습니다.

"난리여 난리, 스키 타고 면에 나가 쌀을 다 사왔다니께...”

눈이 그치자 집 주변으로 먹이를 찾는 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고양이에게 잡아먹히기도 했고 대숲이 보금자리인 물까치들은 사방에서 흩어져 울어댔습니다.

아이들은 이글루 집을 들락거리다가 두더지 새끼들처럼 마당 한가득 쌓여 있는 눈 더미 여기 저기에 구멍을 뚫어가며 여전히 신이 났습니다.

▲ 아이들은 이글루 집을 들락거리며 두더지처럼 여기저기에 굴을 파놓았습니다.
ⓒ2004 송성영
나는 '돌진이'와 함께 무릎 위까지 푹푹 빠져드는 눈 덮인 산자락을 오르며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집안에서 볼 때는 처마가 내려앉고 비닐하우스가 주저앉고 당장 지붕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혼란스럽기만 했지만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평화롭기까지 했습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찍다가 잠시 그 어떤 막막함과 공허감에 짓눌려 넋을 놓고 한참을 고자세로 있었습니다. 나는 생경함이나 경이로움조차 끼어 들지 않는 낯선 공간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나 다름없었습니다.

▲ 눈덮인 산자락은 그저 평화로울 뿐입니다.
ⓒ2004 송성영
산자락 저 멀리서 노루 새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미를 잃고 눈발을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득 노루 새끼의 고통스런 울음소리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내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7년 전 가족과 함께 계룡산 갑사 부근에 빈집을 얻어 텃밭을 일구며 생활하고 있는 송성영 기자는 틈틈이 다큐멘타리 방송 원고를 써 오면서 공주에서 ‘동학농민전쟁 우금티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적게 벌어 적게 먹고사는 가족 이야기를 담은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라는 책을 냈다.

2004/03/06 오후 1:11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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