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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 정조의 측은지심

세상사는얘기/다산함께읽기

by 박종국_다원장르작가 2009. 12. 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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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호 (2009.12.9)


 

교양인 정조의 측은지심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1793년 어느 날 경연(經筵)에서의 일이다.


곡식 5만 포(包)를 보내달라는 제주목사의 요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전라관찰사는 전라도 일대에 저축해 둔 곡식이 많이 줄어들었고, 또 제주도는 호구가 3만 호밖에 안되니, 5만 포의 절반만 보내주면 된다고 보고해 왔다. 정조는 “저 섬의 굶어 부황이 든 백성들이 밤낮 먹여주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만약 반을 줄여주라고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찌 실망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바닷가 고을의 형편도 전라도에서 아뢴 바와 같으니, 제주도 백성 때문에 전라도 바닷가 고을에 해를 끼칠 수도 없다. 도신(道臣, 관찰사)이 올린 보고서대로 3만 포를 빨리 실어 보내도록 하라. 나머지는 내탕고의 돈을 내어 주겠다.” 5만 포를 다 보내되, 전라도 바닷가 고을에 피해를 끼칠 수 없으니, 임금의 개인 재산(내탕고)에서 돈을 내어 2만 포를 보충해 주겠다는 것이다.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하니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이렇게 기민 구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노라니, 어느 덧 새벽 4시다. 이러다가는 밤을 꼬박 새울 판이라, 신하 한 사람이 잠자리에 들기를 청했더니, 정조의 말인즉 이렇다. “아침에 전라 감사의 보고서를 보았는데, 제주에 기근이 들었다고 알려와 나리포창(羅里浦倉)의 곡식을 배로 실어 보내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굶주린 섬 백성들이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도 불쌍해 잠시도 잊을 수가 없다.”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아마도 제대로 된 왕의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곡식을 꾸리고 배에 실어 나르는 바닷가 백성들은 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시퍼런 바닷물에 배를 타고 노를 젓는 그 수고로움이 눈에 삼삼하여 절로 눈을 붙일 수가 없구나.” 제주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가져다주려면 전라도 해안가 백성들이 또 시퍼런 파도를 노를 저어 건너야 한다. 그 백성들의 고생이 눈에 삼삼하여 왕은 절로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측은지심이 가득한 왕은, 곡식을 실어 보낼 때마다 처마 끝에 혹 바람 소리라도 스치면, 한밤중에도 불을 켜라 하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린다. 잠을 이룰 수 없는 이유를 그는 다시 밝힌다. “백성이 굶주리면 나도 굶주리고, 백성이 배가 부르면 나도 배가 부르다. 저 섬의 수만 명 백성들이 천 리 먼 곳에서 자신들을 먹여주기를 바라고 있고, 또 몇 백 명 뱃사람이 멀리 깊은 바다를 건너간다. 이런 때 한 줄기 바람, 한 방울 비라도 고르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편히 잠들고 싶어도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는가? 도신과 수령들이 나의 이런 마음을 헤아린다면, 섬 백성들도 따라서 살아날 것이다.” 정조의 이 말이 입에 발린 말은 아니다. 『홍재전서』와 『정조실록』을 읽어보면, 그는 유가(儒家)의 이상에 부합하는 선정을 베풀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있는가


정조는 왕이다. 그의 행동과 사유에는 마키아벨리즘도 언뜻언뜻 비친다. 게다가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흔히 정조의 개혁을 말하지만, 그 개혁은 어디까지나 보수적인 성격의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경전과 역사, 문학에 정통한 당대 최고의 독서인이자 교양인이었다. 곧 교양 있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던 것이다. 그가 백성에 대해 가졌던 한없이 깊은 측은지심도 바로 유교의 교양에서 출발한 것일 터이다.


지금은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국민이 정치지도자를 선출하는 세상이다. 이 점에서 세상은 확실히 진보했다. 하지만 국민이 선출한 정치지도자가 정조와 같은 독서인이자 교양인인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하는 정치의 바탕에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 곧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입만 벙긋 하면 역사와 국가를 들먹이고 백년대계 운운하지만, 글쎄 그것이 국민을 진정 배려한 것인지는 더더욱 알 길이 없다. 연일 신문에 등장하는 거창한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홍재전서』의 「일득록」을 읽고서 이렇게 적어 본다. 정치에 뜻을 두신 분들은 어디 「일득록」부터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이 어떨지?(이 글에서 한 이야기는 모두 『홍재전서』「일득록」에 나오는 것이다)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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