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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좀 드실래요?" 영채씨가 장작 난로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가고 있는 가래떡을 내밀었다. 올해 서른 일곱, 임영채씨는 키가 1미터에 불과한 왜소증 1급 장애우다. 그는 몇몇 장애우 평등학교 식구들과 함께 달아오른 난로 가에서 가래떡을 구워 먹고 있었다. 장애우 평등학교에는 영채씨를 비롯해 모두 여덟 명의 1급 장애우들이 한 가족처럼 모여 살고 있다. 이들 중에 영채씨가 막내다. 영채씨는 오랫동안 가족 없이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영채씨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가족 모두 선천성 왜소증이었다. 그런데 영채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과 누나까지 불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온갖 멸시 속에서 장꾼들을 따라 부평초처럼 전국장터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10여년 장꾼 생활로 얻은 것은 병이었다.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복지시설 신세를 지고 있다가 이곳 장애우 평등학교에 들어와 생활한 지 4년째. 장애우 비장애우 가리지 않는 평등한 세상을 꿈꿔왔던 그는 평등학교에서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았다. 마음이 편하니 건강 또한 점차 좋아졌다. 그는 키는 작지만 마음 씀씀이가 그 누구보다 크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짧은 그 역시 휠체어 신세를 져야하지만 여덟 명의 식구들 중에서 비교적 몸놀림이 자유롭다보니 난로 관리는 물론이고 장애우 평등학교의 어지간한 잡일을 맡아 하고 있다. "힘들지만 좋지요, 식구들을 위해 하는 일이니까요, 비록 피를 나눈 형제들은 아니지만 평등학교 사람들은 나한테는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장 1미터의 임영채씨와 장애우 평등학교의 인연
영채씨의 경우처럼 장애우 평등학교 거의 모든 식구들이 이런 저런 복지시설을 경험했다. 거기서는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들에게 그곳은 수용시설이나 다름없었다. 규율에 맞춰 생활해야 했기에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잠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자유조차 없었다. 그들이 머물렀던 복지 시설들은 대부분 종교와 관련이 있던 시설이었는데 반강제적으로 마음에 와 닿지도 않은 기도를 올려야 했다.
"복지사업이라고요? 사업이지요. 복지 시설만 갖춰 놓으면 정부에서 돈 대주니, 사업하는 그들은 꼬박꼬박 월급 받을 수 있죠. 어떤 이들에게는 복지시설이 평생직장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 장애인들은 다릅니다. 그 사람들은 꼬박꼬박 월급 챙기는 복지 사업을 하지만 우리 장애인들에게 대부분의 장애인 복지시설들은 갑갑한 수용 시설일 뿐입니다." 수용시설 불과한 '복지시설' 대신 공동체를 원했다 그런 '힘겨운 복지시설'에서 벗어나 몇몇 장애우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공동체가 바로 '장애우 평등학교'다. "지금은 말끔하게 정리돼 있지만 본래 이곳은 형편없이 낡은 건물이었습니다. 폐교라서 깨진 유리창들이 수두룩했지요. 교실을 개조해 심야보일러를 깔고 방 네 개짜리 숙소로 꾸몄고, 작업실과 전시실 등을 새롭게 단장 하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것은 한 푼도 없습니다. 얼마간의 후원금과 식구들 주머니 돈을 모은 공동 모금으로 꾸려 나가고 있지요. 기초생활보조금과 장애우 수당을 합치면 한 달에 43만 원 정도 되는데, 거기서 18만원씩 거둬 공동자금으로 씁니다. 우리 같은 공동체를 그룹 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은 법적으로 지원 받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법인이 아니라서 단 한 푼도 보조 받지 못하고 있는데, 바라는 게 있다면 복지 법이 개정돼 최소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자금으로 두 사람 정도의 월급을 보조 받았으면 합니다." 장애우 평등학교에서도 나름대로 작은 수익 사업을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서 인삼을 구입해 인삼주를 담아 판매하여 생활비로 보태고 있다. 사업이라고 하지만 외부로 알려지지 않아 가끔씩 찾아오는 후원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이 고작이다. 장애우 평등학교 사람들은 대부분 시와 그림, 공예에 재능이 있는데 그 실력 또한 만만치 않다. 요즘처럼 활동하기 힘든 겨울철에는 난로 가에 모여 앉아 저마다 창작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매년 봄이 돌아오면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연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처음엔 흑암리 주민들 시선도 곱지 않았죠"
하지만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새로 이사 온 이웃으로 받아 줬다. 장애우 평등학교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학교를 농악대 연습 공간으로 내줬고 시낭송회 등의 문화 행사에 초청했다. 마을 주민들 역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며 땔감을 마련해 줬고 폐교를 수리하는데 일손을 보태줬다. 평등학교 후원자들이 고기 근수라도 보내 온 날이면 마을 사람들을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술과 고기 쌈 거리를 들고 찾아와 술잔을 나눴다. "작년 가을에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설악산 단풍놀이도 갔다 왔지요. 이번 대보름 때에도 식구들 몇몇이 마을 회관에 가서 주민들과 어울려 국수를 먹어가며 윷놀이도 했습니다. 학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주민들이 따로 과일을 준비해 줬구요," 장애우 평등학교는 더 이상 이웃사람들의 혐오시설이거나 장애우, 그들만을 위한 닫힌 공간이 아니다. 장애우 비 장애우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추운 겨울날 마을 사람들과 난로 가에 둘러 앉아 고구마를 구워먹고 차를 마시고 때로는 소주잔을 돌리는 쉼터이기도 하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장애우 평등학교를 이웃집 사랑방처럼 들락거리고 있다.
김영국씨의 본업은 농사지만 평등학교에서 들어서면 의자며 낡은 침대를 손보는 솜씨 좋은 목수가 되기도 한다. 고치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나다 하여 평등학교 사람들은 그를 '맥가이버 형님'이라 부르고 있다. 1급 장애우들이 차린 밥상 앞에 앉다 장애우 평등학교 사람들 모두는 비록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1급 장애우들이지만 자신들이 직접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식사 준비는 언제나 주방장 오정희씨가 도맡아 하고 영채씨가 주방 보조 일을 하고 있다. 오정희씨는 2년 전 '이런 사람 있습니다'라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든 상태지만 시를 쓰듯이 언제나 정성을 다 해 식사를 준비한다. 가끔씩 생사를 넘나드는 힘든 몸에도 불구하고 매 끼니 때마다 꼬박꼬박 평등학교 식구들의 식사를 챙겨주고 있는 것이다. 창문 밖으로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평등학교 식구들이 갈 길 먼 내 옷소매를 잡아끈다. 밥 때가 됐는데 그냥 가는 법이 어딨냐고. 저녁 식탁은 조촐했다. 하지만 밥은 참 맛이 있었다. 나는 염치없이 한 그릇을 더 비웠다.
"생활이 어렵긴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습니까?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 속 편합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고 또 그림 그리고 싶을 때 그릴 수 있으니 좋습니다. 계획이요? 날이 풀리면 닭장에 병아리도 사다 놔야 하고, 전시회도 준비해야 하고, 올 봄에는 화단에 꽃을 좀 많이 심을까 합니다." 꽃샘추위로 여전히 땅이 얼어 있었지만 장애우 평등학교 사람들에게는 벌써 화창한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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