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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세상사는얘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4. 4. 15.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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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아딧줄에게 보내는 편지(1)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박철(pakchol)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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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딧줄,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렴!"


▲ 아딧줄의 중학교 졸업식
ⓒ2004 느릿느릿 박철
사랑하는 아딧줄! 오랜만에 너에게 펜을 드는구나. 그동안 잘 있었니? 엄마 아빠 그리고 넝쿨이와 은빈이 모두 잘 있다. 네가 필리핀에 간 지가 벌써 두달이 다 되었구나.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도 찾고 그곳 생활에 적응해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네가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는 날,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아빠는 인천 길병원 장례예식장에서 세나 누나 할아버지의 장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단다. 장례식을 어떻게 인도했는지 모를 정도로 마음이 허전했단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갑자기 허공에 붕 뜬 느낌이고 한쪽 팔이라도 잘려나간 듯한 느낌이었단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지금 이 시간이면 네가 탑승한 비행기가 출발하겠구나 생각하니 부끄럽게도 눈물이 쏟아지더라. 며칠 동안 네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했단다. 한 지붕 아래 같이 살면서 밥도 같이 먹고 생활하다가 다시 보기가 힘들게 되었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아빠가 너를 살갑게 대해 주지 못하고 엄하게만 키웠다는 자괴감이 몰려와 괴로웠다. 아빠가 너를 필리핀으로 떠나 보내고 이렇게 상실감이 클지 정말 몰랐단다. 저녁 잠자리에 들면 네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나. 그러면 밖으로 나가 별을 본다.

아딧줄아! 아빠 마음 잘 알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네가 우리 집안의 중심이다. 앞으로 너의 책임이 막중하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너를 필리핀에 괜히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잘 결정한 것 같구나. 아빠는 네가 네 호적의 이름대로 호빈(澔彬), 큰 그릇이 되어 사회에 크게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큰 그릇이라 함은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어떤 방면이든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고수가 되는 걸 말한다. 너는 충분히 그렇게 될 줄로 아빠는 믿는다. 너는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기를 싫어했다. 물론 양보할 때는 양보하고 질 때는 화끈하게 져 주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너는 학생이니 공부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앞으로 한달 보름 후면 새 학년이 시작되는구나. 일단 영어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란다. 충분히 네 생각을 말하고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또 네가 필리핀에서 살고 있으니 그 곳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도 익히고 좋은 장점은 배우도록 해라.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라고 절대 업신여기지 마라. 겸손해야 한다.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께도 겸손하게 예의를 다하기 바란다. 식탁에 어떤 음식이 오르든지 하느님께 감사하고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수고한 모든 사람들께 감사하고 먹어라.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친구들에게 쾌활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거라. 모두 낯선 나라에 와서 고생하고 있으니 따스한 말 한마디도 얼마나 고맙겠니.

매사에 차근차근, 너무 서둘거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밥도 급히 먹으면 체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마찬가지란다. 할머니와 외할머니께 한달에 한번 안부 전화 드려라.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신 분이시다.

넝쿨이는 너 대신 교회 피아노 반주를 잘하고 있단다. 넝쿨이가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딱 1년 배운 피아노 실력으로 성가대 피아노 반주를 한다는 사실이 참 기특하고 대견하구나. 아직까지는 능숙하지는 않지만 점점 실력이 향상되고 있단다.

은빈이는 아침에 학교 가면 저녁밥 먹을 때쯤 집에 온단다. 일주일에 네번 방과 후 학교인 <신나는 학교>에 다닌다. 얼마나 밖에서 놀았는지 얼굴이 완전 깜둥이가 되었구나. 은빈이한테 "너, 큰 오빠 안 보고 싶니"하고 물으면 "아빠는, 당연히 보고 싶지. 같이 살았을 때는 몰랐는데 따로 떨어져서 사니까 오빠가 보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아딧줄아. 가족이 참 소중하지. 너도 가족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느껴지니. 보고 싶어도 참자. 우리집이 남양에 살 때 기억나니? 네가 학교에서부터 차 안 타고 걸어 다녔던 일. 그 때만 생각하면 네가 참 자랑스럽다. 차 안 태워 준다고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지? 10리가 넘는 산길을 다니면서도 한번도 결석이나 지각한 적이 없이. 아빠 엄마가 너 마중 나가면 "아빠!"하고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는데….

▲ 우리집 가족 사진. 교회 소나무 숲에서
ⓒ2004 느릿느릿 박철
네가 보낸 편지 잘 받았다. 느릿느릿 가족들이 네 안부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네 카페에 격문을 보냈는데 고맙다 인사하는 것이 도리겠지. 시간 내서 일일이 답장하기 바란다. 아빠는 어제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초청받아 설교하고 잠실 외할머니 댁에서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국회의원 선거 날이다. 머리 감고 나라를 위해서 국민들이 중지를 모아 좋은 사람을 지도자로 뽑게 해달라고 기도했단다. 너한테 쓰는 편지를 끝내고 다시 교동으로 가려고 한다. 아침 7시 30분 첫배를 타야지.

사랑하는 아딧줄아. 보고 싶구나. 우리 집 모든 식구들이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네 꿈과 장래를 위해서 보고 싶어도 참자. 그럼 잘 있어라. 건강하길 바란다. 아빠는 너를 믿는다. 안녕.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라
96년 아딧줄에게 띄운 편지

▲ 아내와 우리집 아이들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쓰자니 쑥스럽구나. 무슨 일이든 안하던 일을 갑자기 하게 되면 이렇게 쑥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란다. 너에게 편지를 쓴 적이 아빠가 2년 전에 유럽에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구나. 부자지간에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편지로 나누는 일이 참 좋은 일인데, 아빠는 그것을 잘 못했구나.

아딧줄아. 벌써 가을도 지나고 겨울의 길목에 들어섰구나. 그러고 보니 이제 한해도 얼마 남지 않았지.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는구나. 요즘 네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전보다 훨씬 의젓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많이 발전해서 아빠는 참 네가 자랑스럽고 대견하구나. 너는 어려서부터 감정이 풍부했단다. 그 점이 아빠와 많이 닮았다.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폭넓은 사고(생각)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지.

아딧줄아. 올 한해 몸도 건강하게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학교 생활도 재밌어 하고,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동생들과 잘 지내니 아빠는 네게 무얼 더 바랄게 없단다.

그런데 아딧줄아. 너에게 바라는 한 가지 부탁은, 네가 모든 일에 있어서 너무 덤벙거리는 같은데 좀 침착하게 행동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남 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어려서부터 다른 친구의 좋은 장점을 인정해 주고, 친구를 사귀어도 깊이 사귀어서 좋은 친구 관계를 갖는 것이 훨씬 훌륭한 삶이란다.

올 봄 체육대회 때, 네가 동네별 릴레이 경주에서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빠는, 가슴이 방망이질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네가 다른 애들보다 잘 뛰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일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은 아름답단다.

사랑하는 내 아들 아딧줄아. 이제 곧 매서운 바람도 불 것이고, 눈도 내리겠지. 밖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지겠지. 올 겨울에는 아빠가 멋진 썰매를 만들어 줄께. 앞 논에 얼음이 얼면 함께 썰매도 타고 팽이도 돌리고, 또 겨울 방학 때에는 가까운 광교산이라도 함께 등산을 하자. 우리 집 큰 아들 아딧줄(호빈) 파이팅!

- 1996년 11월 17일 다정한 아빠로부터
박철 기자는 강화 교동섬에서 사는 목사이며 시인이다. 지은 책으로는 <어느 자유인의 고백>(신어림)과 최근 출간한 산문집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나무생각)등이 있다. 현재 <느릿느릿 이야기>(http://slowslow.org)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며, ‘느릿느릿’의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과 함께 이 길을 가고 있다.

2004/04/15 오전 11:09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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