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로 부대끼는 사람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만나든 먼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고 믿음 가져야한다. 그게 행복한 삶을 위한 시발점이자 성공을 향한 대전제다. 그런데도 일상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자기 안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거나 실망을 맛본 아픔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나 선량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고, 조그만 일 하나에도 서로를 믿지 못한다.
불신의 벽이 두텁다. 불신의 벽을 타파하는 데는 우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자기가 하려는 말만 하고 남의 말에는 귀를 막는 사람이 흔하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서로를 아끼고 챙겨주어야 한다.
그런데, 지극히 사소한 일에 매몰되어 그것을 책잡으려고 하다면 십중팔구는 서로 얼굴 맞대고픈 마음이 싹 가실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말보다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말보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한다. 남을 잘 이해하는 것도 호감을 얻는 한 방법이다. ‘호감’이란 ‘따뜻한 느낌’과 ‘이해’란 ‘넉넉한 헤아림’은 그저 얻어지지 않는다. 상호 신뢰와 공감적 이해가 필요하다.
당나라 시인 백낙청의 시에 나오는 ‘비익’이라는 새는 날개가 하나만 있는 새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절대로 날 수가 없다고 한다. 두 마리가 서로 기대어 함께 날갯짓을 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내가 낮고 작아져 그가 되어야한다. 같은 눈높이를 갖지 않고서는 상대방의 참모습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일방적으로 핍박을 받아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호소하는데도 그것을 다독여주기는커녕 또 다른 딴지거리를 들이대며 애꿎게 사람 마음을 할퀸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더구나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하는 데도 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들이지 않는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는 것만큼 낭패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상대방의 참모습을 보려면 눈높이를 같이 하여야
한 사람을 알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언제나 내가 그의 한쪽 날개가 되어주는 공감적 이해가 필요하다. 믿음은 거울의 유리와도 같아 한 번 금이 가면 원래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의 동의어는 바로 믿음이다. 살면서 믿음이라는 돌덩이가 하나하나 쌓여 사랑이라는 탑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수천, 수백의 작은 믿음들이 쌓여 거대한 사랑을 이루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사랑이 무너져 내리는 데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 소요될 뿐이다. 그 수천, 수백 개의 믿음이라는 돌 중에서 하나의 돌만 빼내어도 그 사랑으로 쌓은 탑은 단숨에 무너지고 만다.
정말 곤혹스런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은 알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욕심을 갖는 것에만 밀착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믿는 것이란 것을. 그리고 그 믿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하나라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날카로운 말이나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말은 외과의사도 치료하기 힘든 상처를 낸다는 것을.
사랑은 비익조처럼 연리지같이 서로를 공감하는 것이다
사랑의 처음은 언제나 상대방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바탕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비익조초럼 연리지같이 하나가 되어 그의 말과 그의 침묵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난은 그의 말을 충분히 들어본 후에, 그와 같은 처지에 서 보고 난 이후에 해도 언제나 늦지 않다. 사랑하거든 먼저 상대를 믿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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