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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섰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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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섰다

쌀 개방협상 눈 앞에 둔 분노의 농심 현장… ‘잃어버린 10년’ 동안 남은 건 거액의 부채뿐

올해 쌀 개방 협상을 앞둔 농민들은 더 이상 정부를 신뢰하지 못한다. 정부 대책을 좇았던 10년 동안 남은 건 한숨 섞인 빚더미뿐. 분노와 위기감으로 가득 찬 농촌의 현장에 다녀왔다.

나주= 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전남 나주시 동강면의 한 비닐하우스 단지 안에 장미 수만 송이가 말라 죽어있다. 정부의 대규모 재정지원을 받아 설립된 이 단지를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빚더미만 남긴 채 파산하고 말았다.

“오살할 놈덜이, 먼 살 일 나섰다고 쌀 개방은 쌀 개방이여. 지금도 쌀이 남아돈다믄서….” 지난 3월27일 오전 7시 전남 나주시 동수리 마을회관 앞. 동틀 무렵의 쌀쌀한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60대 노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곧 밭일을 나가려는 듯 이들의 손에는 농기구가 쥐어져 있다. 노인들은 회관 안에 설치된 기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뒤 서둘러 마을회관을 빠져나갔다. 이들의 등 뒤로 누구에게 하는지 알 듯 모를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쌀(시장) 내주고 핸드폰만 많이 팔믄 다 되는 겨?” “농민들은 다 죽게 될 판인디…, 지그덜만 살겄다는 것이제.”

전농 ‘쌀 개방 찬반투표’ 로 정부 압박

이날은 전국농민회총연합(전농) 나주시 영산포 지회가 주관하는 쌀 개방 찬반투표가 열리는 날이었다. 전농은 올해 예정된 쌀 개방 재협상을 앞두고 전국 지회별로 찬반투표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날 행사는 3월13일 전남 보성군 득량면에 이은 두 번째 투표다. 전농은 오는 8월 경상도 지역을 끝으로 쌀 개방 투표를 모두 마친 뒤, 투표 결과를 토대로 쌀 재협상에 나서는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다.

이날 투표 결과는 ‘예상대로’ 나왔다. 영산포 12개 마을 유권자 979명 중 713명이 투표에 참가해 모두 692명(97%)이 쌀 개방 반대에 표를 던졌다. 이보다 앞서 실시된 전남 보성군 득량면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총 유권자 *명 중 *명이 투표에 참가해 이 중 *명이 쌀 개방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체결 당시 쌀시장 개방을 위해 10년의 관세화 유예기간을 확보했지만, 농민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쌀 개방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다. 전농의 이영수 정책부장은 “다른 지역들도 투표를 해보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지난해 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에 이어 올해 쌀 개방 재협상과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등 각종 농산물 개방 회담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농민들의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말했다.


△ 지난 3월27일 전남 나주시 영산포에서 실시한 쌀개방 찬반투표에서 주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실제로 <한겨레21>이 국내 대표적 쌀 생산지인 전남 나주시에서 확인한 농심(農心)은 위기감과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투표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정부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나주 농민회 영산포지회 유상욱 회장은 “쌀은 국내 농민 전체 소득의 50%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농가 수입원이기 때문에 농민들은 쌀 개방을 농민에 대한 ‘사망선고’로 믿고 있다”며 “FTA도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줬지만, 쌀 시장 개방의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쌀 관세화 유예기간이었던 지난 10년은 농민들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쌀 개방에 맞설 수 있는 경쟁력을 키워야 했는데, 시행착오만 반복하다 거액의 부채만 남긴 것이다. 농민들은 그 책임을 정부의 잘못된 정책 탓으로 돌린다. 나주 농민회 정영석 사무국장은 “정부의 정책을 믿고 따른 농민들이 결국 더 많은 빚을 지게 됐다”며 “오죽하면 정부 정책을 반대로 따라하면 돈을 벌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겠는가”라고 씁쓸해했다. 정 국장은 “나주시에서 축사와 비닐하우스가 없는 농가는 단 한 집도 없을 것”이라며 “10년 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너도나도 설치한 것들인데, 지금 축사는 대부분 텅 비어 있고 비닐하우스는 관리를 포기해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들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 안 믿은 한우 농가만이 재미 봐

투표가 끝난 뒤 유상욱 지회장은 취재진을 한 농가로 안내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900평 규모의 현대식 비닐하우스 5동이 설치된 대규모 비닐하우스 단지였다. 그러나 유 지회장을 따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취재진은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내체육관 정도 크기의 넓은 밭에 장미 수만 송이가 말라 비틀어진 채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상당히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했다. “이곳은 한때 나주시에서 손꼽히는 시설농가였는데, 지금은 빚만 남아서 (주인이) 농사를 포기했죠.” 유 지회장의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취재진의 입에서는 탄식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에 따라 쌀 시장이 개방(94년부터 10년 동안 연차적으로 국내 쌀 생산량의 4%까지 수입)된 뒤 김영삼 정부는 농업의 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각종 ‘농촌 구조개혁’을 실시했다. 쌀농사에 의존하는 농민들의 소득원을 분산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과일과 채소, 꽃을 재배하는 시설하우스와 유리온실단지, 한우와 돼지 등 축산농가 육성이다. 쌀농사를 계속 지을 경우에는 소작농이나 영세농이 아닌 대규모 기업농으로 유도하겠다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거액의 재정 지원을 하면서 구조개혁을 추진했고, 쌀 개방에 위기감을 느낀 많은 농민들이 이 대열에 동참했다.


△ 정부의 축산 장려 정책에 따라 농촌 곳곳에 대규모 축사가 지어졌지만, 한우파동과 IMF사태로 거액의 빚만 떠안은 농가들이 많다.

장미 비닐하우스단지의 주인인 차아무개(46)씨도 그런 경우였다. 그는 지난 95년 이웃 주민 3명과 함께 영농조합법인을 구성해 22억원 규모의 비닐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정부의 재정지원 정책에 따라 8억8천만원을 직접 지원받았고, 농협에서도 8억여원(연리 5%)을 융자받았다. 나머지 돈은 3명이 각자 갖고 있던 논을 팔아 조달했다. 차씨 등은 당시 정부에서 추천한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기로 결정했다.

차씨는 영농후계자로 선정될 만큼 농사에 대한 열정과 기술을 인정받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차씨의 비닐하우스단지는 <농민신문>에 의해 모범사례로 선정될 만큼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차씨의 단지로 견학을 오는 농민들도 많았고, 지역 신문들도 차씨를 성공한 영농인으로 앞다퉈 소개했다.

그러나 차씨가 ‘몰락’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울토마토를 재배한 지 2년도 채 안 돼서 차씨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차씨처럼 방울토마토를 재배하는 농가가 전국적으로 크게 늘면서 과잉생산으로 값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겹쳐 도시인들은 과일 소비를 대폭 줄였다. 현대식 재배 시설을 갖춘 덕에 생산량은 크게 늘었지만,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땀흘려 생산해낸 방울토마토를 비닐하우스 안에서 썩혀야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차씨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차씨는 과감하게 작목을 전환하기로 했다. 차씨가 주목한 것은 꽃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농업정책 담당자들은 경기가 회복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꽃 수요가 늘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차씨는 2000년부터 장미를 재배하기로 했다. 나주와 가까운 곳인 광주와 목포가 좋은 시장이 될 것으로 분석했다. 만약 이곳에서 잘 팔리지 않으면 멀리 서울까지 가서라도 판매하겠다는 각오를 했다. 차씨는 작목을 장미로 전환하면서 또 농협에서 융자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장미도 만만치 않았다. 생산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결국 판매가 문제였다. 직접 장미를 실어다 서울에서 팔기 위해 8톤 냉동탑차까지 구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차씨는 생계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부채였다. 소득을 전혀 올리지 못했으나 융자금의 원금과 이자를 고스란히 내야 했다. 차씨는 결국 2002년 농사를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지난 10년 동안 청춘을 바쳐 일했지만 남은 것은 얼마나 되는지 종잡을 수조차 없는 빚더미뿐이었다. 유 지회장은 “같이 조합을 꾸렸던 주민들과 크게 싸운 뒤 차씨가 부채를 거의 다 떠안았다”며 “옛날에는 농민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의욕이 넘친 일꾼이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을 아예 피해 다닌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취재진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250평 규모의 축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유 회장 소유의 것이었다. 그러나 축사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정부의 축산 장려 정책에 따라 6800만원을 지원받아 시작한 사업인데 결국 망해버렸죠.” 유 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94년 고향 후배와 함께 한우 사육을 시작했다. 정부의 정책 자금을 지원받아 소 200마리를 구입했고, 축사에도 현대식 설비를 갖췄다. 당시 송아지 단가는 1마리당 120만원. 유 회장은 200마리의 송아지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하지만 1년 뒤 어미소로 성장한 소를 시장에 내다 팔려고 했을 때 유 회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암소 한 마리 값이 1년 전 송아지값과 같은 120만원이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정부 정책만 믿고 너도나도 소를 키운 바람에 소값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축사 투자비는 물론이고 사료값이며 1년 동안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참 암담하더군요.”


△ 영산강 하류에 조성된 대규모 간척지에서 논갈이가 한창이다. 쌀개방 재협상을 앞두고 농민들은 또다시 동요하고 있다.

쌀 개방 과정은 몰락의 세월이었다

유 회장은 그래도 우직하게 한우 사육을 계속 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가 2000년부터 소 수입자유화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는 결국 한우 사육을 포기했다. “수입자유화가 되면 소값이 더 떨어질 게 뻔한데 어떻게 계속하겠어요. 더 이상 빚을 지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정부에서도 한우 사육 포기를 장려했죠.” 실제로 정부는 소값을 안정시키겠다며 암소 도축을 강력하게 유도했다. 그러나 정부의 예상은 또다시 빗나갔다. 2000년부터 호주와 유럽에 몰아닥친 광우병 파동으로 수입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정부가 수입소로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던 한우 사육이 오히려 ‘대박’을 터뜨리게 됐다. “지금은 암소 한 마리 값이 500만원까지 올랐죠. 나처럼 정부 정책을 따르지 않고 우직하게 소를 키우던 농민들은 지금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앞으로 정부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농민들은 쌀시장을 개방하는 정책은 결국 농촌을 죽이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진행된 쌀시장 개방 과정은 곧 농민과 농촌의 몰락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4년 우루과이라운드 체결 당시 국내 농업 인구는 900만명에 육박했지만, 2003년 말 현재 농민 수는 350만명에 불과하다. 10년 동안 550만명이 농촌을 떠난 것이다. 전남 나주시의 경우 지난 93년에는 나주시의 인구가 5만명이었고 나주군은 15만명이었는데, 2004년 현재 나주군과 통합된 나주시의 인구는 10만2천명으로 10년 전의 절반에 불과하다. 유 회장은 “나주에서 과거 농업이 발달해 전라도의 대표적인 도시로 꼽혔는데, 지금은 독립적인 국회의원 선거구 하나 구성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했다”며 “정부의 쌀 개방 정책은 결국 농촌을 죽이는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10년 동안 농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은 정부는 올해 또다시 쌀시장을 개방할 수밖에 없다고 농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호소는 농민들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2004년 봄 농심은 새 봄의 훈훈한 기운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의 바람이 사치스러운가?”

30~40대 나주 농민들이 털어놓은 ‘오늘 농촌’의 고민

전남 나주의 ‘청년 농민’들이 지난 3월27일 쌀 개방 찬반투표를 마친 뒤 한 자리에 모였다. 나주시 영산포동과 인근의 동강면, 공산면에 사는 이들은 일반 농촌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30∼40대 농민들이다. 영산강 특산품인 가물치회와 소주가 곁들여진 이날 모임은 쌀시장 개방에서부터 자녀 교육과 육아·문화·복지에 이르기까지 농촌 전반의 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 참여정부는 '젊은 농민'들을 육성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농촌의 젊은 농민들은 자녀교육과 문화, 복지시설부터 확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참여정부가 전업농을 키우겠다고 했는데, 쌀값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내가 1만4천평 정도 농지를 갖고 있는 전업농인데 지금 빚만 2억여원 남았다. 정부에서 자꾸 전업농을 하라고 해서 농지를 잔뜩 사서 쌀농사를 크게 벌여놨다. 그런데 쌀값이 자꾸 떨어지니 남는 게 없다. 앞으로 쌀 개방폭을 더 늘리면 지금 15만원 정도 하는 쌀값이 더 떨어질 텐데, 그러면 전업농 다 망한다.”(이형국·41)

“농가 부채를 모두 정부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빚진 것은 분명히 내 잘못이다. 도시에 나가 날품을 팔아서라도 다 갚아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농사일을 하면서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이 그렇게 사치스러운 것인가.”(이남수·36)

“정부가 35살 미만의 젊은 농민을 양성하겠다고 한다. 이게 잘되려면 자녀 교육과 문화, 복지 시설이 잘돼 있어야 한다. 시골 애들은 도시 애들에 비해 문화적 혜택을 거의 못 받는다. 뮤지컬 한편 보려면 광주까지 나가야 한다. 미술관과 동물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 사교육은 어떤가. 나는 중학교에 다니는 애가 있는데 도시 애들처럼 공부시키고 싶다. 그러나 돈도 없을 뿐더러 설사 돈이 있더라도 변변한 학원조차 없다.”(김인숙·39)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하고 있지만 교사들이 모두 대도시에 나가 살고 있기 때문에 도시처럼 밤늦게까지 애들을 잡아두지 못한다. 그러니 애들은 읍내 게임방이나 만화방으로 돌아다닌다.”(안춘자·47)

“농촌 주부들도 ‘몸짱’이나 ‘얼짱’에 관심 많다. 날씬해지고 싶고 예뻐지고 싶다. 그러나 헬스클럽이나 운동시설이 없다. 남자들은 축구라도 하지만, 여자들은 운동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전은경·37)

“나는 그래도 농촌에 희망을 걸고 살려고 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우리에게 무조건 도시로 나가 살라고 했지만, 나는 자식들에게 그렇게 얘기하지 않겠다. 우리 세대가 힘을 합쳐 농촌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면 된다. 정부가 농촌 정책을 바꿀 수 있도록 젊은 농민들이 의지를 갖고 계속 요구해야 한다.”(염우용·35)

“시골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라는 말이다. 농사가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가. <한겨레21>이 도시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써달라(웃음).”(안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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