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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손톱은 다시 자라날 겁니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3. 2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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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손톱은 다시 자라날 겁니다"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4>공장일기<28>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이종찬(lsr) 기자   
▲ 1983년 당시 조립실의 유일한 남자동료 서창현(우). 그때 두 사람은 공장 일이 끝나면 주막을 찾아 술을 마시며 생산부 남성노동자들과 조립부 여성노동자들을 이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04 이종찬

"어! 이거는 바로 우리들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가? 이런 것도 시(詩)가 될 수 있나?"
"당연하지. 시(詩)라카는 거는 원래 그런 기다. 지는 라면도 제대로 못끓여 묵음시로(먹으면서) 세상이 아름답다느니, 사랑이 어쩌다느니 하는 그런 거는 시가 아이다."
"그래. 니 말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마산문화> 2집 '다시 수풀을 헤치며'에 현장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이 담긴 '철새보호구역'이란 시가 발표되자 현장노동자들은 눈을 크게 뜬 채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몹시 반기는 눈치였다. 어떤 노동자는 그 시를 읽으면서 콧물을 훌쩍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우려하는 노동자들이 더 많았다.

"근데 니 이런 시로 써도 괘않것나?"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쓴 거뿐인데 설마 저거들이 우짤라꼬."
"그 설마가 사람을 잡는 수도 있다카이. 안 그래도 니는 옛날부터 안기부하고 총무부장한테 도장이 콱 찍히뿐(찍혀버린) 몸 아이가. 오데 그거뿐이가. 병역특례까지 받는 귀하신 몸인데."


사출실 사원 이종찬. 1983년 0월 0일 부로 4동 조립부 근무를 명함.

그랬다. 동료들의 말마따나 그 설마가 결국 나를 잡고 말았다. 1983년 겨울 <마산문화> 2집이 나온지 채 몇 주도 지나기 전에 나는 생산부장의 명으로 다섯 번째 부서이동을 당하고 말았다. 1978년 봄부터 공장생활을 시작한지 6년만에 무려 다섯 번의 부서이동을 당한 셈이었다.

조립부는 생산부에 비해서 그리 열악한 부서는 아니었다. 우선 바닥에 얼굴이 환히 비칠 정도로 모든 환경이 깨끗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립부는 정밀도 1000분의 2, 3을 따지는 까다로운 제품을 직접 조립하는 곳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먼지 한 점이라도 끼어들면 불량품이 생기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립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작업복 색깔도 달랐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작업복 색깔이 달랐다. 남성노동자들은 짙푸른 작업복을 입었고, 여성노동자들은 검붉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면 남녀 구별없이 모두 구름빛 작업복을 입었다.

하지만 조립부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모두 흰색 바탕에 청색 줄무늬가 박힌 그런 작업복을 입었다. 조립부에서 일하는 남성노동자들은 생산부와 같은 색깔의 작업복을 입었지만 작업복의 형태가 조금 달랐고, 작업복이 조금만 더러워져도 곧바로 세탁을 해야만 했다.

"히야~ 니는 정말 좋것다. 그 편한 사출실도 양에 차지 않아 인자(인제)는 조립부라. 휴우~ 나는 운제(언제) 니처럼 꽃밭에서 한번 놀아보것노? 나도 니처럼 시(詩)로 쓰모 혹 조립부는 아이라캐도 사출실에는 갈 수가 있것나?"

그랬다. 조립부는 어쩌면 사출실보다 작업환경이나 더 나은 부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많았다. 사출실은 인원이 10여 명 남짓이었고, 출입통제구역 팻말이 붙어 있었던 탓에 타 부서의 간섭을 일체 받지 않아 가족처럼 오손도손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립부는 무려 4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확 트인 넓은 공간에서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일을 해야 하는 그런 부서였다.

또한 조립부는 400여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여성이었다. 남자노동자라고는 부서장 1명과 계장 4명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의 조립에 필요한 제품을 수시로 공급하는 나와 동료 1명을 포함 모두 7명이었다. 하지만 부서장과 계장은 별도의 사무실이 있어 조립현장에는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40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을 직접 상대하는 남성노동자는 나와 동료 1명뿐이었다.

"야야~ 기왕 조립부에 간 김에 이쁜 아가씨나 한 명 소개시켜주라. 나도 장개(장가) 한번 가보자. 이렇게 어영부영하다가는 금방 노총각 소리 듣는다카이."
"아가씨 소개 시키는 기야 오데(어디) 에렵나마는(어렵냐마는), 멀쩡하게 공장에 잘 댕기는(다니는) 아가씨로 울릴까 싶어서 그라지."
"야야~ 소개만 시켜준다카모 내가 맨날 철야로 해서라도 마누리 하나 못 미(먹여) 살리것나."


한동안 나는 조립부에서 일하는 게 쉬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내 작업복이 짙푸른 청색이어서 40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입은 흰색 작업복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마치 백로가 노는 곳에 까마귀 한 마리가 무작정 날아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또한 내가 라인을 지나갈 때마다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곁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소곤대며 쿡쿡쿡 웃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업환경은 아주 깨끗하고 좋게 보였지만 조립부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공정 사이 사이에 화약을 조립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화약을 조립하는 공정을 맡은 여성노동자에게는 계장이 직접 나와 2시간마다 10분씩 안전수칙을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작업 도중 안전사고가 나는 것은 비단 생산부뿐만 아니었다. 조립부에서도 화약을 조립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 화약이 터져 여성노동자들의 손가락 한 마디가 사라지는 일이 허다했다. 또한 조립을 하다가 화약이 하나라도 모자라면 부서장부터 공장장까지 달려와 진상파악을 하는 등 큰 난리가 났었다.

"뻐엉~"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누가 작업 도중에 스치로풀(스티로폼)을 부수고 야단을 치는 거야?"
"여기... 여기..."
"어디야? 어디?"
"손...손..."


그때 저만치 라인 중간에 여성노동자 한 명이 고개를 엎드린 채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화약을 조립하는 공정을 맡은 곳이었다. 이런이런! 나는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여성노동자는 고개를 수그린 채 엄지손가락을 움켜쥐고 그저 "손! 손!" 하는 말만 내뱉고 있었다.

그 여성노동자가 움켜쥔 손을 떼자 그녀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는 시커먼 자국과 함께 손톱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피는 그다지 많이 흐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 여성노동자를 등에 엎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가까운 산재병원 응급실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 여성노동자는 나보다 카가 더 컸지만 무거운 줄도 몰랐다.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치료를 하고 나면 통원치료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날라간 손가락은 우째 될 거 같습니꺼?"
"다행히 손톱 끝부분만 날라갔기 때문에 잘린 손톱이 다시 자라날 겁니다."
"휴우~"


그랬다. 그 여성노동자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조립 도중 화약이 터지면 손가락 한마디는 아예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여성노동자는 비록 손톱 끝부분이 날라갔지만 손톱 아래 하얗게 돋아난 반달은 다치지 않았다. 당시 현장노동자들은 사고가 나더라도 반달만 다치지 않으면 다시 손톱이 자라난다고 믿었다.
<계속 이어집니다>

2004/03/18 오후 1:26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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