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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삶을 담금질하다_김신영

박종국에세이/[포토에세이]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6. 2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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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에세이 / 지난 에세이
[ 월간에세이 ] 2008년 11월호
에세이 다큐 꾼-대장장이 / 김신영, 월간에세이 기자
뜨겁게 삶을 담금질하다


빨갛게 달아오른 화덕에서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쇳덩어리를 꺼내 망치로 탕탕탕 치는 소리. 현재 속에 과거가 흐르고 있는 낙안읍성 내의 ‘읍성대장간’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소리이다. 대장간의 뜨거운 열기 탓에 매일같이 여름을 사는 사람, 우리나라 최고령 대장장이인 강호인 할아버지의 힘 있는 망치질로 첫 인사를 대신했다. 광양제철소로 유명한 광양에서 태어나 1944년, 17살 되던 해부터 60년이 넘도록 대장간에서 작지만 행복한 삶을 담금질 해 온 할아버지는 올해로 81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에너지가 넘쳤다. 이제는 사양산업의 길을 걷고 있지만 오랜 세월 농경문화와 함께 희노애락을 겪어온 장인의 손끝으로는 호미, 칼, 낫, 도끼뿐만이 아니라 지네발, 송광사(松廣寺)의 경첩, 나비장식, 말발굽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듯 쇠뭉치를 힘껏 두들기는 대장장이의 뜨거운 삶의 덩어리는 어떤 질감을 가지고 있을까.

-대장장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강호인: 해방되기 전에는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어. 그때는 지금처럼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고 농사일을 해서 밥을 먹어야 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생활 형편이 어중간해서는 안 되겠더라고. 대장장이가 되면 밥은 먹고 살겠다 싶어서 시작을 한거지. 옛날에는 대장장이 일을 상놈들의 일이라고 천대 했지. 그래서 이곳 이름이 ‘대장간’ 아니겠어?(웃음)

-그래도 예전에는 대장간이 잘 됐지요?
-강호인: 그럼, 20년 전 쯤만 하더라도 잘 됐지. 자식 네 명을 대장장이 일로 다 가르치고 취직까지 시켰어. 일이 어려워지니까 가지고 있었던 논밭도 다 팔고 그랬지만.

-요즘에도 대장간에 주문이 들어오나요?
-강호인: 외국 일손도 들어와 버리고, 기계로 다 찍어내 버리니까 거의 없지. 이제는 농촌에서 안 써버리니까 대장장이 일을 해서는 하루에 만원 벌이도 안 되지. 기계가 다 척척 찍어 내버리는데 당연한거야. 예전에는 칼을 하나사면 10년 20년을 써먹고, 칼의 이빨이 나가버리면 대장간에 와서 고치고, 또 쓰고 대를 물려서 썼어. 그런데 요즘에는 녹이 슨다고 안 써. 그나마 여기 낙안읍성에 오는 관광객이나 외국사람들이 와서 식도나 호미 같은 것을 많이 사가지. 어떤 때는 없어서 못 팔기도 해. 어제는 미국 할머니가 와서 미국 가져가서 쓴다고 호미를 사갔어. 그런 거 보면 다시 흥도 나고 기운도 생기고 그러지 뭐.

-작업하실 때 힘들지는 않으세요?
-강호인: 굉장히 힘들지. 쇠몽둥이로 두들겨서 만드니까 몸이 굉장히 피로해. 그래서 한 대장간에 4~5명이서 짝을 지어서 일을 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물건을 못 만들지. 대장간에서 만드는 모든 물건은 망치로 딱딱딱 때려서 만드는데, 두들겨야 잡철이 떨어지거든. 천 번을 때리면 잡철이 천 번 떨어지는 거야. 지금은 그나마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 대장간에서 혼자서 일을 하지. 기계 때문에 밥줄 떨어졌지만 오히려 기계가 있어서 다행이니 참 웃기는 일이지? (웃음)

-대장간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들은 다양하지요?
-강호인: 그럼, 수도 없이 만들어 내지. 한 만 가지 이상은 족히 만들어. 그런데 사람들은 대장간에서 이렇게 많이 만들어내는지, 무엇 무엇을 만드는지 다 알지 못해.

-가장 힘든 작업은 어떤 건가요?
-강호인: 거름치고 올리는, 그 뭐지, 발 여러 개 달린 농기구 있잖아, 그거 만들 때야. 쇠 하나를 가지고 발 다섯 개, 여섯 개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리고 칼이나 낫 같은 거 만들고 나서 열처리 하는 것, 그니깐 물에 담구는 건데, 좀 전에 봤지? 그게 중요한 작업이야. 열처리가 70%~80%고, 작품 만드는 것은 20~30%라고 보면 틀림없어.

-사실 언젠가는 대장간이나 대장장이가 없어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도 하실 것 같은데.
-강호인: 이제는 할 사람이 없어. 30~40십년 했던 사람들도 전부 다른 일 해버리고. 예전에는 호롱불 밑에서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해도 행복했는데.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대장장이로 살아가시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 인가요?
-강호인: 대장간에서는 7년 동안 일을 배워. 마치 6학년 때 졸업 하듯이. 그런데 꼭 중퇴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면 한두 가지 일만 배우고 세밀한 것은 못 배우는 거야. 일이 한참 밀려있을 때, 짝을 지어서 일을 해야 하는데 대장장이들이 도망가 버리니까 골병이 들지. 한 사람만 빠져도 그날 작업이 엉망이 되니까.

-앞으로는 어떤 ‘꾼’으로 살아가실 건가요?
-강호인: 지금껏 해온 것처럼 ‘장인’으로 살아가야지. 안타까운 건 대장장이는 단 한 사람도 ‘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이 없어. ‘장인’은 있지만 국악 하는 사람이나 목수들처럼 국가가 지원해주는 ‘문화재’는 없거든. 사람들은 대장장이가 ‘민속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대장간에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니까 안타까워. 그래도 나는 죽기 전까지 쇠를 두들기면서 행복한 ‘꾼’으로 살아가야지. 그게 맛깔스럽게 사는 맛 아니겠어?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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