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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세상 만들기,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16.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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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세상 만들기,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장애인을 돕는 장애인 정용식씨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재경(kjk4131) 기자   
▲ 공원을 순찰하는 정용식씨
"도움을 바라기는커녕 장애인들을 더 돕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지요."

정용식(52·지체장애3급)씨를 알고 있는 사람들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훤칠한 키에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그의 양 겨드랑이 사이의 목발이 힘겨워 보인다.

바라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

장애인복지회 회원인 그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사무실에 간다. 일상적인 대화 중 "아무개가 힘든다더라"하는 회원들의 말에도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일일지라도 장애인에겐 훨씬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려운 동료 가정에 매년 20kg 쌀 10포씩을 남 모르게 전달한 지도 벌써 5년째다. 장애인 자녀들의 힘겨운 이야기를 접하고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100만원부터 형편에 따라 2, 30만원씩 총 9명에게 학용품 값을 선뜻 내놓았다.

(사)한국신체장애인복지회 홍재식 회장은 "용식씨는 힘든 처지임에도 십시일반으로 장애인의 다리가 되는 휠체어를 지원하거나 장애인들의 봄나들이며 합동결혼식 등 행사 때마다 수건이나 음료수를 자청하여 후원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왼손이 하는 걸 오른손이 모르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수혜자가 고맙다는 인사를 해 올 때는 영 겸연쩍기만 하다. 아파트 같은 동에 살며 공원에서 함께 일했던 정쌍례(51)씨는 "말도 말아요. 글쎄, 풍치로 이 3개를 발치하고 4년째 고생하면서도 자신을 돌보는 데는 뒷전인 사람인 걸요"라고 손사래를 쳤다.

용식씨는 "내 한 몸 세상에 왔다 가면 그만인 걸, 이 나이에 내 몸에 투자해서 뭐합니까? 처음에는 좀 불편했지만, 이젠 습관이 돼서 불편한지 몰라요"라고 일축했다.

설상가상으로 당뇨병까지 앓고 있는 그의 보금자리는 경기도 안양시 부흥동 8평짜리 영구임대 아파트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인색하며 남 돕기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 장애인을 더 돕지 못해 안달할 때마다 왼팔을 의수에 의지한 채 학운 공원에서 매점을 하는 부인 김귀은(52·장애3급)씨는 달갑지가 않았다고 한다.

먹고 잘 데만 있으면 행복하다

▲ 정용식씨
용식씨도 처음에는 부인 모르게 사람들을 돕다가 부인을 설득했다. 지금은 부인이 내조자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고 한다.

고향에 사는 용식씨의 형은 아들 형제를 두었지만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방치하다시피 한 어린 조카들을 돌보며 공부 시키기에는 한계가 많아서 용식씨 부부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장성한 두 조카(27·29)들은 작은아버지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아버지보다는 용식씨를 더 잘 따른다. 무슨 일이 있을 땐 꼭 상의하고, 안부 전화도 해 오는 조카들이 용식씨는 한없이 듬직하다.

고단한 삶, 고마운 일터

20년 전 용식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뒤에서 오는 오토바이에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6개월이나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성치 않은 몸이라 후유증도 컸다. 생계 수단으로 호박을 납품하는 일을 시작했지만, 장애의 몸이기에 그 일은 힘에 부쳤다.

성실한 그를 지켜보던 지인이 "그 몸으로 장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며 안양시 도시과(만안출장소)에서 산지 정화와 취사 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추천해 주었다.

10년 전 평촌 신도시가 조성되어 안양시 공원 녹지사업소로 자리를 옮겨 온 후, 그는 총괄 작업반장을 맡고 있다. 사무실에서 만난 한 직원은 "죽기 살기로 일하며 책임감은 물론, 부지런하고 동료들을 감싸는 모습이 모든 사람의 귀감"이라고 밝혔다.

용식씨는 일일 사역인부 30여명에게 작업을 배치하는데, 인부들은 그를 친형이나 친구처럼 잘 따르며 협조한다. 일하다가 의견 충돌이나 분쟁이 생기면 중계 역할은 물론 "봉사 정신으로 일하자"며 상한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가끔은 고단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할 겸 술자리도 마련한다고.

안양시청 공원녹지과 김종섭 계장은 "장애인이지만 생각하는 게 남다른 사람이지요. 출퇴근(근무 시간: 09시부터 18시까지)이라는 개념 없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공원을 순찰하며 죽은 나무는 없는지 살피는 게 오래된 일과지요. 성실하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맘으로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지만, 몸이 불편해서 행동이 늦어요. 힘들 때가 많고 환영받지 못하는 게 장애인이지요. 장애를 알면서도 나 같은 사람에게 일반인과 같은 일터를 준 안양시가 한없이 고마워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이처럼 용식씨는 인터뷰 중에도 수없이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불편한 건 몸이지 마음은 아닌데 살다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장애인이 조금만 잘못하면 "병신 육갑하네"하는 소리가 나온다. 용식씨는 이 소리가 너무 속상하다고.

맘껏 달려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세월을 살아왔다. 만약 건강하게 다시 태어난다면 "제일 먼저 뛰어보고 싶고 부처님의 자비가 한 눈에 보이도록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는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푸른 세상이 좋아서

▲ 그가 기증해 심은 향나무(맨 앞)
용식씨는 안양시 정책의 일환인 '나무 100만 그루 심기'에 동참하며, 삭막한 아파트촌을 푸른 숲으로 가꾸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공원에서 심고 남거나 버리게 된 묘목까지 꼼꼼히 챙기고, 인맥을 통해 저렴하게 나무를 구입했다.

2년 전부터 이렇게 마련한 향나무, 벚나무, 은행나무, 유실수(감·모과·앵두·매실) 등 30그루를 시작으로, 100그루의 나무를 부흥사회복지관에 기증했다. 이 나무들은 그가 살고 있는 영구임대아파트 내 도로변에 심어졌다. 덕분에 나무는 훌륭한 방음벽으로 뿌리를 내리며 푸른 숲을 조성, 살고 싶은 아파트를 만들고 있다.

▲ 용식씨의 기증으로 방음벽이 되어 자라는 나무들
콘크리트 벽, 아파트 입구에는 그가 기증한 팬지꽃이 한들한들 고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용식씨는 가을에는 국화를, 겨울에는 꽃양배추로 489세대 주민들의 정서에 풍요로움을 주고 있다.

주공아파트 김영추 관리소장은 "나무 기증뿐만 아니라 용식씨는 환자를 병원으로 수송하는 등 장애인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며 무슨 일을 요청해도 거절하는 일이 없어 주택공사 본부장 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2000년 장애인의 날에는 용식씨의 선행이 알려지며 안양시장 표창을 받았다. "남을 도울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기에,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고 용식씨는 말한다. 그가 선행을 하기까지는 중앙공원과 자유공원에 설치된 11개 자판기의 수익금이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록 몸은 불편해도 건강한 마음은 이 시대의 등대이자 본보기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영구임대 아파트도 더 힘든 장애인을 위해 머지 않은 미래에 비워줄 생각이라고 한다.
월간{우리안양}에도 송고함


2004/04/15 오전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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