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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을 보면서 희망을 봅니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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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을 보면서 희망을 봅니다
<포토에세이>새순의 향연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민수(dach) 기자   
▲ 까마귀쪽나무
ⓒ2004 김민수
봄이 오면 메말랐던 대지와 비썩 말랐던 나무에 아주 부드러운 혁명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부드러운 것들이 그 마른 대지와 장작처럼 말라버린 나뭇가지를 비집고 나오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이 없다면 현재도 없겠지만 동시에 이전 것에 붙들려 살아가면 새 것을 내어놓을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일매일 새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도 늘 과거에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한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순을 보면서 과연 내 안에는 이전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할 마음이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 예덕나무
ⓒ2004 김민수
지난 겨울부터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썼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세상에 인사를 합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강인해 보이고, 더 대견스러워 보입니다.

저와 가까운 곳에서 목회하시는 선배 목사님이 귤밭에 있는데 지난 해 따지 않았던 귤들이 아직 싱싱한데 좀 갖다 먹지 않겠냐고 하십니다. "아직도 귤이 있어요?" 과일값도 만만치 않고, 귤밭의 귤은 거의 들어간지라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습니다. 귤밭에서 작업하시는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것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면 이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폼만 잡고 권위만 내세우는 목사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칩니다.

간혹 일상적인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새순은 주로 연록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붉은 새순을 가지고 있는 예덕나무나 담쟁이덩굴처럼 말입니다. 그 다른 모습 속에 어쩌면 '진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 박새
ⓒ2004 김민수
겨울 쌓인 눈을 헤치고 새순을 내더니만 어느새 풍성하게 싹을 내었습니다. 저 새순을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을 찍어먹어도 맛있겠다 생각해 봅니다만 어렵사리 새순을 내었는데 그러면 안 되지 합니다.
봄나물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뿌리를 먹는 것들도 있지만 대체로 새순입니다. 단오 전에 나는 새순은 대부분 먹을 수 있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지금이야 사철 푸른 제주에 살고 있으니 푸른 것에 대한 그리움이 덜하지만 도시에서는 겨울이 지나고 들판이 푸릇푸릇해지면 봄나물을 하러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교외로 나가면 내가 알고 있는 봄나물인 냉이나 쑥, 씀바귀, 민들레, 달래뿐만 아니라 연한 나무들의 새순까지도 먹는 것이라며 풍성하게 봄나물을 뜯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정성껏 다듬어 데치기도 하고 무치기도 하고 된장국에 한 줌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온통 푸성귀로 그득한 상을 받으면 어찌나 맛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 청미래덩굴
ⓒ2004 김민수
지난 해 고사리철에 제주에 오신 어머니께서 고사리를 하시다말고 가시가 송송 돋힌 청미래덩굴의 새순을 꺾으십니다. "그것도 먹나요?"하고 물으니 늘 하시던 말씀대로 "그래, 단오 전에 나는 새순을 거의 다 먹을 수 있단다"하십니다.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데 맛이 있었습니다.

청미래덩굴은 종종 새순이 나오고 있을 때에도 지난 가을 맺었던 붉은 열매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슨 미련같은 것이 남아서 그런가 생각하면서도 추하지 않으니 자연의 삶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떠나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떠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그래서 추해지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어머님이라면 새순을 따서는 상에 올리셨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육식보다는 채식을 위주로 사셨던 분들의 심성이 자연과 훨씬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자연을 몸에 모시고 살았으니 그랬겠지요.

▲ 찔레
ⓒ2004 김민수
아무리 푸른 것이 사시사철 있는 제주라도 들판의 겨울은 말라 누렇게 된 버석거리는 억새들과 활엽수들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겨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누런 들판이 초록빛으로 서서히 물들여 가는 것이 바로 이 찔레입니다.

지천에 깔린 찔레들이 새순을 내고 꽃을 피울 때쯤이면 고사리철이고, 그 가시덤불 사이에는 왜 또 그리 고사리들이 많은지 고사리를 꺾다 보면 찔레가시에 손을 긁히기 일쑤입니다.

나는 가시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무기 삼아서 남을 찌르기 위해 혈안 된 삶을 살아가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요, 때로는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의 도피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전부리를 자연에서 얻던 어린 시절에 찔레의 새순이 쑥 올라오면 꺾어 먹기도 했습니다. 무나 배춧대는 물론이고 아카시아의 새순, 박주가리 열매, 아침이슬을 촉촉히 머금은 목화, 국숫발 같이 하얗던 메꽃뿌리, 칡 등등 많은 천연의 주전부리들이 있었는데 아이들 사리에서는 찔레의 새순을 먹으면 '피가 마른다'는 속설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한 두 개 꺾어 먹고는 혹시 피가 말라 죽는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면 그냥 속설인가 봅니다.

▲ 줄사철
ⓒ2004 김민수
제주의 돌담을 타고 잘 자라는 줄사철입니다. 사시사철 푸른 상록의 사철이지만 새순을 낼 때의 그 파스텔톤의 연함은 색다릅니다. 주로 돌담과 어울려서 자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주로 무덤가의 돌담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 척박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인 사철나무보다는 작고 단단합니다.

망자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했겠지요.
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아픈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들었겠지요. 어떤 이들은 호의호식하다가 번듯한 무덤을 하나 차지한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반듯하지도 못한 돌담을 쌓은 초라한 무덤에 묻힌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듣느라 하늘로 자라기를 거부하고 돌담을 타고 또 타고 돌면서 자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이면 들판 여기저기에서 연록의 새순이 돋아납니다.
이 새순은 따스한 봄의 햇살과 따가운 여름을 보내면서 더욱 더 그 푸름을 더해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들녘을 푸르게 수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모든 것을 놓고 온 곳,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럼으로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순은 희망입니다.
김민수 기자는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책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리지 않는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www.freechal.com/gangdoll을 방문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2004/04/05 오전 8:06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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