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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녀의 분노

박종국에세이/단소리쓴소리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0. 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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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녀의 분노

어느 날 백인 여성 두 명이 나를 찾아왔다. 둘 다 사무실이 환해질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실례지만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내가 책상 앞의 상담의자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묻자 새까만 눈동자의 여자가 잠시 망설이더니, “그리스에서 왔어요. 이혼 소송을 맡아 주세요”라면서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짙푸른 에게 해가 보이는 바닷가 언덕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 동네 처녀들은 한국에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항구에 내렸다며 구경 가자고 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동양 남자는 그곳 처녀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그들 중 K라는 한국인 용접공과 사귀게 되었다. 마흔다섯 살 된 한국인K는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스 처녀와 중년 남자는 곧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K를 부모님에게 소개하고 결혼을 선언했다. 소박한 농부 내외는 사위가 된 한국인을 농장에서 2년 동안 살갑게 보살펴 주었다. 이윽고 해외 취업기간이 끝나자 K는 한국으로 떠나면서 아래를 꼭 초청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약속대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리스로 초청장을 보냈다. 그녀는 이십 년 동안 자란 그리스를 떠나기가 잠시 망설여졌지만 희랍인 조르바의 후예답게 사랑을 선택해 한국으로 날아왔다. 남편은 강원도의 한 조그만 도시에 살고 있었다. 아내가 도착하자 K는 결혼 신고를 하고 그녀를 귀화시켰다. 그녀는 한국인의 아내이자, 영원히 한국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차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은 남이 볼세라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안에서 숨겨 키우는 애완 동물이었다. 그 사이 그녀는 두 명의 예쁜 딸을 낳았다. 아이를 등에 업고 빨래하고 밥 짓는 게 그녀의 생활 전부였다.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텔레비전을 봐도 무슨 소린지 몰랐다. 의사 소통이 안 되고 호기심만 보이는 이웃여자에게 갈 수도 없었다. 남편이 주는 돈도 턱없이 모자랐다. 딸들에게 우유나 과자를 사먹이고 싶어도 남편은 일주일에 만 원 정도만 줄 뿐이었다.

  그녀는 전자제품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사도 돌리고 납땜도 하면서 한 달에 사십오만 원을 받아 남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 돈마저 전부 써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걸 알았다. 그때부터 남편은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혼자 수돗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으면 다가와서 머리채를 잡아 누르면서 온몸을 발로 밟기까지 했다. 등에 업힌 딸이 마당에 떨어졌는데도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편은 부엌으로 가서 칼을 들고 나와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결국 집을 나와 한국에서 사귄 루마니아 여인의 셋방으로 피했다.

  나는 차라리 그리스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안 돼요, 나 돌아가면 우리 애들 못 봐요. 나는 한국인으로 남을래요.”

  그녀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역시 모성애는 목숨보다 강했다. 그녀가 덧붙였다.

  “애들 보고 싶어서 집에 다시 가보니까 남편이 다른 여자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들어오지 말래요. 남편이 방 하나만 얻어 주면 애들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살 수 있는데….”

  그녀가 울먹였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영화에서 보는 유럽 처녀들의 명랑함 대신 타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고 있는 동양적인 침울함이 배어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소송을 맡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온 금발 여인에게 눈을 돌려 그리스인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나는 그 여인을 증인으로 세울 생각이었다.

  “나는 루마니아에서 왔어요. 한국에서 저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이런 걸 언니, 동생이라고 한 대요.”

  그녀가 어깨를 움칫하는 서양인 특유의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법정에서 증인을 설 수 있냐고 하자 그녀는 냉큼 손사래를 쳤다.

  “나 증인 안 설래요. 저 여자가 얻어 맞았다고 연락해서 한 번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저 여자 남편이 나를 찾아와서 나도 죽이겠다고 그랬어요. 나 증인 서면 그 남자가 나를 죽일 거예요.”

  루마니아 여인의 얼굴에는 공포심이 가득했다. 두 여자의 배신감과 분노가 그대로 나의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한국 남자들 이상해요. 남편이라는 사람은 벌써 다른 여자하고 살아요. 그런데도 이 여자 남편은 절대로 이혼은 안 된대요. 위자료 받아낼까 봐 그런대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거 다 필요없다고 말했는데도 못 믿겠대요.”

  금발의 여인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애정이 존재해야만 결혼 생활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이혼은 당연했다.

  이미 세계가 한울타리다. 이제는 우리도 앞과 뒤가 일관되고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 주위의 눈을 의식하고 그녀를 숨기는 행동을 하려면 그녀의 남편은 아예 그녀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이제 깊은 낭떠러지 앞에 서 있다. 자칫하면 유흥가는 사창가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해야 하는 게 진리다. 그러기 위해서 상처 받은 외국인들을 먼저 어루만져야만 우리는 진정한 세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은빛 남자의 금빛 이야기>등의 책을 쓴 엄상익 변호사님은 법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과 세상을 사는 바른 이치를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


필자 : 엄상익님 변호사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9년 06월호


퍼온 곳 : 좋은생각 [행복한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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