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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잃은 언론노동운동의 쓸쓸한 위기

세상사는얘기/다산함께읽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7. 10. 2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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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잃은 언론노동운동의 쓸쓸한 위기
[손석춘의 길] 서로의 진정성을 믿고 손잡을 수 있는 방법 찾을 때
 
손석춘
 
쓸쓸하다. 참 오랜만에 <언론노보>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을 때만 해도 미처 몰랐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웠다. 아니 참담했다.
 
본디 원고 청탁의 주제였던 ‘방송의 공공성’이나 ‘대선보도’가 아닌 언론운동의 위기를 쓰는 까닭이다. 언론노조를 둘러싸고 날선 갈등을 벌이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아주 사사로운 감상부터 고백하고 싶다.
 
실제로 언론노조의 위기 앞에서 언론노동운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당시 한 방송사 노조위원장은 그 방송사의 사장이 되었다. 한 신문사 노조위원장은  청와대 홍보수석이다. 언론노조라는 공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만이 아니라 방송사와 신문사 현업에서 책임과 권한이 많은 자리에 올라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창립선언문을 쓸 때도 떠올랐다. 그랬다. 비단 언론노조만이 아니다. 언론개혁시민연대를 창립하는 데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와 국정홍보처, 방송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곳으로 갔다.
 
물론, 언론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평생 운동만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꼭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다. 언론운동에 나섰을 때 생각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자리에 가서 제 구실을 한다면 좋은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 분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아니다. 특히 정치권력과 가까운 자리로 갈수록 그렇다. 과연 저 사람들이 나와 더불어 언론운동을 했던 그 사람인지 판단이 혼란스럽다.
 
언론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만이 아니다. 기실 내게 쓸쓸함을 준 것은 <언론노보>와 <기자협회보>에서 함께 열정을 나눴던 후배들이다. 지금은 대부분 청와대와 국정홍보처에서 근무하고 있다. 더 솔직해야겠다. <한겨레> 밖에서 언론운동을 함께 했던 후배들만이 아니다. <한겨레>를 그만둘 때의 조건이라고 믿었던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서 계속 활동하고 싶었지만, 편집인으로부터 두 번 해촉 당했다.
 
그러나 정작 나를 견디기 힘들게 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한겨레 노조위원장 시절에 노조간부로서 함께 ‘구조 조정’을 막고 편집국장 직선제를 쟁취했던 몇몇 핵심 후배들의 침묵이었다.
 
지금은 언론계 밖에서 ‘언론인 아닌 언론인’으로 글을 써가며, 몹시 쓸쓸했던 추억마저 어느새 웃으며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편집인에게 해촉 철회를 요구하며 서명운동에 나서주었던 젊은 후배들은 지금도 <한겨레>를 읽는 희망이다. 
 
그럼에도 굳이 사사로운 경험까지 털어놓는 이유는 언론운동에 나섰거나 나설 후배들에게 ‘처음의 뜻’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그래서다. 잘난 체 한다는 손가락질을 감수하고 묻는다. 왜인가. 왜 처음의 뜻을 다들 잊어 가는가. 혹시 대의보다 눈앞의 자기 목표를 더 앞세우는 게 한 원인은 아닐까. 지금 날 선 공방을 벌이고 있는 언론운동의 현업인들에게 성찰을 간곡히 당부하는 까닭이다. 과연 10년 뒤, 아니 5년 뒤, 아니 혹 짧게는 6개월 뒤에도, 뜻을 굽히지 않을 확신이 있는가. 언론 민주화나 언론개혁이나 진보언론을 삶의 신념으로 체화하고 있는가.
 
▲새사연 대안캠프 참가자들을 환영하고 있는 손석춘 원장     ©새사연 제공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감히 자중을 권하고 싶다. 다시 이야기를 좁혀서 언론노조로 국한해보자. 언론노동운동이 자신의 흔들림 없는 철학이라는 자기 확신이 없다면, 언론노조 안에서 날 선 공방을 벌일 때 조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지금 언론운동은 언론노동운동만의 위기가 아니기에 더 그렇다. 한국기자협회도 심상치 않다. 시민언론운동도 흔들린 지 오래다. ‘비판 언론학계’마저 ‘소금’을 잃어가고 있다.
 
바로 그래서다. 언론노동운동의 재건이 절실한 것은. 그 재건의 길은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있지 않다. 머리를 맞대고 마주앉아 서로의 진정성을 믿고 손잡을 수 있는 방법을 하루빨리 찾을 때다. 언론운동에 철학이 뚜렷하고 깨끗한 뜻을 갖춘 언론노동자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오늘이다.
 
* 본문은 언론노조 발행 <언론노보> 제442호 10월 24일 수요일자 특별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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