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학창 시절, 조금은 투박한 종이 위에 네모반듯한 프레임 가득 까맣게 실린 꿈과 상상의 세계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세계는 바로 만화의 세계, 만화적 서사와 대중의 만남에 있다. 특히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만화, 그 시절 감성의 본류가 숨어있는 만화가 있다면 바로 순정만화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를 이제 만화는 종이에서 모니터, 즉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감성을 전달하고, 새로운 방식의 생산과 소비, 유통구조에 발맞춰 나가며 8·90년대가 그랬듯 순정만화의 르네상스시대를 꿈꾸고 있다. 이런 발걸음에 힘차게 동참한 만화가가 있다. 바로 순정만화의 대모, 만화계의 큰 별 황미나(49) 작가이다.
1980년 <이오니아의 푸른 별>을 시작으로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들과 가장 넓은 창(窓)으로 소통해온 그녀는 다시 21세기의 이야기 문법으로 네티즌이라는 새로운 독자를 만나 자유롭게 경계 허물기를 하고 있다. 치열하게 달려온 30년의 시간이 그저 3년 같다며 넉넉한 웃음을 짓는 그녀는 지금도 하루에 17시간 정도를 연재를 위해 밤낮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일과 매일 ‘논다’라는 표현을 하면서 아직도 그리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난다고 말하는 그녀. 그녀는 어쩌면 우리들이 과거 속에 잠시 놓고 온 감수성을 여전히 가슴에 간직하면서 영원히 잊지 않도록 오늘도 군살 베긴 손으로 펜을 들고 있는지 모른다. 포스트 모던한 가치를 지닌 순정만화, 앞으로 여성의 목소리로 채워진 순정만화가 걸어야 할 길은 무엇일까. 황미나가 그려왔고, 앞으로 그려낼 만화 속 세상은 어떤 질감과 무게로 우리들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다시 그 시절, 순수의 시대를 기대하며 쌀쌀한 가을 저녁, 황미나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분당의 조용한 동네를 찾아가 보았다.
*만화가의 길을 걸어오신 지 어느새 30년이 훌쩍 넘었네요. 사실 당시에는 ‘여성만화가’라는 시대적 편견이 있었을 텐데 만화가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계기나 동기라기보다는 생활 아니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였어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으니까요. 당시에는 만화 그릴 종이나 도구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하루 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어서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제 허리와 눈이 다 망가졌어요. 지금은 웹툰을 하고 있어서 눈이 더 침침해지고 흐려졌어요.
*최근 만화를 둘러싼 환경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죠? -과거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더 컸지만 최근에는 작가들 스스로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죠.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들을 좋아하는 독자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 거에요. 물론 독자는 여전히 존재해요. 하지만 예전처럼 작가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이 많이 사라진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종이질을 느끼며 흑백톤의 만화를 즐기는 시대에서 스크롤바를 올렸다 내리면서 세로로 올 컬러 만화를 즐기는 웹툰 시대가 왔죠. 독자들의 반응도 직접적이고 즉각적이어서 댓글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어요. 만화를 읽는 그 순간, 찰나의 느낌과 생각을 바로바로 볼 수 있잖아요. 직접적인 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의 모티브는 주로 어디에서 얻나요? -일상생활에서요. 하지만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거기에 대한 의문점과 문제의식을 갖는 거죠. 우리는 왜 살아가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것이 설사 정답은 아닐지라도 다양한 이야기가 될 수 있거든요. 그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문제점이나 이슈거리가 스토리로 발전하는 거예요. 어릴 적에는 만화책을 비롯해서 명작소설 등 책은 가리지 않고 모두 섭렵했어요. 오히려 지금은 문자텍스트로 된 것보다 영상텍스트 쪽을 즐겨보는 편이에요. 늘 무엇인가를 봐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잠자는 시간 외에는 눈을 쉬게 만든 적이 없다고 보면 되요. 자기 직전까지도 뭔가를 봐야하는 습관이 생겨버려서(웃음).
*그동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창작의 고통을 느끼거나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다행이 저는 창작 과정이 ‘고통’으로 여겨지거나 괴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솔직히 일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는 일로 해결했거든요. 어쩌면 중독일 수도 있겠네요. 물론 스토리가 안 풀릴 때도 있지만 그것이 몇 시간을 넘긴 적은 없어요. 또 하나 다행인 것은 제 작품의 문제점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거예요. 작품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어느 대목에서는 웃기도 하고 어느 대목에서 막히면 곧바로 독자와의 리듬과 호흡을 생각하는 거죠.
*60여 편의 작품 중 가장 애착 가는 작품이 있다면.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레드문>을 할 때는 오랫동안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도 독자도 잊지 못한 작품이 됐죠. 지금은 네이버에 연재 중인 <보톡스>라는 작품에 애착이 가요. 원래는 시나리오로 쓴, 약간 자전적인 작품인데, 다시 만화로 수정작업을 하고 있죠. 시나리오와 만화의 호흡은 비슷할 것 같지만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시나리오로 써놨던 작품을 만화로 바꿔서 발표하려니 시간개념, 호흡, 리듬 등이 새로울 수밖에 없어요. 흑백 톤으로 웹툰을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올 컬러로 작업하려니까 시간이 세 배 이상 더 들구요.
*황미나 작가에게 만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사회적인 의미가 아닌 개인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놀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즐기니까 놀이가 되는. 솔직히 쉬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나도 모르게 이전 작품을 ‘자기표절’하게 되고, 다시 같은 장르를 하고 있는 순간, “어, 나 안 되겠다. 왜 또 같은 걸 하지?”라고 자문하면서 자기와의 타협이 두려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한 5년 정도 쉬었어요. 그런데 다시 만화가 생각나더라구요(웃음). 사실 돌아보면 단 한 번도 저절로 몇 걸음 만에 된 적은 없었어요. 늘 장벽이 있었고, 걸리는 게 있었으니까요. 결코 쉽게 이뤄지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그리고 만화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단편영화, 독립영화 한 편씩 찍은 후, 상업영화로 뛰어들고 싶어요. 그리고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제대로 SF에요. 그런데 그릴 일이 끔찍하네요(웃음). 그 작품은 흑백연재가 가능하면 하고 책 출간이나 잡지연재 아니면 일본 연재도 좋구요. 작업 시간이 엄청나서 올 컬러는 불가능해요. 음, 만화가의 보물 1호는 따뜻한 가슴이죠. 나를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가슴, 그것 하나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서사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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