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집 앞 공원을 걷는다. 탄천을 따라 산책로가 길게 조성되어 있어 찬찬히 걷기에 참 좋은 코스다. 걷다 보면 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만난다. 같은 시간, 다른 목적으로 그 길을 걷는 사람들. 그들은 뛰기도 걷기도 하며, 앉기도 쉬기도 한다. 나는 혼자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웃어본다. 저들은 어떤 결심으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옆에 함께 걷고 있는 사람과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까. 그러다 공원 한 켠에서 풀을 골라 뽑아내는 할머니 한분을 보게 되었다. 봄 향기 짙은 너른 풀밭, 예쁜 꽃들 사이사이에서 ‘잡초’라 불리는 풀. 이름도 없는 그 풀이 왜 그렇게 뽑혀져야 하는지 문득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에 생명을 부여받아 이미 존재하는 삶을- 누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박탈할 수 있을까. 누가 함부로 그 삶을 ‘어떻다’ 평가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온갖 물음표들이 그려졌다.
잡초(雜草). 백과사전에는 ‘빈터에서 자라며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풀’이라 정의 되어 있다. 똑같은 땅에서 똑같은 햇빛과 물을 먹고 자라는데 왜 어떤 것은 잡초고 어떤 것은 알곡이 되었을까. 열매 맺지 못하게 이미 결정되어 세상에 나온 잡초. 그러나 이미 결정되어 난 것에 대해, 결코 처음부터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제 3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내가 가진 것을 그가 갖지 못했다 하여 그의 삶을 나보다 못하다 할 수 없듯, 잡초의 가치가 알곡보다 덜하다고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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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雜草). 국어사전에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 정의되어 있다. 그래. 잡초의 경쟁력은 열매의 유무가 아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니, 그것으로는 잡초를 이야기 할 수 없다. 가꾸지 않아도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 돌보지 않아도 퍼져나가는 무서운 번식력. 나는 그것을 잡초의 삶에 대한 열정, 가치라 생각한다.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떠한 현실도 견뎌낸다고 했다. 견뎌낼 일이 많은 고된 삶 속에서 잡초는 알곡보다 더 강할 수 있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언제고, ‘잡초 같이’ 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