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찾아드는 스산한 바람결에 하나 둘 지녀왔을 아픔들이 되살아 나는 계절, 많은 이들이 잊었던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해매본다. 늘 다니던 길가에선 시세대가 열광한다는 요란한 멜로디가 20세기 이땅의 유일한 이미지와 감성인 양 으시댄다. 책방에 들러 신예 시인들의 시집을 들춰본다. 제목이 주는 강렬한 끌림뒤에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쓸쓸함과 허기진 감정. 이럴 때 우리는 따뜻한 차 한잔을 함께 마실 누군가를 생각해 본다. 그저 푸념과 넋두리가 되어 버릴지 모를 나의 감상이, 빛나는 그 눈동자만 바라보면 저절로 절제되고 정화되는 그런 사람, 그러나 따뜻한 미소와 아름다운 언어로 아픔을 만져줄 그런 사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좋은생각」의 독자들과 함께 부산으로 달려가 시인 강은교 님을 만나야 했다.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못되는데….” 화사한 웃음 뒤에 반가운 마음이 오래 오래 지속되는 시간이었다.
“아주 작고 소외되고 하찮은 것들의 살아 있는 슬픔에 대한 해석이 제가 앞으로 문학을 통해 이루고 싶은 과제이죠.”
시인 강은교 님이 바다와 더불어 숨쉬는 도시 부산에서 살아온 지 어언 10여년이다. 83년 동아대 국문과 교수가 되면서 시작된 바닷가 생활에 대해 “시를 쓰는 시간은 대개 새벽이나 밤시간인데, 어둠 속에서도 손에 잡을 수 있을 듯이 바다는 늘 생생하게 내게 다가옵니다. 한밤 중에 남항에 정박한 고깃배들의 훤한 불빛, 영도 산중턱에 들어찬 집들이 내쏟는 불빛들이 제게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송도 앞바다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집에 살면서 지켜본 바닷는 그저 낭만적인 곳만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때로는 풍랑과 비바람속에서도 고깃배를 몰고 나가야 하는 삶의 현장이며, 고요함으로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스승이죠.”
하나뿐인 딸을 기르며 생활인으로 부대끼던 나날속에서도 바다는 늘 위안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 딸은 지금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살고 있고, 부산의 민주화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남편과 지내고 있다.
“경쟁사회에 맞는 논리로 아이를 교육하지 않는다고 주위의 걱정을 많이 들었었지요.”
1946년 함남 홍원군에서 출생한 강은교 님은 가족들과 함께 백일만에 서울로 이주해 왔다. 경기여중·고를 거쳐 1968년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면서〈사상계〉지에 시〈순례자의 꿈〉외 2편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71년 시집〈허무집〉 이후 발표된 그이 초기시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시어들은 젊은 날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던 질병의 체험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이제 47세의 나이인 강은교 님. 사춘기 소녀보다 더 풍부한 감성과, 어느 현자보다 노련하고 무게있는 지성으로 세상을 꿰뚫어 보며, 자신의 시 세계를 계속 성숙시켜왔다. 68년〈사상계〉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강은교 님은 당시 여류시인들이 보여준 폭좁은 주제의식과 소박한 서정의 한계를 뛰어넘는 심도와 참신함으로 주로 피와 살, 뼈의 덧없음을 노래하였고, 죽음 곁에 선 존재의 허무가 물, 바다, 강, 바다 등의 어휘속에 깊이 배어든 강렬한 것이었다. 30대 들어 그의 시세계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데 몰두했던 시절을 넘어서 세상속에서 삶과의 화해, 이웃속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최근들어 그는 열병과 빛이 뒤섞인 세계와 일상에 대해 더욱 예민한 감각으로 계속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작년에「벽속의 편지」라는 시집을 한 권 새로 냈고, 문학상도 받았죠. 요즘은 논문준비 등 학교 생활로 좀 분주한 편입니다.” 시인이자 학생들의 스승이기도 한 강은교 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예상과 다른 그의 다정다감한 태도와 명랑한 말소리에 놀라곤 한다. 그분의 시세계가 보여준 치열함과 강렬함 때문에, 게다가 조금은 차가와 보이는 세련된 미인이라는 점 때문에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던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차 한잔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전해오는 따뜻함과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언어들속에서 몇 십년을 함께 지내고 언니같고, 이모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부스러기같은 내 존재의 꿈부스러기를 낸 흰 종이 위에 흐트러놓았을 뿐인 나의 시에서 위로를 받는 이가 있다면, 그날은 행복감에 젖어 잠못 이루고 뒤척이게 되죠.”
겨울바다를 바라보면서 다시 차 한잔 나누자는 인사를 뒤로 버스에 올랐을 때 문득 싱싱한 갯내음속에 강은교 님의 시들을 다시 읽고 싶어져 가방을 열어본다. 필자 : 조선혜님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