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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포기도 사랑했던 권정생 선생님, 영면

한국작가회의/[문학회스냅]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7. 5. 1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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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렇게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가난한 이와 풀 한포기도 사랑했던 권정생 선생님
텍스트만보기   손현희(hanbi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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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최종규 선생님한테 얻어 온 권정생 선생님 사진, <죽을 먹어도>겉그림에 쓰인 사진이에요.
ⓒ 최종규
"조금 앞서 뉴스에서 들었는데,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대."
"응? 뭐라고?"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아……."


어제(17일) 저녁 무렵,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한테서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이 멥니다. 아, 선생님이 돌아가시다니….

권정생 선생님을 제대로 알게 된 건 이오덕 선생님 때문이었어요. 우리 부부가 이오덕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올곧게 살려서 쓰는 '우리 말'을 공부하게 되었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했던 선생님을 우러르게 되었지요.

그런 선생님 글 속에는 권 선생님 이야기가 틈틈이 나왔지요. 두 분이 서로 마음 맞춰 하신 일이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오덕 선생님을 생각하는 우리 마음이 그대로 권 선생님한테도 똑같이 닿아 있었거든요. 또 이렇게 우러르는 두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은 이미 우리 곁에 없는 것이 무척 가슴 아팠어요.

지난해 이오덕 선생님이 누워계신 충주 '무너미마을'에 갔을 때, 무덤 앞에서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가슴으로 다짐을 했지요. 선생님이 끝까지 몸바치셨던 '우리 말 살려 쓰는 일'을 꿋꿋하게 따르겠다고요.

그때, 선생님 일을 올곧게 따르면서 일하던 최종규 선생께 권 선생님 사진 한 장을 얻어 와 간직하면서 남편과 함께 약속했던 일이 있어요.

"우리 내년 여름휴가 때는 권 선생님 계신 안동에 꼭 다녀오자! 선생님도 몸이 많이 아프시니까 살아 계실 때 꼭 뵙고 와야지. 안 그러면 이오덕 선생님처럼 두고두고 한이 될 거야."

늘 일에 쫓겨 틈을 낼 수 없다는 핑계로 같은 경상도 땅에 살면서도 진즉에 찾아뵙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슬픈 소식을 들었어요. 아직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시면 우린 어떡합니까?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책, <죽을 먹어도>(아리랑나라)를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웠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른 봄에 마을 아이들이 앞산에 가서 산앵두꽃을 한 아름 꺾어 와서 꽃병에 꽂으려고 할 때, 선생님이 하신 말 때문에 크게 깨달았던 게 하나 있지요.

"야들아, 꽃 어디서 꺾었노?"
"깨끼산에서 꺾었어요. 안죽도 디기 많애요."
"많으면 자꾸 꺾어도 되나? 꽃이 불쌍하지도 않나?"
"꽃이 뭐 불쌍하니껴?"
"왜 안 불쌍노? 꺾으면 죽는데…."
"……."

아이들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어 내 얼굴을 쳐다본다.

"영아야, 꽃도 숨 쉬고 산단다. 요렇게 참한 새 옷 입고 엄마하고 산단다. 그런 걸 꺾어 봐. 너도 모가지 꺾고, 팔 꺾고 해 봐. 피가 나고 디기 아플끼다."
"이 꽃, 병에 꽂아 두마 안 죽고 사니더."
"병에 꽂아 살아도 꽃은 맨 불쌍하지. 깨끼산에 핀 건 깨끼산에 있어야 좋고, 주들 거랑에 핀 건 주들 거랑이 좋고, 시내미에 핀 건 시내미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단다. 우리 안동 꽃은 안동이 고향이고, 강원도에서 핀 건 강원도가 고향이고, 이북에서 핀 건 이북이 고향이지. 꽃이나 사람이나 모두 고향이 최고로 좋단다. 우리 한국에 핀 꽃을 아무도 꺾지 말고 그냥 두면, 저어기 제주도에서 이북 백두산까지 꽃천지가 되고 얼매나 좋겠노, 그지?" (권정생 <죽을 먹어도> 8, 9쪽)


▲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책<죽을 먹어도> 아리랑나라
ⓒ 손현희
흔하고 하찮은 꽃을 꺾었을 뿐인데도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글을 읽기 앞서는 길을 가다 예쁜 풀꽃이 있으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툭 꺾곤 했는데, 그 뒤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어쩌다 작은 풀꽃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가도 곧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 뉘우치곤 했지요. 또 그때부터는 길섶에 피어 있는 작고 여린 풀 이파리 하나도 아주 남다르게 여겨졌어요. 매우 소중한 목숨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우리는 선생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다지 잘 알지도 못해요. 오직 책으로만 선생님을 알아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그렇더라도 우리 마음에는 언제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분으로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살아 계실 때 뵙지 못한 것이 몹시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네요. 너무나 게으른 우리를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과 형제처럼, 또 동무처럼 그렇게 지내셨지요? 아마 지금쯤은 먼저 가셨던 이오덕 선생님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덜 외로우리라 믿습니다.

선생님, 이 땅을 떠나시면서 모든 인세를 어린이를 위하여 써 달라고 하셨다지요? 사는 동안 내내 자연을 사랑하고, 보잘 것 없는 걸 더욱 사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겨레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던 선생님!

이제 이 땅에서 짊어지고 있던 굴레는 모두 벗어버리고 편안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강아지 똥>의 작가 권정생 영면
텍스트만보기   박건(박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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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일흔이셨다. 권정생의 건강을 아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하셨다. 전우익 선생보다 이오덕 선생보다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 그러나 두 분이 먼저 떠나시고 몇 해를 더 사셨다. 이오덕 선생이 별세하셨을 때 나타나지 않으셨다. 가도 그를 볼 수 없으니 갈 일 없다 하셨다. 그리고 이제 하늘에서 세분이 만나셨다. 호상이다.

무릇 생명이란 죽음을 전제로 있는게 아닌가. 그러니 어떤 생명인들 소중하지 않은게 있을까. 진짜 가엾은 것은 인간들이 저 죽을 줄 모르고 알량한 지식과 부와 권력으로 저지르는 편가르기와 싸움이다. 이 폭력의 한 가운데 돈과 기술과 경쟁이 있다. 돈과 부의 축적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라크 전쟁도 그렇고 우리의 분단도 그렇다. 이로 말미암아 희생과 고통을 받는 쪽은 늘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다.

권정생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몽실언니>가 티브이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받은 돈도 어린이 문학협의회에 보태라고 고스란히 떠넘기기도 했는데 회원들이 이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자신의 책이 <느낌표>에 방영되면 베스트 셀러가 될텐데도 아이들이 책방에서 스스로 책을 고르는 행복을 빼앗는다고 티브이 방영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는 돈보다 생명과 인간을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천하고 버림받은 쪽에 있었다. 사람 뿐 아니라 무지랭이도 그랬다. 흔한 개똥을 보고 <강아지똥>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방에 생쥐를 내치지 않은 일도, 풀벌레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자연과 사람을 중심에 놓고 길어 올린 삶의 철학이다.

권정생은 객지를 떠돌다가 나이 서른에(1967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머믈게 된다. 마을 교회 종지기를 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동화로 풀어내고 희망을 쏘아 올리는 일에 어렵살이 몰두했다.

1969년 <강아지 똥>을 발표하고 월간<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이 때 이현주 목사가 쓴 시상식 풍경이다.

'그 상을 받으러 상경했을 때였다. 틀림없이 장터 행상에서 샀을 허름한 코트를 목이 긴 털 셔츠 위에 걸치고 무릎이 벌쭉하니 나와 종아리가 다 드러난 검정 바지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것은 빳빳한 와이셔츠 깃 아래 어지러운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윤이 나도록 손질한 가죽구두를 신은 서울 놈들에게 통괘한 일격이었다. 권정생의 동화는 고스란히 그의 삶에서 나온 것이고 그 동안 형식과 말장난에 치우쳐 얼빠진 어린이 문학에 우리들의 삶과 정신을 되살려 놓은 것이다.

이오덕 선생도 권정생의 동화가 생명의 소중함과 폭력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것임을 그의 생활을 통해 밝혀 놓고 있다.

'한번은 찾아갔더니 교회를 둘러쌌던 탱자나무 울타리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 벽돌담이 높이 둘러쳐 있고 커다란 철대문이 잠겨 있어 몸시 서운했다. 교회 앞 마당에 서 있던 몇 그루 커다란 참나무들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교회에서 새마을 운동을 한다고 그리한 것이란다. 권 선생이 나무를 베지 말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에 어린 대추 나무 하나가 남아있는 것마저 톱으로 베고 있는 것을 권 선생이 그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톱질을 그만 두더라는 것이다. 그 대추나무를 살펴보니 밑둥치에 정말 톱으로 반쯤 베다만 흔적이 보였다.'

권정생은 생명에 대한 사랑을 말로만 한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문학으로 실천 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러니 그는 어떤 종교인 보다 신앙인 보다 예수의 삶과 가깝게 실천하다 간 사람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던가. 그는 갔어도 그가 남긴 동화속에 부활하여 돌아다닐 거다.

ⓒ 길벗어린이
나는 <강아지 똥>을 넘어서는 감동을 다른 동화에서 받지 못했다. <강아지 똥>은 우리말로 쓴 동화로 세계 어린이와 함께 나누어도 손색이 없을 훌륭한 동화다.신델렐라, 콩쥐팥쥐, 안데르센 동화에도 현실의 아픔을 아름답게 극복하는 삶에서 오는 감동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강아지 똥>의 놀라움으로 두번째 찾아 읽은 책이 <몽실언니>다. 저녁을 물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식탁에서 밤을 새워 새벽녘 까지 눈물을 삼키며 읽었다. 소년소설이라고 하지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읽어야 할 우리가 겪고 있는 분단의 아픔과 슬픔이 몽실이의 삶에 고스란이 박혀있다.

권정생 문학의 주제는 정치와 사회의 부조리, 이를테면 분단과 전쟁이 어린이와 여자, 없는자와 약한자에게 어떤 상처와 고통을 주는지 깨우쳐 준다. 이는 스스로 깜박거리는 목숨의 불을 간신히 피워 가면서 온갖 신체적, 물질적, 또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온 자신이 보고, 겪고, 들은 이야기들에 가깝다. 그리고 억눌리고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참 인간의 모습과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권정생은 작고 보잘것 없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굴곡 많은 역사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 <몽실언니>는 나중에 티브이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하고 <강아지 똥>은 그림책,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 지고 연극으로도 올려지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어린이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선다.

권정생의 어린이 문학 정신이 이시대에 누구 보다 소중한 까닭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떠났어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숨을 쉴것이다.

발인은 20일 오전 9시, 장지는 생가가 있는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로 하기로 하고. 유족은 없으며 장례는 6.15 민족문학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공동 주관하는 민족문학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054-820-1675.

 

 

 

[블로그] 우리 곁을 떠난 몽실 언니
블로그
» 작년 10월 29일 지금은 고인이 되신 권정생 선생님과 함께. ⓒ 한겨레 블로그 조은친구
방금(17일 저녁)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지난해 10월 가을 어느 날 제가 방문하고 돌아온 이후 늘 제 마음 한켠을 지키고 계셨던 그 분이 떠나신 것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천형 같은 병을 안고 살다가신 선생님. 그 분은 바로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던 정(情)을 쓰다듬어 깨우고 갔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몽실언니였습니다. 아마 아동작가로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기에 얼마든지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50년 전이나 60년 전이나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살다갔습니다.

모두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다급함에 허덕이는 세상에서. 그는 한 길이나 자란 풀이 덮힌 마당을 오가며, 한평도 안되는 방에서 그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수줍음이 유난히 많았던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 우리는 몽실 언니를 더욱 더 가슴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 권정생 선생님은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면서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 한겨레 블로그 조은친구

» 권 선생님의 집. 한 길이나 자란 풀이 덮힌 마당을 뒤덮고 있었다. ⓒ 한겨레 블로그 조은친구

» 고 권정생 선생님의 방. 세간살이와 책들도 발디딜 틈없이 빼곡했다. ⓒ 한겨레 블로그 조은친구




» 한 사람이 몸을 구겨 넣으면 간신히 누을 수 있을만한, 채 한평도 되지 않을 공간에서 생활하셨던 권 선생님. ⓒ 한겨레 블로그 조은친구

» 집 뒤켠 화장실. ⓒ 한겨레 블로그 조은친구
» 고 권정생 선생님. ⓒ 한겨레 블로그 조은친구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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