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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는 날,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아빠는 인천 길병원 장례예식장에서 세나 누나 할아버지의 장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단다. 장례식을 어떻게 인도했는지 모를 정도로 마음이 허전했단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갑자기 허공에 붕 뜬 느낌이고 한쪽 팔이라도 잘려나간 듯한 느낌이었단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지금 이 시간이면 네가 탑승한 비행기가 출발하겠구나 생각하니 부끄럽게도 눈물이 쏟아지더라. 며칠 동안 네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했단다. 한 지붕 아래 같이 살면서 밥도 같이 먹고 생활하다가 다시 보기가 힘들게 되었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아빠가 너를 살갑게 대해 주지 못하고 엄하게만 키웠다는 자괴감이 몰려와 괴로웠다. 아빠가 너를 필리핀으로 떠나 보내고 이렇게 상실감이 클지 정말 몰랐단다. 저녁 잠자리에 들면 네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나. 그러면 밖으로 나가 별을 본다. 아딧줄아! 아빠 마음 잘 알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네가 우리 집안의 중심이다. 앞으로 너의 책임이 막중하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너를 필리핀에 괜히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잘 결정한 것 같구나. 아빠는 네가 네 호적의 이름대로 호빈(澔彬), 큰 그릇이 되어 사회에 크게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큰 그릇이라 함은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어떤 방면이든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고수가 되는 걸 말한다. 너는 충분히 그렇게 될 줄로 아빠는 믿는다. 너는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기를 싫어했다. 물론 양보할 때는 양보하고 질 때는 화끈하게 져 주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너는 학생이니 공부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앞으로 한달 보름 후면 새 학년이 시작되는구나. 일단 영어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란다. 충분히 네 생각을 말하고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또 네가 필리핀에서 살고 있으니 그 곳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도 익히고 좋은 장점은 배우도록 해라.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라고 절대 업신여기지 마라. 겸손해야 한다.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께도 겸손하게 예의를 다하기 바란다. 식탁에 어떤 음식이 오르든지 하느님께 감사하고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수고한 모든 사람들께 감사하고 먹어라.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친구들에게 쾌활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거라. 모두 낯선 나라에 와서 고생하고 있으니 따스한 말 한마디도 얼마나 고맙겠니. 매사에 차근차근, 너무 서둘거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밥도 급히 먹으면 체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마찬가지란다. 할머니와 외할머니께 한달에 한번 안부 전화 드려라.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신 분이시다. 넝쿨이는 너 대신 교회 피아노 반주를 잘하고 있단다. 넝쿨이가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딱 1년 배운 피아노 실력으로 성가대 피아노 반주를 한다는 사실이 참 기특하고 대견하구나. 아직까지는 능숙하지는 않지만 점점 실력이 향상되고 있단다. 은빈이는 아침에 학교 가면 저녁밥 먹을 때쯤 집에 온단다. 일주일에 네번 방과 후 학교인 <신나는 학교>에 다닌다. 얼마나 밖에서 놀았는지 얼굴이 완전 깜둥이가 되었구나. 은빈이한테 "너, 큰 오빠 안 보고 싶니"하고 물으면 "아빠는, 당연히 보고 싶지. 같이 살았을 때는 몰랐는데 따로 떨어져서 사니까 오빠가 보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아딧줄아. 가족이 참 소중하지. 너도 가족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느껴지니. 보고 싶어도 참자. 우리집이 남양에 살 때 기억나니? 네가 학교에서부터 차 안 타고 걸어 다녔던 일. 그 때만 생각하면 네가 참 자랑스럽다. 차 안 태워 준다고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지? 10리가 넘는 산길을 다니면서도 한번도 결석이나 지각한 적이 없이. 아빠 엄마가 너 마중 나가면 "아빠!"하고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는데….
오늘은 국회의원 선거 날이다. 머리 감고 나라를 위해서 국민들이 중지를 모아 좋은 사람을 지도자로 뽑게 해달라고 기도했단다. 너한테 쓰는 편지를 끝내고 다시 교동으로 가려고 한다. 아침 7시 30분 첫배를 타야지. 사랑하는 아딧줄아. 보고 싶구나. 우리 집 모든 식구들이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네 꿈과 장래를 위해서 보고 싶어도 참자. 그럼 잘 있어라. 건강하길 바란다. 아빠는 너를 믿는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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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5 오전 11:09 ⓒ 2004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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