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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거부한 고은, 고은을 거부하는 고향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6. 6. 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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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거부한 고은, 고은을 거부하는 고향
[이 시대의 시인을 찾아서]무너지는 생가가 한국문학의 현주소라면?
텍스트만보기   채명룡(ml7614) 기자   
시인 고은을 떠올리면 '바람'이 발치께부터 치고 올라온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다. 우리들 주변에서 훌쩍 일어나는 회오리다.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그의 '방황과 질주'가 이어진다.

우리 시대의 방랑자이자 이상주의자였던 고은 시인. 탈속과 환속, 저항과 순응, 이런 것들이 버무려진 통일운동, 민족문학 등이 그의 삶이자 화두이다. '방황과 질주'로 일관한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낭떠러지 같은 시대를 살면서 흔들림이 없었던 그의 외길 인생. 그래서 고은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두의 고개를 숙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치열한 역사 정신 그리고 문학 혼과 시대의 부름에 털털하게 마주서 왔던 시인. 그를 이제부터는 '바람의 시인'이라 이름하자. 그 바람의 시인이 살았던 군산항 서쪽 끝 마을을 찾아가 보자.

그의 고향, 그 삶의 원류를 찾아가는 길은 들풀처럼 손에 잡힌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군산시 미룡동 용둔마을. 미제 방죽(지금은 은파 유원지)의 수문 근처 긴 둑에 이어진 옆길을 따라가다 보면 용둔리 입구이다.

여기부터가 고은 시인의 잊고 싶은 그 날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군산문화원에서 시인의 생가 표지판을 마을 입구에 만들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실제 생가와는 동떨어진 곳에 푯말을 세웠다고 한다.

▲ 용둔리 마을 입구의 고은 시인 생가 표지판.
ⓒ 채명룡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통일운동가인 고은. 그의 생가 표지판이 생가에 설 수 없었던 배경이 무엇일까? 그만큼 이 마을에서의 지난 일이 궁금하기만 하다.

군산의 향토학자 한 분은 "6·25 전쟁 때 용둔리 일대의 좌우익 학살 현장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선산 김씨 일족들과 좌익 활동을 했던 고은 시인 일가친척들과의 풀지 못한 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또 그는 "고향을 등진 뒤로 노모와 가족들을 외면해 왔던 고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감도 절반의 이유쯤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 한국 문학의 현주소인 고은 시인과 생가 푯말이 슬프게 다가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 곳에 서 있지 못하는 푯말 하나 때문만은 아닐 듯하다. 시인이 애써 고향을 잊고 살아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기우일까?

구릉에 낮게 지붕이 깔린 정감 있는 마을 풍경이다. 내면의 아픔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대문호의 반열에 든 그의 현실 속 고향은 암담할 따름이다. 무책임하게 버려져 있는 그의 실제 생가. 쓰러져 가는 옛 집과 수북한 시누대 그리고 잡풀더미들. 이곳이 한국 문학의 현주소인지 가슴에 찬바람이 '씽' 하고 불어온다.

▲ 생가 입구에는 시누대 잡풀이 무성하다.
ⓒ 채명룡
역사 앞에 누구나 피해자였다고 말해야 옳을까? 하지만 설득력이 너무 약하다. 그는 고향을 떠난 이후 노모의 팔순 잔치 때인 지난 1991년 제대로 고향 군산을 찾았다. 그가 "어머니만이 나를 강하게 각성시키는 고향의 사물이다(<방황, 그리고 질주>에서)"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토록 잊고자 했던 게 고향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팔순 생신상 앞에 원죄같이 새기고 살았던 고향 회피 의식도 날개를 접었다. 그 날, 중늙은이가 되어서 차려주었던 노모의 때늦은 생신상 앞에서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인이 그토록 잊어버리려 했던 고향. 제대로 찾은 것을 빼곤 부엉이처럼 용둔리를 찾았을 뿐이었던 고향. 이전에 그가 찾았던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결벽증 환자처럼 말했던 이 곳. 그에게서 고향의 의미를 빼앗아간 살육과 보복의 현장에서 이미 같이 썩어갔던 영혼이기에 "나에겐 고향이 의미는 없다. 통일만이 너와 나의 고향이 서로 부둥켜 안은 사랑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 아닐까?

"나는 고향의 좌우 학살의 참극 이후 그곳을 떠났다. 좀 거창한 용어를 빌리자면 고향 상실자가 됐다. 그리하여 폐허가 된 산야를 떠도는 방랑 자체가 내 청춘의 원칙이 되고 아무도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자 없고, 나 또한 내 고향을 잊어버리고 이 땅의 전후를 떠돌았다." - <방황, 그리고 질주> 중에서

고은 시인은 이렇게 고향을 등지며, 이 땅의 통일 운동가이자 민족문학의 기수로 한 시대를 살아왔다.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질곡의 역사를 온 몸으로 헤쳐 나왔다.

그런 시인도 "80년대 벽두에 세 번째로 감옥에 유폐 됐을 때 나는 아버지의 제삿날을 생각해 냈다. 한밤중 고향의 아버지 무덤 쪽을 짐작해서 그쪽을 향해 멀리 빈 절을 드렸다. 그때 나에게도 고향이 보인 것이다(<방황, 그리고 질주> 중에서)"라고 말한 것과 같이 어느 날 고향이 그의 현실로 다시 찾아들게 된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연중행사일 뿐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편안한 귀향은 아직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가 고향을 찾을 때 으레 찾아보는 곳이 은파 유원지 옆 할미산이다. 청소년기 문학의 꿈을 키웠던 야트막한 산. 6·25 전쟁 때 정신병자처럼 허탈해진 영혼을 쉬기도 했던 곳. 그 할미산을 통해 그가 살았던 생가를 둘러보거나, 그 옆 한적한 어느 곳에 묻혀 있을 그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을 것이리라.

▲ 반듯한 집들 뒤에 쓰러져 가는 고은 생가가 숨어 있다.
ⓒ 채명룡
그러나 그는 고향집을 갈 때면 한사코 동행을 거부한다. 병적이라 싶을 정도로 혼자만의 귀향을 고집하곤 했다. 왜 그랬을까?

고은 시인과 고향 근처로의 동행을 해본 사람들은 이 일에 익숙하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 이건 낯설다. 고은 시인과 한 시대를 같이한 시인 한 분은 '아마도'라는 단서를 붙이고 "어머니의 선영이 너무 초라해서 차마 남에게 보여주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애써 고향을 잊으려 했던 그도 대문호이기에 앞선 기막힌 현실에 약간의 부끄러움도 있었을 터. 그게 부모의 무덤인 바에야 말하면 무엇하랴.

시인이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웠던 곳 용둔리의 일상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시인 고은과는 앞으로 영원히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군산 미제방죽 아래 마을 용둔리.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외면했고 고은 시인 또한 외면하던 이곳,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시인의 옛 집.

썩어 무너져 내리는 그의 옛 집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부끄럽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문학 작품의 정신은 무한할 터. 향토 출신 작가가 아닌 세계 속의 시인으로 벌써 자리매김한 그이기에…. 그의 생가이자 자라오면서 문학 정신의 토대를 닦아왔던 그 집 꼴이 "이것은 아니다"라고 눈시울을 붉히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이 산지 오래된 옛 집.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 채명룡
고은 시인은 자서전격인 <방황, 그리고 질주>에서 이 용둔리 고향에 대해 "1933년∼1951년 사이의 18년 동안 나의 생명을 발생시켜서 키워 준 곳이 바로 이 곳이다"며 "나는 이 곳에서 내가 나의 조상과 아버지를 이어서 살아야 할 1차적 의무를 걷어차 버리고 고향을 떠나서 밖에 살 수 없는 운명까지 이곳에서 획득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운명처럼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그러나 그 또한 60이 다 되어 감옥에 갇힌 어느 날, 고향의 의미를 다시 받아들이는 필연적인 운명을 접하게 된다. 그가 바로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고은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면, 그의 귀향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얼굴색이 너무 엷기만 하다.

▲ 생가 앞 길에서 바라본 마을. 길 왼쪽부터 아파트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 채명룡
이 일대에 앞으로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벌써 고은 시인의 생가 코앞에서 어느 건설사의 아파트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무한한 문학 정신의 모태가 되었을 이 용둔리의 고은 생가를 이대로 방치해 둘 것인가? 곧 있으면 영원히 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릴 그의 옛집의 운명을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들의 가슴에 한 마디의 물음표를 던져 본다.
채명룡 기자는 시인으로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입니다. 군산에 살고 있는 채 기자는 같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고은 시인이 군산을 방문할 때 동행하고 있습니다.
2006-05-31 13:07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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