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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은 국회의원 배지 떼고 태극기 배지 달고 나왔다." 17일 열린 한명숙 총리 지명자 인사청문회 청문위원으로 나온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의 말이다. 실제로 송 의원의 왼쪽 가슴엔 태극기 문양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그 이유는 한 총리 지명자에 대한 한나라당의 사상 공세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임을 드러내는 우회적인 항의 표시였다. 송 의원은 한 총리지명자가 1979년 중앙정보부가 용공사건으로 발표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 심경을 물었다. -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의 실체를 일체 알려주지 않아서 북한에서 침략한 줄 알았다. 총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송영길 의원이 의원 배지 대신 태극기 달고 나온 까닭
그러면서 북한방송을 청취했다는 대법원의 판결문에 대해선 "북한의 사주를 받아 북한방송 듣는 자생 간첩단으로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고문이 있었다"며 "저는 무인(지장)을 찍기까지 사경을 헤맸다… 여기까지만 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고문에 의한 거짓자백이었다는 얘기다. 1979년 8월 열린 재판 기록에 따르면, 변호사의 반대심문 과정에서 한 지명자는 검찰에서와 상반된 진술을 토해냈다. "'공산당이면 죽인다, 너 공산당이지? 너 남편하고 어떻게 접선했느냐, 네 남편과의 편지가 암호 아니냐, 암호풀이를 대라, 이북에서 누가 내려왔느냐, 배후를 대라, 무슨 조직이 있느냐 대답을 해라…' 따귀를 맞고 힘찬 구둣발로 돌아가며…. 각목으로 온 몸을 두들겨 맞았는데 난 도저히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안난다. 나중에 일어나 보니 뼈 마디마디가 부어있고 온몸에 피가 맺히고 멍이 들어서 걷지도 못했다. 나중에 지하실로 옮길 때 수사관이 부축했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서 완전히 항복했다.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 무릎꿇고 두 손으로 빌었다." 예상보다 약했던 사상공세... 한명숙 "고문수사관, 이미 용서했다" 장상 총리 서리가 땅 투기 의혹으로 물러난 데 이어 두번째 여성 총리 지명자에 대한 시험대였다. 두번째 여성 총리 지명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의 타깃은 '사상 검증'이었다. 한나라당은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처벌받은 통혁당 사건과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을 집중 공략했다.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한 총리 지명자가 나이는 많지만 사고나 행동은 여당 386 의원들과 비슷하지 않나"라며 "때로는 그들의 대모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386 의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말씀해달라"라고 물었다. 또한 이 의원은 "노 대통령과 같은 코드인가"라며 노 대통령의 '좌파신자유주의' 발언을 들어 "이 정부의 좌파 정책은 뭐고 신자유주의 정책은 뭐라고 보나, 예를 들어 보라"고 다그쳤다.
김정훈 의원은 "북한 노동당 규약을 읽어본 적 있나, 몇 번 개정되었는지 아냐"고 물었고, 김재원 의원은 청문회장에서 북한인권 실상을 고발하는 영상물을 상영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예상보다는 한나라당의 사상공세의 강도가 약했다. '색깔 공세'라는 비난 여론을 의식한 결과다. 한 지명자 역시 자신의 민주화운동 경력이나 고문에 관해 말을 아끼며 용서와 화합을 강조했다.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의 '고문 수사관들이 버젓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자 "괜찮다, 내가 당한 것이 개인의 미움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되살리는 게 안 좋다"며 "우리 사회가 지향할 목표를 위해 함께 갈 수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이라는 시대적 요청 앞에 좌우 이데올로기 공세는 맥을 추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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