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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하면서도 당당하고 날렵한 '영남루'

한국작가회의/오마이뉴스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0. 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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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하면서도 당당하고 날렵한 '영남루'
영남루는 밀양 사람들의 푸근한 얼굴이다
08.10.21 13:33 ㅣ최종 업데이트 08.10.21 13:33 박종국 (jongkuk600)

  
▲ 밀양 영남루(보물 제 147호) 밀양 영남루는 육중하고 당당하며, 날렵하다.
ⓒ 박종국
영남루

밀양을 찾을 때마다 마음 푸근하다. 무엇 때문일까. 도시 자체가 그다지 큰 덩치를 가진 것도 아니요, 차량 물결로 붐비지 않아 좋다. 사람들은 온화하다. 얼굴 표정이 선하다. 더불어 도도히 흐르는 남천강(일명 밀양강) 기슭에 자리한 영남루가 있어 자칫 휘둘렸던 마음을 말끔히 풀어준다. 그래서 밀양이 좋다.

 

영남루는 추화산을 등지고 남천강 맑은 물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절벽 위에 좌우 익루를 끼고 날아갈 듯 서있는 누각이다. 그 모습은 주위의 경승(景勝)과 더불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렇기에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3대 명루다. 

 

  
▲ 영남루의 웅장한 자태 영남루(보물 제147호)는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박종국
전축미

밀양이 좋은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밀양의 옛 지명은 ‘미리벌’(미리벌은 밀양의 옛 이름으로 용의 순 우리말인 '미르'와 넓고 평평하게 생긴 땅을 뜻하는 '벌'의 합성어다.). 햇볕이 가득한 곳, 용이 사는 볕이 잘 드는 곳이 밀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밀양 근동에는 언제든 걸쭉한 토속어로 만날 수 있는 문화예술인이 많다. 특히 『쌈지골』의 김춘복 소설가, 『천천히 오는 기다림』의 이응인, 『환한 저녁』의 고증식 시인과는 친교가 두텁다.  

 

밀양사람들은 온화하다

 

예년 같으면 시월 이맘때쯤이면 제법 옷깃을 여며야할 만큼 서늘한 날씨일 텐데도, 밀양다리를 건너 오르막을 거푸 올랐더니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다. 멀리서 봤을 때는 영남루만 보였는데, 다리품을 팔아 닿고 보니 박시춘 선생의 생가를 먼저 만났다.

 

영남루 뒤편에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정거장‘ ’신라의 달밤‘ ’‘고향만리’ ‘럭키서울’ 등 민족의 애환과 희망을 담은 주옥같은 대중가요 3천여 곡을 작곡하여 한국가요사의 금자탑을 세운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생가와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 그리고 선생의 흉상이 있다.

 

  
▲ 박시춘 흉상과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 영남루 뒤편에 있는 박시춘 노래비와 흉상
ⓒ 박종국
흉상

  
▲ 박시춘 생가(집터) 박시춘 생가(집터)가 복원 돼 있다.
ⓒ 박종국
생가

 

박시춘 선생은 한때 친일작곡가로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대표적인 친일가요 음반으로는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결사대의 안해』등이 있다. 강점기 시대였던 것만큼 이것이 강제로 작곡되었든 자의로 작곡되었든지 알 수 없으나, 어떻던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져 싸늘하구나  

    _ ‘애수의 소야곡’ 부분

 

누구나 견해는 달리 할 수 있다. 필자는 박시춘 선생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항간에 박시춘 선생이 밀양을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밀양에는 많은 예술인들이 있다. 타향 사람으로 박시춘 선생은 밀양사람이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애환과 희망을 노래했던 예술인이다. 밀양이 진정한 문화예술의 도시라면 작곡가 박시춘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박시춘 가요제를 통해서 발현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박시춘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

 

이어 영남루 앞에 섰다. 육중하면서도 당당하고, 또한 날렵하다. 영남루(보물 제147호)는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신라 법흥왕 때 세워진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 자리에 1365년(공민왕 14) 김주(金湊)가 창건한 것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이 거듭되었는데, 밀양도호부의 객사 소속으로 된 것은 1611년(광해군 3) 객사를 영남루 북쪽에 새로 지으면서부터이다. 지금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에 부사 이인재(李寅在)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영남루 전체적인 모습 영남루는 바라다보는 즐거움과 특이한 내부 구조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한 충량과 퇴량은 물론 대형 대들보가 모두 화려한 용신으로 조각되어 있는가 하면,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들의 시문 현판들이 즐비하다.
ⓒ 박종국
볼거리

 

우선 누각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안내 자료를 참고삼아 그 규모를 따져봤다. 정면 5칸,·옆면 4칸의 중층누각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내부 모습은 무척 크다. 건물의 기둥이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루에 올라가 처연하게 휴식을 취하며 보는 밀양강의 전경은 참 아름답다. 그 감흥은 진주 남강의 촉석루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 영남루 훑어보기1 영남루 기둥은 높고 사이 간격이 넓다.
ⓒ 박종국
기둥

  
▲ 영남루 훑어보기2 2층 마루는 넓찍해서 한꺼번에 삼사백명은 능히 앉아 쉴 수 있을 정도다.
ⓒ 박종국
마루

  
▲ 영남루 훑어보기3 영남루 내부 천장 모습,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들의 시문 현판들이 즐비하다.
ⓒ 박종국
현판

  
▲ 영남루 훑어보기4 내부 천장에 걸려 있는 '영남제일루' 현판
ⓒ 박종국
영남제일루

 

 

마루는 넓게 깔린 2층 평면은 내외진(內外陳)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기둥 사이의 사면을 모두 개방했다. 공포는 익공양식의 건축으로는 가장 쇠서가 많은 3익공계이다. 마루 난간에 앉으면 밀양강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봄여름가을철이면 마루바닥이 비좁을 정도로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풍류가 절로 우러나온단다.

 

영남루는 육중하면서도 당당하고 날렵하다

 

건물 서쪽 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에 겹처마 형식으로 처리해 꾸며졌다. 또한 건물 안쪽 윗부분에서 용 조각으로 장식한 건축 부재를 볼 수 있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본루는 조선 후반기의 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부속 건물로는 능파당(陵波堂)과 침류각(枕流閣)의 양익루(兩翼樓)를 비롯하여 사주문(四柱門), 일주문(一柱門), 객사(客舍)인 천진궁(天鎭宮)이 있으며 뜰에는 유명한 석화(石花)가 깔려 있다.

 

  
▲ 영남루 석화 천진궁 뜰 앞에는 그 유명한 석화가 깔려 있다..
ⓒ 박종국
천진궁
  
▲ 영남루의 삭화 영남루 일대에는 '석화'가 많다.
ⓒ 박종국
석화

 

 

영남루는 바라다보는 즐거움과 특이한 내부 구조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한 충량과 퇴량은 물론 대형 대들보가 모두 화려한 용신으로 조각되어 있는가 하면,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들의 시문 현판들이 즐비하다.

 

  
▲ 영남루 현판 ‘영남루’의 현판 글씨는 추사체의 대가 구한말 송파 하동주의 글이다.
ⓒ 박종국
현판

  
▲ 영남제일루 현판 영남루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들의 시문 현판들이 즐비하다.
ⓒ 박종국
영남제일루

‘영남루’의 현판 글씨는 추사체의 대가 구한말 송파 하동주의 글이다. 송파의 글은 이곳뿐만 아니라 진주의 촉석루, 양산 통도사, 고성의 옥천사, 통영의 안정사, 용화사, 부산 범어사에서도 볼 수 있다.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들의 시문 현판들이 즐비하다

 

영남루의 동쪽에는 능파각(凌波閣), 서쪽에는 침류각(枕流閣)이라는 2채의 부속건물이 있으며, 그 중 낮게 위치한 침류각은 3단계로 낮아지는 계단 건물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 외관에 변화와 조화를 추구한 점이 주목된다. 또한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고 편액된 누각답게 밀양강을 끼고 절벽 위에서 굽어보는 주변 경관이 뛰어나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누각으로, 누각 부근의 풍광은 조선 16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 밀양 아리랑비 밀양이라면 또 하나 빼어놓을 수 없는 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오소. 그 유명한 ’밀양 아리랑비
ⓒ 박종국
밀양 아리랑

영남루 주변에는 유서 깊은 곳이 몇 군데 있다. 남천강 쪽의 돌계단을 오르면 오른편에 조금 남은 옛 성터를 볼 수 있고, 사주문을 들어서면 일주문과 객사(현재 천진궁)와 밀성대군단전 등의 건물이 있다. 또한 영남루를 비껴나 밀양이라면 또 하나 빼어놓을 수 없는 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오소. 그 유명한 ’밀양 아리랑비가 있다. 

 

그 곳에서 조금더 내려가면  ‘아랑각으로 들어가는 ‘정순문’에 이른다. 이곳에 ‘아랑유지비’가 있다. 아랑각에는 고 육영수 여사께서 기증한 미당 김은호 화백의 아랑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전설의 고향이나 납량특집에 자주 등장했던 아랑의 전설, 그 아랑의 혼(정절)이 살아 있는 곳이다. 

 

밀양은 ‘밀양 아리랑’과 ‘아랑의 혼’이 살아 있는 곳

 

다시 영남루에 올랐다. 다만 객사인 천진궁이 수리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 따스한 가을햇살 누각 가득 채운 것으로 보아 점심때는 이즈막에 지난 것 같았다. 출출한 뱃속을 달래려 밀양돼지국밥집으로 향하려다말고 밀양강을 내려다보았다.

 

  
▲ 아랑각 정순문 ‘아랑각’으로 들어가는 ‘정순문’에 이르면 이곳에 ‘아랑유지비’가 있다.
ⓒ 박종국
아랑

  
▲ 아랑 영정 아랑각에는 고 육영수 여사께서 기증한 미당 김은호 화백의 아랑 영정이 모셔져 있다.
ⓒ 박종국
영정
  
▲ 아랑의 전설1 전설의 고향이나 납량특집에 자주 등장했던 아랑의 전설
ⓒ 박종국
전설

  
▲ 아랑의 전성2 아랑이 지킨 순결의 정신을 기리어 아랑사당을 짓고 지금까지도 매년 모범된 규수들을 뽑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박종국
정절

 

순간, 지난 수백 년 세월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에 순결의 정절을 가다듬고 있을 아랑아씨에 머물렀다. 지금도 밀양에서는 아랑이 지킨 순결의 정신을 기리어 아랑사당을 짓고 지금까지도 매년 모범된 규수들을 뽑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 천진궁과 석화 그 유명한 석화는 챙겨봤으나 천진궁은 수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
ⓒ 박종국
천진궁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미디어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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