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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우리 세계의 진정한 혁명시인 김남주"

세상사는얘기/삶부추기는글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1. 23.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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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우리 세계의 진정한 혁명시인 김남주"
[김효사의 물봉선생전] 전율 느낀 74년 창작과 비평 <잿더미>와 <진혼가>
 
김효사

한국 현대시史에서 민족의 전사이자, '우리들의 우상'으로 기억되는 김남주 시인(金南柱 : 1945-1994, 경북 고령 출생). 1992년 '집없는 사람들의 조국'이란 시집을 출간하면서 등단한 '물봉' 김남주 시인에 대해, 생전의 그와 '호형호제' 관계에 있었던 김효사 시인이 김 시인과의 문학적 교유, 개인적 에피소드 등을 담은 연재글을 '물봉선생전'이란 부제로 <대자보>에 게재합니다.

김남주 시인의 호(號)인 '물봉'은 '물러터졌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광주지역 방언으로, 전 5.18 재단 이사장 박석무 선생이 김 시인에게 장난처럼 붙여준 별호(別號) 입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김남주 시인의 시와 사상, 인간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의 관심과 조언,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글 머리에>

3년 전 모 인터넷 신문에 연재한 뒤 중단 된 '물봉선생전'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5.18 재단' 전 이사장 박석무 선생은 김남주 시인에 대해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많고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왔지만, 김남주 시인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이자, 소중한 스승이다. 그는 너무도 순진무구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무섭고 치열한 시를 썼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착하고 온순한 어미닭이 자기가 거느리는 병아리들에게 위해가 가해질때 목숨을 걸고 덤비듯, 그가 사랑하는 민족과 민중에게 가해지는 권력과 자본의 폭력 앞에서 목숨을 걸고 덤비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어느덧 15년이 지났지만, 함께했던 나날들을 그리움으로 회상하고 의로운 삶을 돌아보며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같은 시들을 새겨보면서, 거꾸로 가는 이 통탄스러운 시대에 한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열 반
 - 김 남 주 시인께 (김효사)

님이여
저는 보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듯
님께서 가시고
 
통곡과 통음으로
밤낮을 보내다
지쳐 잠든 꿈속에서
 
님께서 여러 불보살들과 함께
그 유난히도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환히 웃고 계시는 모습을
 
아아,
님께서는 가신 것이 아니고
 
민족의 보살이 되셔서
열반에 드신 것이었습니다.

통곡의 날!

1994년 2월 13일은 내 일생을 통해 가장 슬퍼했던 날이다. 75년 4월 9일 인혁당 관련사형 선고자 8명 전원 즉시 사형 집행!  80년 오월 광주! 
 
그때는 슬픔 보다는 분노에 떨고 증오에 몸부림 쳤지만 그날 2월 13일은 한 개인의 죽음을 두고 내가 겪은 가장 슬픈 날이었다.

처음 췌장암에 걸리셨다는 얘기를 듣고 욕실에 들어가 수돗물을 틀어 놓고 엉엉 울었고  경희의료원에 입원 하셨을 때 얼마간 옆에서 간호를 하면서 "밤과 낮이 없구먼" 하시며 고통을 당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나중 고려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 가서는 내내 통곡만 하니 시인의 아우 덕종이가 그만 진정하라고 말릴 정도였다.

실로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고 또 많이도 마셔댔다. 평생에 그렇게 많이 울었던 기억은 없었고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그렇게 많이 울고 많이 슬퍼했더라면 나는 아마 효자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장례식에도 참석을 못했는데 울다 쓰러지고 또 마셔대고 울고 쓰러지고를 되풀이 하다 이남기, 박경용 등 아우들이 “이러다가 효사형님 장례까지 치러야겠다”라며 차에 싣고 납치를 하듯 어디론가 싣고 가 버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나는 날마다 울었고 날마다 마시다 쓰러지고를 했는데 2월 말께나 되었을까 3월 초일까 근 보름 이상을 그러다가 위의 시에서와 같은 꿈을 꾸었고 그때 꿈에서 깨어나 위의 시를 쓰고는  “그렇다!”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슬픔에서 벗어 나기 위해 인천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 현장으로 강원도 삼척의 전화 가설 공사 현장으로 거의 6개월 정도 돌아 다니며 막노동을 했는데...
 
그래서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슬픔과 안타까움은 15년이 지난 오늘도 사라지지 않고 그 15년 동안 단 하루도 김남주 시인을 잊은 적이 없다. 김남주 시인은 “가장 순결한 인간!”, “우리 시대 우리 세계의 진정한 혁명 시인!”이다.

충격! - 창작과 비평 1974년 여름호

<잿더미> -김남주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꽃이다 영혼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꽃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육신의 피를 흘리는가
꽃이여 영혼이여
피여 육신이여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 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꽃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다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숯덩이처럼 검게 타 버리고
잿더미와 함께 사라지던가
 
그대는
새벽을 출발하여
폐허를 가로질러
황혼을 만나 보았는가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난파선(難破船)의 침몰을 보았는가
승천(昇天)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침몰(沈沒)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꽃을 닮고 있던가
피를 닮고 있던가
죽음을 닮고 있던가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려 보았는가 그때
동천(東天)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서천(西天)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죽어 버린 별
죽으러 가는 별
죽음을 기다리는 별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 보았는가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 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廢墟)에서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군거(群居) 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暗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
 
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꽃이여 피여
피여 꽃이여
꽃 속에 피가 흐른다
핏속에 꽃이 보인다
꽃 속에 육신이 보인다
핏속에 영혼이 흐른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그것이다!
 
 
<진혼가>  
- 김남주
 
1.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궁(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
 
2.
쓰고 있다
지금 나는 쓰고 있다
세 겹으로 네 겹으로 갇혀 쓰고 있다
내 탓이다라고
서투른 광대의 설익은
장난 탓이다라고
어설픈 나의 양심 탓이다라고
미지근한 나의 싸움 탓이다라고
모두가 모든 것이 내 탓이다라고
나는 지금 쓰고 있다
움푹 패인 주먹밥 위에
주먹밥에 떨어진 눈물 위에
눈물 같은 국물 위에
환기통 위에 뺑끼통 위에
시멘트 바닥에 허공에 천장에
벽 위에 식구통 위에
감시통 위에 침 발라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혓바닥으로
마르도록 벗겨지도록
피나도록 쓰고 있다
 
여러 골이 쑥밭이 된 것도
여러 집이 뒤집힌 것도
설익은 광대의 서투른
장난 탓이다라고 함께
사랑했다는 탓으로 불려다니고
끌려다니고 밥줄이 막히고 끊어지고
스승의 난처한 입장도 나의
어설픈 양심 탓이다라고
법관의 어색한 표정도
간수의 안타까운 동정도
또 누구의 미안한 응원도 모두가
모든 것이 내 탓이다라고
미지근한 나의 싸움 탓이다라고
공포(恐怖)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내는 데
가장 좋은 무기(武器)이다라고

3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양심과 나의
미지근한 싸움은 참기로 했다
양심이 피를 닮고
싸움이 불을 닮고
피와 불이 자유를 닮고
자유가 시멘트바닥에 응집된
피 같은 불 같은 꽃을 닮고
있다는 것을 배울 때까지는
응집된 꽃이 죽음을 닮고
있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만질 수 있을 때까지는
온몸으로 죽음을
포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양심
미지근한 나의 싸움
양심아 싸움아 너는
차라리 참아라 차라리
참는 게 낫다고 참아라

74년 여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린 8편의 시 가운데 특히 <잿더미>와 <진혼가>를 읽고 충격을 받고 전율을 느꼈다. 
 
나는 만해나 육사의 시와 신동엽등 민족시인들의 시들을 좋아했는데 김남주의 시를 읽으면서 그 분들의 시와는 또 다른 감동을 느끼고 읽고 또 읽고 하여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내 가슴은 몹시도 두근거렸다.
 
내 개인의 얘기를 좀 하자면 나는 대구의 사립 명문 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평소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시험 때가 되면 영화를 보러 다녔는데 그것은 도서관이 시끄러워서이기도 했고 점수 좀 더 받아 보겠다고 끙끙 대는 꼴들이 어린 마음에 무척 가소로워 보이기도 해서였다.

중학교 1학년때  백범일지 등 백범 선생에 대한 전기들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님의 침묵’ 등 만해 스님의 글에 내 인생이 뒤 바뀌어 버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우리 집안이 원래 증조부 때부터 기독교를 믿어왔고 아버지 삼촌이 교회 장로셨고 거의 전 집안이 기독교 일색인데 (우리 집안에 목사, 장로들만 수십명이 될 것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가 너무 좋아서 한용운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스님>이라 어? 이상하다? 어릴적부터 내가 들은 불교는 우상 숭배다 미신이다 등으로 쇠뇌되어 왔는데 스님이 이런 시를 쓰다니...?
 
몹시도 놀라웠고 시집 <님의 침묵>과 <조선 불교 유신론>을 읽고<원효사상>등을 읽었는데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이었고 집안에서는 <훌륭한 목사님>이 되는 것이 간절한 바램이었다.
 
5남매의 막내인 나는 초등학교 때 시골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다  대구로 전학을 와서 기독교 학교로 진학을 했고 우리 집안으로서는 당연한 바램인지도 모르겠지만 목사님이 되기를 바라던 집안의 바램과는 달리 만해의 시와 불교의 세계는 온통 내 인생을 뒤 흔들어 놓았다.
 
초등학교 때 신, 구약 성서를 다 읽었고 찬송가도 당시 합동 찬송가 1장부터 562장 까지 모르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불렀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들의 기대 - 목사님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소원>이었다. 고등학교 때 참으로 많이 달라지게 되었는데 틀에 얽매인 교육, 대학 진학만을 위한 교육, 오직 <출세>에만 목적을 두는 듯한 교육이 점점 싫어졌고 학교가 따분해 졌다. 
 
이때 우연히 경남 산골읍의 ‘ㄱ’ 고등학교의 애기를 듣고는 몹시도 호감을 느꼈는데 얼마 뒤 그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대구 흥사단에서 강연을 하셨는데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후세에게 남길 최대 유산’이라는 강연에 나는 완전 취해 버렸고 그 학교로 전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고 다니던 학교도 가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 한 학년 낮추어 1학년으로 ‘ㄱ' 고등학교에 전학을 했는데 1969년 이었다. 정치 쪽에 상당히 일찍 눈을 뜬 나는 진작부터 박정희도 이승만처럼 장기 독재를 하기 위해서 개헌을 하지 않을까 하고 주변의 벗들과 자주 걱정을 하고 토론을 했는데 모두들 관심도 없었고 공부나 해야한다는 식으로 외면을 했지만 나는 깊이 고민하고 또 고민을 했다.삼선개헌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을 하였고 어떻게든 막아야한다는 생각을했다.

기사입력: 2009/11/23 [15:26]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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